근대 이전의 많은 국가가 신분제 사회였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자조선은 범죄자를, 고구려 신라 백제는 전쟁포로를 노비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도 신분사회였다.
양반과 중인, 상민, 그리고 노비가 있었다. 조선의 최하층민 노비는 '종'으로 불렸다.
'노(奴)'는 남자 종을, '비(婢)'는 여자 종을 말한다. 이들은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처럼 취급되었으며, 노비의 신분을 벗어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글을 배울 수 없었고, 그저 일만 하며 살았다.
그러나 한문을 배우고, 양반의 전유물이었던 글을 지어 남긴 사람이 있다. 조선 지배층의 부패와 부조리를 적은 상소문을 올리고, 백성들의 참혹한 실상을 시로 남긴 어무적(魚無迹), 그는 김해의 '관노'였다.

어무적은 성종과 연산군 무렵 김해에서 노비로 살았다. 본관은 함종이다. 생원이었던 어변문의 손자이며, 사직(司直. 조선시대 군사조직인 '오위'에 두었던 정오품 서반 무관직)을 지낸 어효량의 서자이다. 어머니는 김해 관아에 딸린 관비(관의 여종)였다.
 
좌의정을 지낸 어세겸(1430∼1500. 조선시대 문신), 어세공(1432∼1486. 조선시대 문신)과는 일가이다. 아버지는 양반이었으나, 어머니가 관비였기에 어무적의 신분은 노비였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노비 세전법은 가혹한 법이었다. 부모 가운데 어느 한편이라도 노비 신분이면 자녀는 당연히 노비가 됐다. 어무적 역시 세전법에 따라 김해 관아의 노비가 되었다.
 
비록 노비 신분이었고 또한 서자였지만, 어무적은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익혔다. 천인은 글을 익힐 수 없었던 시절, 어무적이 글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을까, 불운이었을까. 글을 익혀 이치와 도리를 깨치고 뛰어난 시재를 계발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을 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고 평생을 울분을 삭히며 살았으니 그건 불운이었을 게다.

이상원 씨가 쓴 <노비문학산고(국학자료원, 2012)>는 노비 문인들이 남긴 한시를 찾아 그 의미를 설명한 책이다. 이 책은 어무적과 백대붕, 이단전, 정초부 등 노비 문인들의 뛰어난 작품과 그들의 삶을 고찰하고 있다.
 
이 책에는 어무적의 어릴 적 일화가 한 편 소개되어 있다. 청강 이제신(1536~1583.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의 문집 <청강신화>에 기록된 이야기다. 어무적이 아버지를 따라 이른 새벽 절간을 지날 때였다. 아버지가 산봉우리 사이에서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시를 지어보라고 했다. 어무적은 "靑山敬客至 頭戴白雲官(청산경객지 두대백운관/ 청산이 손님 오는 것을 보고, 머리에 흰 구름으로 갓을 썼네)"라는 시를 지었다.
 
어효량은 아들의 재주를 아껴 학문을 가르쳤다. 어무적은 아버지의 후원에 힘입어 후일 면천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형식적이지만 서자들에게 내려진 '율려습독관(대나무통으로 만든 악기인 율려에 관한 서책을 강습시키기 위해 선발한 하급 관직)'도 지냈다. 그러나 이것은 어무적이 서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고착시키는 일일 뿐이었다.
 
어무적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기로운 성품을 지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어무적이 올린 상소문에 대한 기록이 있다. 연산군 7년(1501)에 올린 상소문은 조정의 폐해에 대한 지적과 군왕으로서 올바른 정사를 펼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상소문에는 "옛 사람이 말하기를 '새는 지붕은 위에 있지만, 새는 줄 아는 것은 밑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세상에서 밑에 있으면서 잘 볼 수 없는 위의 일을 아는 사람은 신보다 자세한 자가 없습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어무적은 당시의 조정을 '빗물이 새는 지붕'으로 여겼던 것이다. 어무적은 또 "진실로 신의 천루함을 더럽게 여기지 마시고 대궐 안에서 대답할 기회를 주신다면, 전하의 귀가 미처 듣지 못한 바와 전하의 눈이 아직 보지 못한 바를 한결같이 들으시도록 하겠습니다"라며, 조목 조목 조정이 잘못하는 바를 밝혔다.
 
어무적의 상소문은 묵살당했고, 왕으로부터의 회답은 없었다. 그러나 노비 어무적이 올린 상소문에 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뒤 선조 34년(1601)에 왕이 신하들에게 내린 하교에 다시 한 번 어무적의 이름이 등장한다. 선조가 어무적이 남긴 시 '유민탄(流民嘆. 유랑하는 백성의 탄식)'의 구절을 인용해 신하들을 꾸짖은 것이다. '유민탄'은 관리들이 백성의 형편을 잘 보살펴 선정을 펼쳐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담은 한시이다. 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백성이 고통의 말을 해도 임금은 모르고 오늘 백성들은 모두 살 곳을 잃었구나. 궁궐에선 매양 백성을 걱정하는 조서 내리는데 지방 관청에 보내져서는 한갓 헛된 종이조각."
 
선조는 '유민탄'의 이 대목을 들어, 이것이 우리나라의 폐습이라며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 반상의 구별이 엄격했던 조선에서 왕이 노비의 이름과 그 시를 예로 들었다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유민탄'이 던지는 메시지는 강했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1569~1618)은 시 비평집 <성수시화>에서 어무적의 '유민탄'을 당대의 걸작으로 평가했다.
 
어무적이 남긴 또 다른 한시 '작매부(斫梅賦. 매화나무를 잘라내는 노래)는 강제로 매화나무의 과실을 징수하는 탐관오리 때문에 고통을 받았던 백성들의 울분을 대변하고 있다. "황금 같은 열매가 많이 달리니 벼슬아치는 토색질 멋대로 하여, 낱알을 불려 갑절로 거둬가고 걸핏하면 매질이나 해대니, 아낙은 원망하며 낮에 지키고 어린 것은 울며 밤에 지키네. 이것이 다 매화 탓이니 매화가 근심거리 되었구나. (중략) 어찌 베어버리지 않을 수 있으랴."
 
이상원 씨는 '작매부'를 통해 두 가지 모습의 매화를 대비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씨는 "고통과 역경을 견뎌내며 살아가는 백성들의 처지에서 느껴지는 매화의 모습과 사대부들이 자주 완상하고 칭송하며 관념적으로 시제에 등장시키는 매화는 양날의 칼과 같다"고 지적했다. 또 이 씨는 "어무적의 '작매부'는, 정약용이 지은 '애절양(哀絶陽. 양근을 잘라버린 서러움)'과 함께 비극적인 상황을 포착하여 당시 피지배층이 당하던 고통과 탐학무도한 지배계층을 고발한 대표적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애절양'은 탐관오리들이 이미 죽은 사람들과 갓난아이의 이름까지 군적에 올려 세금을 가혹하게 거둬들이자, 백성들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며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버리는 참혹한 현실을 고발하는 시이다.
 
노비이면서 서자였던 어무적의 억울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시도 있다. 어세겸에게 보낸 시에는 "다 같이 이 세상에 난 남자 몸이건마는 그대는 상서로운 봉황, 나는 가난한 물고기 (중략) 이러한 마음을 글로 나타내기는 어려워, 지음에게만 하소연하니 남에겐 말하지 마소서"라는 대목이 있다. 어세겸과는 '지음(知音 :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란 뜻)'이란 단어를 쓸 만큼 가까웠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무적의 열패감이 잘 묻어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어무적의 마지막은 불우했다. 중종 말년에 편찬된 어숙권(어세겸의 서손-서자의 아들)의 수필집 <패관잡기>에 관련 기록이 있다. "어잠부(잠부는 어무적의 자)가 김해에 살 때에 매화나무를 도끼로 찍는 사람을 보고 부(작매부)를 지었다. 김해 원이 그것을 읽어보고 크게 화를 내어 잡아다가 그 죄를 다스리려 하자, 잠부가 다른 고을로 도망하여 절도사 무열공 박원종에게 가서 의탁하려 했으나, 병들어 역사에서 죽고 말았다."
 
어무적이 남긴 시와 삶의 흔적을 <속동문선> 등 고문헌에서 찾아내 번역을 하기도 한 이상원 씨는 "다른 노비 문인들에 비해 그래도 어무적의 시는 여러 편이 남아 있다. 그만큼 훌륭한 작품이었기에 다른 책들에 기록되고 인용된 것이다. 어무적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어도 시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다"고 전했다. 이 씨는 "어무적의 시를 읽어보면 예나 지금이나 부패한 정치권력은 여전하다는 느낌이 든다. 책 한 권 펴내고 정치판에 나서는 숱한 사람들의 행동에 비하면, 어무적이 남긴 시는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노비이자 서자였기에 태어나고 죽은 시기조차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어무적은 당대 백성들의 삶을 직시하고 그 실상을 담은 시로 자신을 세상에 우뚝 세웠다. 사람들은 '큰 시인' 어무적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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