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참 빠르게 변한다. 구한말에 태어나 1970년대 초까지 살았던 사람들은 숨가쁘게
변해가는 격동의 역사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리라. 더러는 세속의 흐름에 흔들리기도 했을 것이다. 이번호 '인물열전'은 김해 장유에서 태어나 한평생을 유학자로 살았던 월헌 이보림의 삶과 학문세계를 살펴본다. 급변하는 세상을 살았으나, 학자로서 중심을 잃지 않고 마지막까지 선비의 의리를 지킨 월헌 이보림(月軒 李普林 1903~1972).
월헌은 학문의 근본을 논할 때, 그 근본이 지심(持心. 마음가짐을 바르게 한다는 뜻)에 있다고 논했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며, 사람과의 접촉을 바르게 하고, 일 처리를 바르게 하며, 처세를 바르게 하는 것, 이 다섯 가지 바른 자세 중에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이 근본이다. 근본이 바르면 그 나머지는 바르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는다."

1903년 장유 덕정마을에서 출생
조선 중종 5남 덕양군의 후손
17세때 서해 은거 간재 전우 찾아 기호학파 학풍 이어받아 학문연마
한평생 유학자로 학문세계 외길


▲ 월헌 이보림의 영정.
월헌 이보림은 1903년 장유 덕정마을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종의 5남인 덕양군의 후손이다. 덕양군의 손자인 귀원군의 현손(손자의 손자) 소요재 이춘흥이 명종 때 김해로 이거했는데, 월헌은 소요재의 7대손이다. 부친은 봉정공 이승기(鳳亭公 李承驥 1885~1945)이다.
 
월헌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행동이 단정했다. 조부인 농은공 이경현(濃隱公 李慶鉉 1859~1936)이 손자인 월헌을 매우 사랑하고 아꼈다. 손자의 공부를 위해 '재숙소'(齊肅所·현 화산재)를 짓고 숙사(塾師:글방의 스승)를 초빙했다. 공부를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한문의 문법을 깨쳐 문리(文理:글의 뜻과 문장이치를 깨달아 아는 힘)가 텄다. 열다섯 무렵에는 이미 많은 책을 두루 읽었다.
 
열일곱이 되던 1920년 봄, 월헌은 부친 봉정공의 영을 받아 서해의 계화도(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에 있는 섬)에 은거하여 강학을 하던 간재 전우(艮齋 田愚 1841~1922 조선 후기의 학자)를 찾아갔다. 간재는 조선 중기의 학자 이이의 학설을 따른 기호학파(이황의 학설을 따르는 영남지방의 성리학자들을 지칭하는 영남학파와 구별하여 일컫는 학문 유파)의 주요 학풍을 계승한 학자이다. 월헌은 간재의 문도(門徒:이름난 학자 밑에서 배우는 제자)가 되어 학문을 연마했다. 간재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간재의 수제자인 석농 오진영(石農 吳震泳 1868∼1944 조선 말기의 학자)에게 계속 학문을 배워 간재학파의 학통을 이어받았다.
 
월헌은 전통적인 교육을 제대로 받은 유학자로서는 거의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인물이다. 유학자였던 월헌은 서재를 열어 교육을 실시,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유학을 훈도했다. 광복, 6·25, 5·16 등 급변하는 시대를 살았던 월헌은 세속에 동요하지 않고 선비의 의리를 마지막까지 지키고 실천했다.
 
월헌은 일제의 강압에 의연하게 대처하며 항거했다. 논문 '월헌 이보림 선생의 생애와 학문'을 쓴 정경주 교수(경성대 한문학과)는 "월헌 선생은 '우리가 오늘날 구차스레 살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니, 오직 수사선도(守死善道) 넉 자 부적을 이마에 붙여 두어야 하겠다'고 하고는 서재를 열어 원근의 학도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서재가 좁아서 용납할 수 없는 정도였다"고 적고 있다.

덕정마을의 월봉서원에는 월헌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월봉서원의 주련(좋은 글귀를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에서도 월헌이 주장하며 실천했던 글귀인 '독립불구(獨立不懼) 수사선도(守死善道)'를 볼 수 있다. 독립불구는 '홀로 우뚝 서서 두려움이 없다'는 뜻으로 세파에 따르지 않고 진리를 지키겠다는 의미이며, 수사선도는 죽음으로써 선도(올바르고 좋은 길로 이끔)를 지켜가겠다는 의지를 말한다.
 
1945년 부친 봉정공이 세상을 떠났다. 석 달 뒤 광복을 맞았다. 월헌은 그 일을 낱낱이 적어 부친의 영정에 고했다. "내가 죽은 뒤에 세상이 바뀌거든 나에게 그 사유를 고하여 구천의 한을 위로하라"는 봉정공의 유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일국교정상화 땐 강력히 반대
전국 유림들에 '항한일회담윤고문'

1952년 12월부터 1965년까지 한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를 위한 양국 간의 외교 교섭이 시작됐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된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전국을 울렸다. 조선의 유학자로서 평생을 살아 온 월헌도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월헌집 권6>에는 한일회담에 반대하여 전국의 유림들에게 돌린 '항한일회담윤고문(抗韓日會談輪告文)이 남아있다. 정경주 교수의 국역으로 읽어보자.
 
"이른바 한일회담이라는 것은 이 얼마나 망측한 일인가? 이는 이른바 아침의 원수를 저녁에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나라에 이런 변괴가 있으면 정치하는 자는 마땅히 목숨을 버리고 견고하게 거부하여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함으로써 전날의 거울을 경계로 삼아야 하는데, 이제 만약 조인한다면 이는 곧 대문을 열어 도적을 받아들여서 병자년의 잘못된 전철을 답습하는 것이다." 일제 식민통치를 목도했던 월헌이 한일회담을 성사시키려는 정치권력에 던진 메시지는 이처럼 강렬했다.
 
정경주 교수는 "월헌이 평생을 통하여 구현하고자 한 것은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 하더라도 사람의 삶에는 시대를 넘어서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고, 이러한 가치를 굳건하게 지켜가는 것이 지식인의 본분이라는 신념이다"라며 "월헌의 생애와 학문은 변화와 변혁을 다반사로 여기는 오늘날에 있어서 더욱이 반추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 일신재에 있는 월헌 선생의 작은 방. 선생의 학문세계가 고스란히 배어있는 공간이다. 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

월헌 강학소 월봉서원 '일신재'
장서실 2508책 서적목록과 함께
이보림 선생 묵향 배어나는 듯

덕정마을의 월봉서원에는 월헌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일신재(日新齋)가 있다. 월헌의 강학소이다. 월헌이 머물렀던 방에는 아직도 묵향이 배어있는 듯하다.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을 쌓으면 몸에서 책의 기운이 풍기고 문자의 향기가 난다는데, 학자로서 월헌의 흔적은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이 남아있다.
 
방안에는 월헌이 친필로 쓴 글 '만물정관 개자득(萬物靜觀 皆自得:세상의 모든 사물을 고요히 바라보고 문득 서서히 깨닫는다)'을 비롯해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는 '태극'이 그려져 있다. 월헌이 평소에 앉았던 자리 뒤편에는 방 만한 크기의 다락이 있다. 늘 가까이 하던 책을 넣어둔 '장서실'이다. 장서실 아래 벽에는 '일신재서적목록'이 아직도 붙어 있다. 가는 붓으로 쓴 작은 글씨의 목록에는 책 제목과 권·질의 수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총 2천508책의 목록이다. 책 한 권 한 권을 소중하게 여기고 분류하고 정리한 학자로서의 마음가짐이 느껴지는 목록이다.
 
▲ 월헌 선생이 부인과 함께 찍은 생애 마지막 사진. 선생이 안고 있는 아이가 손자 이준규 교수이다.

후손들이 기억하는 월헌의 풍모는 아직도 생생하다. 월헌의 둘째 며느리 김문협(화재 이우섭의 부인·81) 씨는 "친영(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예식을 올리고 신부를 맞아오는 예)을 오신 아버님 때문에 제 친정이 있던 창원 북면이 시끌시끌 했답니다. 마치 왕이 납시는 듯, 고을이 생긴 뒤 가장 귀한 사람의 행차라고 말할 정도였지요. 기골이 장대하고 귀인의 풍모였는데, 그야말로 신언서판(생김새·말씨·글씨·판단력 등 인물을 보는 네 가지 면)을 갖춘 분이셨지요"라며 옛 추억을 들려주었다. 월헌과 화재를 찾아 온 식객, 문인, 학동들이 늘 북적거려 평균 40여 명이 머물던 집과 강학소의 살림살이를 맡아보느라 힘들었던 옛 기억도 선명했다.
 
월헌의 손자인 이광규(54)씨는 중학교 3학년 때 조부의 임종을 지켜보았기에 많은 기억이 남아있다. "어려서 할아버님께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배웠지요. 글을 익혀 할아버님 앞에서 외고, 물음에 답해야 했는데, 틀리면 회초리도 맞았고, 맞으면 맛난 사탕을 받았습니다. 생각이 안 나면 일단 울고 방 밖에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 외곤 했습니다." 이광규 씨는 "할아버님이 비문 같은 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읽을 때, 그 내용이 슬픈 내용일 때, 한문을 읽어 내려가는 할아버님의 목소리만 듣고도 한자 하나 모르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라며 옛 일 한 대목을 들려주었다.
 
손자 이준규(41)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는 월헌의 각별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학문을 할 손자'라며 늘 귀애하였다. 1972년 어느날, 월헌이 찍은 마지막 사진에서도 두 살 남짓한 이준규는 월헌의 품에 안겨 있었다. 월헌이 가장 좋아하는 손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란 이준규 교수는, '맹자' 수진본(수첩 크기만큼 작게 만든 책)을 품에 넣고 군에 입대할 정도로 글을 좋아했고, 현재 한문학과 교수로서 학문을 계속 하고 있다. 월헌의 학맥이 아들인 화재 이우섭과 손자인 이준규에게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월봉서원 일신재에서 마지막까지 후학들을 가르쳤던 월헌은 1972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유 반룡산 중턱의 화산재 위편 언덕에 묻혔다. 월헌과 화재가 평생 학문을 하고 강학을 했던 월봉서원에서는 지금도 '논어교실'과 '성독대회'가 열리고 있어,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질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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