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광초등학교 정문 옆에 버티고 선 은행나무. 200년은 넘었을 법한데, 돌우물 옆 250년 된 노거수와 함께 동상동의 어제 오늘을 지켜온 증인인 셈이다.
김해읍성 동문 밖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라 동상동(東上洞)이라 했는가 보다. 어제 오늘 우리가 걷고 있는 동상동이란 이름도 도로명으로 부여되는 새 주소명 때문에 점차 사라져 갈 운명이다.
우리 동네 이름에 얽히고, 이름으로 남았던 지난날의 수많은 사연들도 점차 잊혀져 갈 것이다. 좀 더 시시콜콜한 사연까지도 이야기하고 남겨야겠다는 사명감마저 든다.


지난번에는 분산 아래 서재골(書齋谷) 입구를 바라보고 왼쪽 남사면에 있는 장군차 군락지까지 찾았었다. 오늘은 장군차 군락지를 내려와 롯데캐슬가야 뒷길을 지나며 발걸음을 시작하려 한다. 2005년 12월에 입주를 시작해 696세대가 살고 있는 제법 큰 아파트 단지다. 1단지를 지나 왼쪽으로 분산에 오르는 좁은 도로가 보이는데, 입구만 아스팔트로 포장된 임도다. 길을 따라 꼬불꼬불 오르다 보면 한 단 높은 시멘트 포장의 주차장이 보이고, 그 위로 사충단에 오르는 흰색 화강암의 가파른 계단이 눈에 들어온다.

▲ 김해를 지키다 전사한 충신 4인의 제단 사충단.
사충단(四忠壇)은 임진왜란 발발 직후 1592년 4월에 부산 동래에서 진군하는 왜병을 막고자 의병을 일으켜 김해를 지키다 전사한 김득기(金得器) 송빈(宋賓) 유식(柳湜) 이대형(李大亨) 네 분 충신을 기리고 제사하기 위해 만든 제단이다. 조선말 1871년에 고종의 명에 따라 아래 쪽 동상시장 부근에 처음 세웠다가, 몇 번의 이전을 거쳐 여기에 자리 잡게 되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99호로 네 분의 충신이 순절하셨던 매년 4월 20일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사충단 아래로 펼쳐지는 김해평야와 죽도, 낙동강과 남해바다의 시원한 풍경을 음미하며 비탈길을 내려오다 보면, 막걸리와 도토리묵의 유혹도 있고, 항상 짖어 대는 강아지들의 수선스러움도 있다. 롯데캐슬가야 2단지를 지나 왼쪽 산자락에 세워져 있는 또 다른 장군차 군락지의 팻말에 눈길 한번 주고, 한덕아파트를 채 못 가 오른쪽으로 꺾어 가야로를 건넌다. 1994년 12월에 입주해 현재 298세대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한덕아파트는 거대한 콘크리트 탑처럼 혼자 우뚝 솟아 있다.

가야로를 건너면 동광초등학교 후문에 이르는데, 1991년 김해문화원 간행 <김해지리지>에서 저자 이병태(李炳泰) 선생은 동광초등학교 동쪽, 그러니까 지금 지나는 이 언덕 언저리에 있었던 동상동가마터를 전하고 있다. 3기의 굴가마(登窯)가 2m 간격으로 나란히 있었는데 당시에 이미 1기만이 남아있었다 한다. 고려~조선을 통해 여기서 생산된 도자기가 일본에서 킨카이야키(金海燒·김해소성자기)로 불리면서 최고
▲ 동광초등 부근 폐허 언덕에서 발견되는 도기 파편.
의 대접을 받았다는 것과 그러한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김해(金海)'라 새겨진 인화문분청사기가 출토되었단다. 일본의 다도에서 귀히 여기는 막사발 찻잔의 고향이며,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왜군이 김해의 도공들을 데려가기도 했던 후보지의 하나로 생각되고 있다. 동광초등학교 동쪽과 남쪽의 언덕을 조심스레 둘러보니, 테니스장 바로 옆에 폐허처럼 되어 있는 3단 언덕의 잡풀더미 속에서 청자 분청사기 도기류의 파편을 수습할 수 있었다. 오래 살고 계시다는 노인장께 물어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은 여기서 막사발 찻잔과 파편들을 주워가기도 했다고 한다. 새 주소 호계로 500번길 15-87에 대한 확인조사를 실시하여 표지판이라도 세워 귀중한 유적을 소개하면서 보호에도 힘써야 할 필요가 있다.
 
확신하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동광초등학교 뒷문을 통해 비탈길을 내려가면 학교 뒷마당이 나오는데, 오밀조밀한 오래된 건물과 수목들의 어우러짐이 학교를 스쳐간 세월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정문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200년도 넘었을 것 같은데, 학교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온 증인인 셈이다. 동광초등학교는 올해로 개교 114주년을 맞이했다. 아마도 김해에서 가장 오래된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일 것이다. 학교 홈페이지에 따르면, 1898년 2월 사립육영학교 개교, 1906년 공립보통학교 인가, 1910년 김해공립보통학교로 개칭, 1944년부터 동광국민학교가 되었으며, 지난 2008년 2월에는 제100회 졸업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오랜 역사만큼 나라와 지역에 기여한 훌륭한 인물도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학교나 동창회조차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료의 부족을 탓하며, 정작 나 자신은 기록을 남기지 않는 우리의 초상을 보는 것 같아 입안이 씁쓸하다.
 
▲ 동광초등 졸업생인 한뫼 이윤재 선생의 동상.
그런 가운데에서도 1908년 졸업생 한뫼 이윤재(李允宰) 선생은 김해는 물론 우리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기신 분이다. 1888년 김해 대성동 출생으로 1919년 평북 영변 숭덕학교 교원 재직 시 독립운동에 참가해 3년간 옥고도 치르셨고, 1924년 중국 북경대학 사학과 졸업 후, 1937년 일제가 181명의 지식인을 검거했던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다시 옥고를 치렀으며, 대동출판사와 기독교신문사 주필, 연희전문과 감리교신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시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형무소 수감 중 1943년 12월 8일 심한 고문으로 돌아가셨다. 선생의 대동출판사에서 사건의 계기가 된 <큰 사전> 출판의 일부를 담당한 탓에 핵심인물 11명에 포함되었고, 고난을 받으시다 광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던 것이다. 지금 김해도서관 앞에 동상으로 앉아 계신 선생은 <문예독본, 문장독본, 표준한글사전> 등을 저술하셨고, 1962년 3·1절에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동광초등학교 마당에는 국조 단군, 이순신 장군, 반공소년 이승복, 책 읽는 소녀 등의 동상과 석상은 있지만 선생의 동상은 없다.

1979년 3월에 창단한 남자농구부는 2010년의 우승을 포함해 여러 차례 전국소년체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프로농구에서 활약하는 졸업생도 있다고 한다. 졸업생 한 분에게 들어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제5회(1966년)와 제6회(1970년) 아시안게임 장대높이뛰기에서 각각 동메달 획득했던 제49회 졸업생 홍상표 씨도 당시 재학생들에게는 자랑거리였던 모양이다. 50회 졸업의 허명철 선생은 부산대 의대를 나와 1985년부터 금강병원을 개원 운영해 오고 있으며, 2007년에 조은금강병원을 설립하는 한편, 가야불교를 비롯한 우리 지역사연구와 꾸준한 문화재보호활동도 전개해 오고 있다. 학문과 교육의 업적을 남기면서도 일제 치하에서 치열한 독립운동도 전개했고, 국제대회에서 국위도 선양했으며, 지역을 위해 의술을 펴면서 문화운동에도 앞장서는 동광초등학교의 전통은 김해 사람에 대해, '강하고 간결한 것을 숭상하고(俗尙强簡), 농사에 힘쓰며 배움을 좋아한다(力農好學)'고 했던 조선시대 인문지리지의 인물평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현재 29학급 760여명의 재학생이 60여 명 교직원의 가르침으로 밝고 씩씩하게 자라나고 있다.

학교 정문을 나서 기와지붕을 얹은 돌담길을 내려간다. 돌담길을 다 내려가 길은 좌우로 갈라지는데, 이 언저리에 김해읍성 동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른 쪽으로 내려가 동상시장네거리로 나서는데, '축구인의 집' 앞에서 호계로를 건너다보면, 왼쪽으로 지붕 덮은 돌우물 옆 노거수가 눈에 들어온다. 250년이나 되었다는 회화나무인데, 다른 가로수와 다르게 하늘에 걸친 가지가 호계로 중간까지 뻗어 있다. 조선후기 이래 호계천 가에 서서 읍성 안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호계천과 동상시장이 변해가던 모습을 내내 지켜보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 동상동 시장으로 더 잘 알려진 김해재래시장 입구.
길 건너 오른 쪽으로 올라가면 '김해재래시장' 이라 쓴 타원형 간판이 보이고, 그 아래로 '인정이 넘치는 동상시장' 이란 전광표지가 흘러가고 있다. 평일 아침인데도 손님의 발길이 제법 분주하다. 1997년부터 조성하기 시작한 아케이드는 눈비 없이 팔고 사는 아늑한 상점가로 되었고, 2007년 11월부터 오래된 전선과 조명시설을 교체 정비해 밝아진 등과 빨간색 형광상호판, 전등 빛으로 알록달록하게 빛나는 많은 상품들은 어둡고 침침하리란 재래시장의 이미지를 완전히 벗었다. 지난해 아내와 함께 추석 장 보러왔을 때 이용했던 새 주차장과 질 좋은 식품들은 더 이상 대형마트에 가고 싶지 않게 했고, 발굴조사를 마치고 발밑에 새로 깐 널찍널찍한 화강암 판석 길은 걷기에 편하고 깨끗하다. 팔고 사는 이의 흥정이 있고, 하나 더 넣어주는 인심이 정답다. 까만 비닐봉지 들고 여기 저기 기웃거리다 몸이 스쳐도 짜증나지 않는 명절분위기까지 공짜로 즐길 수 있는 동상시장의 정취는 어떤 그리움에 설레게 한다. 조선후기부터 2·7일에 서는 읍내장으로 시작해 점차 상설화된 동상시장은 옛 구(舊)의 '구시장市場)'이나 거북이의 '구장(龜場)'으로도 불렸다 하는데, 시장 이전에는 김해읍성에서 손님을 모시던 객사(客舍)가 자리했던 곳이다. 1820년경의 지도에 그렇게 그려져 있고, 2008년 3월부터 2010년 3월까지 상인들의 원성을 사가며 하수관거매설에 앞선 발굴조사가 시장의 남북 중심축에서 실시되었을 때, 좁은 범위였는데도 불구하고, 6채의 건물터와 청자와 분청사기, 동면(東面)·성(城)·관(官) 등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들도 출토되었던 것이다. 시간이 다 되었나 보다. 자세한 얘기는 다음 주에 인접 연화사에 들어가 계속해야 할 것 같다.
 

Tip - 국제도시 부활의 시금석 동상시장
각국 특색 살린 외국인 상점·식당 기회부여·투자 필요

요즈음 시내에서는 우리와 다른 모습의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주말이면 수로왕릉 언저리와 동상시장에 외국인들이 넘쳐 난다. '아시아마트' 같은 가게에 진열된 식재료, '베트남쌀국수' 같은 식당이나 '국제전화·환전소'의 간판들은 제법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광역시를 빼고 경기 안산시 다음으로 가장 많은 1만5천여 명의 외국인 거주자가 등록돼 있다고 한다. 반면에 동상시장 같은 재래시장을 되살리려는 시와 상인들의 노력은 지극하지만 그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동상시장 중심의 십자로는 활기를 되찾은 듯하지만, 그 뒤 열의 상점들은 그렇지도 않다.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았거나 개점휴업 같은 분위기다. 바로 여기에 김해 거주 외국인들에게 기회를 부여하고 투자해볼 수는 없을까? 각국의 특색을 살리는 상점이나 식당도 열고, 살면서 이용할 수 있는 복지와 신앙 시설 등을 아울러 조성한다면, 동상시장에 베트남타운이 생길 수도 있고, 인도타운이나 우즈베키스탄타운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며, 이들이 모두 어울려 터키 이스탄불의 '바자르' 같은 국제시장이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정착을 보장하면서 재래시장 되살리기에 활용하고, 김해의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만들어 나가는 방법은 어떨까? 동상동시장의 국제화야말로 국제도시였던 가야의 전통을 되살리는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영식 인제대역사고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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