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죄인을 먼 시골이나 섬으로 보냈다. 권력과 문화의 중심지인 중앙을 떠나 먼 변방으로 보내진 죄인들은 일정 기간 동안 제한된 곳에서 살아야 했다.
이를 귀양이라고 한다. 원래 말은 귀향(歸鄕)이다. 죄를 지어 관직에 나아갈 수 없는 자들을 귀향하게 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는 유배(流配)라는 말을 많이 썼다. 죄인이라고는 해도, 정치가이며 학자였던 그들은 유배지에서도 책을 읽고 세상을 관망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유배지에서 많은 글을 쓰기도 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 김만중의 <구운몽> 등 우리 역사상 중요한 책의 저술 작업도 그들의 유배지에서 이루어졌다. 천주교도를 박해하여 순조 1년(1801)에 일어난 '신유사옥'에 연루된 조선시대 후기의 문인 낙하생 이학규(落下生 李學逵. 1770~1835)는 김해로 유배를 왔다. 24년 동안 김해에서 유배생활을 한 이학규는 김해의 역사와 풍속, 김해사람들의 생활상을 시로 남겼다. 비록 김해인은 아니지만, 당시의 김해를 많은 시와 저술을 통해 남긴 이학규는 또 다른 의미에서 진정한 김해의 인물이다.

성호 이익 가문이 외가
20살 무렵 문장과 글자의 원리, 한문 한글 번역 능력 명성 자자
26살 때 벼슬 하지 않은 자격으로 정조 24년 '규장전운' 편찬 참여
문집 '어제홍제전서' 교정 맡기도


이학규는 평창이씨이며, 자는 성수, 호는 낙하생이다. 부친 이응훈(李應薰)은 이학규가 태어나기 5개월 전, 22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유복자로 태어난 이학규는 서울의 외가에서 자랐는데, 외가는 성호 이익의 가문이다. 이학규는 외할아버지 이용휴에게 교육을 받았다. 외삼촌 이가환도 실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이학규의 학문과 사상은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한 남인들의 영향을 받았다.
 
20살 무렵에 이학규의 문재가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문사(文詞. 문장에 나타난 말)에 대한 재질이 뛰어났고, 자학(字學. 글자의 근본 원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한문을 한글로 번역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이같은 이학규의 재능은 정조의 각별한 아낌과 대우를 받았다. 이학규는 26살 때 벼슬 없는 선비의 자격으로 정조 24년에 <규장전운(奎章全韻)> 편찬에 참여했다. 정조의 명령으로 규장각에서 펴낸 책으로, 한자의 운(韻)자에 대한 사전이다. 정조의 문집인 <어제홍제전서(御製弘齊全書)>의 수교(讐校. 글이나 책을 다른 것과 비교하여 교정함)를 맡기도 했다. 당시 이학규는 관직을 맡지도 않았는데, 정조가 이학규의 건강을 걱정할 정도로 큰 신임을 받았다.
 
순조 즉위 후 보수세력 득세
남인계에 반격 때 화순으로 유배
내종사촌 황사영 백서사건 연루
32살 때 다시 김해로 유배
민초들의 고된 삶에 연민과 공감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즉위하자, 진보적 성향의 남인에게 눌려 지내던 보수세력의 반격이 시작됐다. 순조 1년, 신유사옥이 일어났다. 정조의 신임을 받던 남인계 학자와 관료들은 대부분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고 유배를 떠났다. 이학규도 이때 전라도 화순으로 유배를 떠났다.
 
같은 해 10월 '황사영백서 사건'이 일어났다. 천주교 신자였던 황사영이, 신앙의 자유를 강구하기 위해 당시 중국 베이징에 머물고 있던 주교에게 보내려 했던 청원서와 관련된 사건이다. 황사영은 이학규의 내종사촌 아우였다. 이 사건으로 이학규는 다시 국문을 받고, 새로운 유배지인 김해로 오게 된다. 32살이었다.
 
이학규는 30여 종의 문집을 남겼는데, 대부분을 김해에서 집필했다. 조선 후기의 문학사에서 이학규는 매우 중요한 문인으로, 지금도 많은 연구자들이 그의 문학과 학문세계를 연구하고 있다.
 
왕의 총애를 받으며 중앙문단에서 인정을 받았던 이학규에게 김해는 낯선 곳이었다. 김해 유배생활 초기에 쓴 글을 보면 음식, 풍습, 자연환경까지도 모두 처음 접하는 것이라 적잖은 고초를 겪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지역에서 오래 산다는 것은 단순히 환경에 적응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지역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학규는 유배생활 중반기 무렵인 1815년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 입신양명의 뜻 꺾이고 거친 땅에 귀양 와 날로 떡장수 술집노파와도 '너, 나, 하는 사이'가 되었다. 14년 전의 일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보니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구나."(<낙하생전집> 중권에서).
 
이학규의 관심이 서울의 양반사대부에서 지역의 백성으로 옮겨졌고, 그들을 친근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유배가 길어지면서 이학규는 자신이 더 이상 조선의 지배계급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김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다. 유배기간 중 사별한 첫 부인 나주정씨와, 두 번째 부인 진양강씨의 삶을 지켜본 이학규의 마음은 가난한 김해 여성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으로 이어졌다. 이학규가 김해의 풍속을 소재로 삼아 쓴 시에는 김해 여성들이 주체로 등장한다.
 

▲ 이학규가 26살 때 벼슬 없는 선비의 자격으로 편찬에 참여한 <규장전운>.
영남대 이강옥 교수는 논문 '김해 여성과 이학규의 시 세계'에서 이학규가 일상생활에서 들리는 김해 여성의 슬픈 노래들을 문학적으로 승화했다고 주장했다. 이강옥 교수는 "이학규는 이방인의 눈으로 김해 여성의 일상을 관찰하여 시비를 따지기 보다는 귀를 열어놓고 소리로 들려오는 김해 여성들의 서러운 넋두리와 노래를 들었다"고 쓰고 있다.
 
이학규는 <전화사(煎化詞)>라는 오언절구 한시에서 김해 여성들의 화전놀이를 묘사했다. 이강옥 교수가 한글로 옮긴 시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두견새 피 토하듯 우는데 / 산꽃가지 무성하구나 / 개울가 솥에 불붙는 소리 요란하고 / 솔바람은 시원하게 불어오는데 / 여인 손의 흰 쌀가루에 붉은 물 들었네."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의 조화가 돋보이는 시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사치스런 음식에 질려하는 한양 사람들에 비해, 김해 사람들은 봄을 즐길 여유가 없을 만큼 수탈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는 지적도 하고 있다.
 
부인 나주정씨가 정약용 가문의 사람이라, 이학규는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정약용과 자주 서신을 주고받았다. 정약용도 민초들의 삶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저술활동을 하고 있었으니,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학규는 한시 <석신막지부행(析薪莫持斧行)>을 통해 수탈자의 횡포에 대항하는 김해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김해부사가 백성들이 소나무를 벌채하지 못하도록 백성들의 도끼를 빼앗아 한양으로 빼돌린 뒤 착복한 일이 있었다. 부사가 임기를 끝내고 한양으로 돌아갈 때 김해 여성들이 가마를 가로막은 채 도끼를 돌려달라고 시위를 한 일을 시의 소재로 삼았다.
 
"사또님 뵙기가 어찌 그리 어렵소 / 반겨도 우리에게 좋은 일 없겠고 / 노여워하시면 우리 살에서 피가 튀겠죠 / 집집마다 나무 없어 불 못 때게 했고 / 우릴 또 굶주리게 하였지요 / 오늘 영원히 이별하니 묻겠소 / 우리 도끼 가져다가 어떻게 했오 / 쟁기를 만들었다면 만 개가 되고 / 호미를 만들었대도 만 개가 되겠죠 / 쟁기로는 돈으로 만든 담에 구멍을 뚫고 / 호미로는 은가루분을 낼 수 있겠죠 / 사또님은 다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오?"
 
그 외에도 이학규는 김해의 문화와 풍습, 사람들의 삶을 시로 남겼다. 그 당시의 김해를 알고 싶다면 이학규의 시를 읽어보라.
 
유배 풀려난 55살 때까지 한시로 지역문화·의식향상 기여

이학규는 55살이 되던 순조 24년(1824)에 유배에서 풀려나 김해를 떠났다. 그러나 이후에도 김해를 수차례 오가며 김해의 문사들과 중인층 사람들과 교류를 계속했다. 이학규는 헌종 1년(1835)에 충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계에서는 이학규가 김해 지역의 문화의식과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보고 있다. 부산대 한문학과 이준규 교수는 "낙하생 이학규는 조선시대때 각 지역의 풍습과 민초들의 삶을 작품으로 담아낸 시인 가운데 최고라 할 수 있다"며 "그림으로 치자면 조선시대 풍속을 잘 보여준 신윤복이나 김홍도 같은 인물로, 전무후무한 시인이다. 특히 김해에서 유배생활을 한 24년 동안 김해의 문화와 풍속, 그리고 김해 사람의 일상과 노동을 통해 본 삶의 모습을 시로 남겼다. 그런 점에서 김해에서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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