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이 땅에 서양문물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유학을 국가의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에 본격적으로 기독교가 들어온 것도 이 시점이다. 양반 사대부 중심으로 전개된 유학의 세계에서 소외됐던 백성들과 신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기독교가 빠르게 전파됐다. 초창기의 교회들은 대부분 외국인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됐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교회가 400여 개라고 하는데, 대부분 외국인선교사들이 세운 것들이다.
이런 가운데, 김해에는 조선인들이 세운 유구한 역사의 교회가 있다.
배성두(裵聖斗 1840~1922) 장로는 김해교회 설립자이다. 배 장로는 김해교회를 중심으로 교육, 의료, 빈민구제, 애국 활동을 전개했다. 배 장로의 아들 배동석은 독립열사로 조국에 헌신했다. 이번 호 '인물열전'에서는 배 장로의 삶과 기독교인으로서의 활동을 살펴본다.

▲ 배성두 장로
배성두는 충주 관찰사를 지낸 배수우의 손자이다. 배수우는 1801년에 일어난 '신유사옥'을 피해 고향을 떠났다. 김해를 도피처로 삼은 배수우는 김해에 당도하기 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배수우의 아들 배광국은 무사히 김해에 도착했다. 배광국은 현 동상동에서 '강주부'로 불리던 사람한테서 한의학을 배워 약방을 열었다. 그러던 중 1840년에 배성두가 태어났다. 본명은 영업이었는데, 후일 세례를 받으면서 성두로 개명했다.
 
배성두가 교회를 설립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부산·경남지역에 기독교가 들어 온 과정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부산경남지방 기독교회의 선구자들>(고신대학교출판부, 2012)을 출간한 이상규(고신대 부총장·신학과 교수)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부산·경남지방에서의 초기 기독교 역사는 장로교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장로교 중심이었고, 장로교 이외의 교파가 소개된 것은 1920년대 이후였다. (중략) 부산·경남지방은 1890년대부터 1913년까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와 호주 장로교 선교부의 공동 선교지역이었다."
 
이 교수는 그러면서 외국선교부와 선교사들이 부산·경남지역의 기독교 운동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인들의 헌신과 봉사 역시 지대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교수는 부산·경남지역에서 활동한 선구자들과 전도자 40명의 행적을 위의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배성두는 1장 '복음화의 선구자들' 편에서 '김해지방 복음운동의 선구자'라는 제목의 글로 소개돼 있다.
 
▲ 김해교회의 옛 건물. 1922~1979년까지 이 건물에서 예배를 보았다. 십자가 아래에 한자로 '김해읍예배당'이라고 쓴 글자가 보인다. 사진제공=김해교회 역사관

이 기록에 따르면, 배성두는 부산에서 한국인 전도자들과 외국인 선교사들을 만나 신자가 됐다. 당시 부산에서 활동했던 초기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는 1893년 9월 11일자 일기에 배성두와 만난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이 교수가 한국어로 번역한 일기의 한 대목이다. "지난 금요일 '배'라고 하는 나이 많은 분이 김해에서 브라운 의사 부인의 유모 남편과 함께 사랑방으로 찾아왔다. 나는 그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에게 몇 권의 책을 팔았는데, 그 중의 한 권이 마태복음서이다. 그는 내가 서울 갈 일이 있을 때나, 김해에 들를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자기를 찾아와 달라고 나를 청해 주었다."
 
베어드 선교사를 만난 뒤 김해로 돌아온 배성두는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한편, 전도를 시작했고, 동상동 약방에서 정기적인 집회를 갖기 시작했다. 이 집회가 김해교회의 산실이다.
 
부산서 선교사 등 만나 신자의 길
1894년 약방서 정기집회 시작
1898년 큰 건물 매입해 예배당으로 본격 사용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초기 한국 장로교의 1923년까지의 역사적 자료를 모아 엮은 책. 상권은 1928년, 하권은 1968년 발행) 상권에서는 김해교회의 설립 시기를 1898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교수는 "김해지역에서 신앙공동체가 구성되고 공식적인 집회를 시작한 것은 이보다 앞선 1894~1895년으로 보인다. 어떻든 배성두는 김해지역의 첫 신자로서 김해교회를 설립하였고, 김해지역 첫 장로로서 이 지역 복음 운동의 기초를 세운 분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후손들의 증언과 김해교회 자체의 연혁을 바탕으로 기록한 <김해교회백년사>에서는 김해교회가 1894년에 설립됐다고 밝히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김해교회는 남한지역에서 조선인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교회이다.
 
배성두는 목사가 정식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실제로 교회를 이끌었다. 그런 배성두에 대한 기독교단의 신뢰는 두터웠다. 부산과 김해에서 사역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사보담은 배성두를 특별히 신뢰했다. 사보담이 1905년 9월에 쓴 선교보고서를 보면, 배성두와 초기 김해교회의 모습이 어느정도 짐작된다.
 
▲ 배성두 장로의 묘는 동상동 롯데캐슬아파트 뒷산에 있다. 묘비에 부인 이한나 여사와 합장했다고 새겨져 있다.
"그는 '금빛바다(golden sea)'라는 의미를 가진 김해(金海)의 특출한 인물로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손길이 미치는 한 그들을 돌본다. 그가 섬기는 교회에 그의 봉사의 결실이 뚜렷한데, 지난 1년 동안 17명의 세례 신자가 불어났고, 학습인은 25명이 더해졌다."
 
사보담 선교보고서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남자학교 설립계획도 영글어가고 있다." 이 대목은 배성두가 지역의 교육을 위해 봉사할 계획을 세웠음을 말해준다.
 
1907년 합성초 만들어
1909년 정식 인가
자녀 훈육도 엄격
배동석 열사 등 3명 독립운동에 헌신

실제로 김해교회는 1907년 4월, 학교를 설립하고 남녀학생을 모아 교육을 시작했다. 이 학교가 현 김해합성초등학교의 전신이다. 당시에는 남학생 30여 명, 여학생 40여 명이 다녔다. 한종교·이기수 등이 교사를 맡았다. <예수교신보>(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에 의해 1897년 4월 1일에 창간된 순 한글판 장로교 신문) 1907년 11월 15일자 기사에는 이 학교의 '1907년 하기방학 우등생 명단'도 실려 있다.
 
이 학교는 설립 2년이 지난 1909년에 정식으로 인가를 받았다. 이 때문에 김해합성초등학교는 학교 설립 시기를 1909년으로 홍보하고 있지만, 이미 2년 앞서 지역 교육 산실의 씨앗은 심어졌던 것이다. 동아일보 1926년 10월 30일자 기사는 "1909년 4월 10일에 당시 야소교 장로 배성두씨와 미국인 스미스씨(선교사)의 노력으로 사립야소교합성학교의 인가를 설립자 배성두씨 명의로 얻어서, 스미스씨 교장으로 취임되자, 김해면 북내동에 교사를 건축하고 4년제의 고등과와 4년제의 보통과에 남녀학생을 열심히 교양하였고(하략)"라며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김해교회 교인들은 "합성초등학교의 설립자가 허발 선생인 것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배성두 장로의 이름도 함께 기억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성두는 자녀 훈육에도 엄격했다. 장녀 배정명(1888~1956), 장남 배동석(1891~1924), 차남 배창석(1892~1965) 등이 모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특히 배동석은 세브란스 의전 학생으로서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3·1운동의 학생대표로 활약했다. 선언문을 갖고 김해로 온 배동석은 김해의 열혈청년 임학찬·배덕수 등과 의논하여, 3월 30일 밤 10시 김해읍내 중앙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김해 최초의 만세시위였다. (김해뉴스 2011년 8월 10일자 참조) 배동석은 현재 국립현충원에 독립유공자 자격으로 안장돼 있다.
 
배동석의 두 아들 배대위는 부산진교회의 장로로, 배유위는 미국에서 역시 교회 장로로 봉사하며 조부인 배성두의 삶을 이어받다 세상을 떠났다. 배유위의 아들 배기호 씨는 선조들의 삶과 김해교회를 중심으로 한 신앙의 역사를 담아 소설 <약방집 예배당>(박경숙 지음, 홍성사)을 펴내기도 했다. 이 소설은 영문판과 중국어판으로도 출간됐다.
 
▲ 김해교회 설립 표지석     
김해교회는 현재 6.6㎡(2평) 남짓한 공간에 역사관을 마련하고 교회의 역사를 증언하는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고준석 장로가 역사관장을, 김영기 안수집사가 수석연구원을 맡았다. 고석철·정혜란·손신애·이호원 연구원은 전국의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을 통해 김해교회의 역사와 한국 초기 기독교 역사를 담은 자료들을 수집, 연구하고 있다. 이 역사관은 내년 초쯤 좀 더 넓은 장소로 옮겨 자료를 체계적으로 전시, 보관할 계획을 갖고 있다.
 
김영기 집사는 "배성두 장로님은 1922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평생동안 하느님을 섬기고, 의료·구제·교육·애국을 실천하며 근대 김해의 초석을 놓은 분이다. 김해교회는 장로님의 뜻을 이어받아 건전한 기독문화로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비전을 만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고 있는 배기호 씨는 "김해교회 역사위원들이 신앙 선조들의 흔적을 찾는다니 고맙고, <김해뉴스>에서 배동석 열사에 이어 배성두 장로님을 소개해줘 감사하다"는 뜻을 전해왔다.


 

<알림> '발굴 - 김해인물열전' 시리즈는 이번 호로 마감합니다. 오는 29일 발간되는 제88호에서는 그동안 소개한 '김해의 인물'들을 총정리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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