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젊은 날의 우울과 쓸쓸한 에피소드로 차 있다. 다 읽고 나면 주인공처럼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하게 된다. 사랑은 수없이 능선을 넘고 벽을 타고 강을 건너 우리에게 온다. 그래서 설령 결혼이라는 매개로 묶어놓았다 해도 또 다른 고독과 쓸쓸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겉으론 아무 일 없이 살아가는 듯해도 그 뜨겁던 관계를 가졌던 부부들이 각 방을 쓰고, 공기처럼 무심히 지내기도 한다.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 밀고 당기며 밤낮으로 사투를 벌이는 것도 인간의 의식과 행동반경이 여러 사람과 겹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혼을 하고 상실감으로 막막해 있을 때, 한 사람을 만나고 마치 꿈을 꾼 듯 사랑이 사라진다는 비틀즈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처럼 사랑에서 깨어났다. 다시 혼자가 되어 울창한 숲속 한 그루 나무같이 고독 속에 매몰된 채, 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다. 비틀즈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에서'에서 하루키가 소설의 모티브를 얻은 것처럼, 실체는 눈처럼 녹아버리고 그 흔적만 남아있는 내 사랑도 시로써 환생하기를 바라며 비틀즈의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난 혼자임을 알았어요. 그 아름다운 새는 날아가 버리고, 난 썰렁한 방 안에서 홀로 벽난로에 불을 지폈지요. 그래도 좋지 않아요? 노르웨이의 숲에서."
나는 "그래도 좋지 않아요? 노르웨이의 숲에서"라는 마지막 소절을 붙잡고, 그동안 내팽개치다시피 방치한 시에서 사랑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리스, 시칠리아, 로마를 옮겨다닌 하루키. 제대로 된 테이블과 의자도 없었지만 하루키의 소설이 태어난 아테네의 싸구려 호텔방을 떠올리며, 나도 이 방 저 방이라도 장소를 옮겨 다니며 시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달랑 한 개뿐인 방에서 연작으로 시를 썼다. 칙칙한 이불을 햇볕에 내걸고 햇볕에 나를 널어 말리는 동안 혀끝으로부터 모래가 걷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혼자에도 익숙해져 갔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강물을 바라보는 침묵이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그저 앉아있기만 해도 평생 나눈 대화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다. 그런 느낌으로 나는 "19년이란 세월이 흘러버린 지금도 그 초원의 풍경을 분명히 떠올릴 수 있다"던 하루키에게서 국적과 인종을 뛰어넘는 사랑의 공통점을 본다. 배는 매여 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삶은 흐르지 않을 수 없고, 아무리 많은 상실을 해도 다시 되살아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더 큰 바다를 향해 흘러야 한다. 상실 속에서 재생을 꿈꾸지 않는다면 살아있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김우정 씨는
1956년 김해 출생. 시인. <문예연구>로 등단. 김해문인협회, 경남문인협회, 부산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중이다. 김해여성복지회관 감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