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심 김해수필협회회장
이정심 김해수필협회회장

동태 탕에 넣을 무를 나박나박 썰다가 한 입 베어 먹는다. '와그락' 상쾌한 소리가 입 안에서 울린다. 와그락 소리가 어금니에 생기면서 '무수태평'(無數太平)이란 말이 떠오른다. 시원한 무맛이 알싸한 추억을 불러낸 신호인 셈이다.
 
겨우내 텃밭 한 귀퉁이에 지푸라기 거적을 덮어쓰고 바람이 들지 않게 땅 속 깊이 묻어둔 무. 할머니는 무를 드실 때마다 '무수태평'이라는 말을 외치고 드셨다. 그 무를 하나씩 꺼내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서 화롯불을 쬐며 긁어 드셨다. 이가 없어서 숟가락으로 긁어서 오물오물 드셨다. 
 
어렸을 적 가을, 들판을 쏘다니다가 지친다 싶으면 오빠는 가까운 무밭의 무 이파리를 잡고 쑥 뽑아냈다. 그때는 간식거리가 필요한 시간이 오면 누구네 무인지는 상관없이 아무거나 뽑아 먹었다. 뽑혀 나온 무에 묻은 황토 흙을 풀잎에 쓱쓱 비벼서 훑어 낸 뒤 앞니로 깔짝깔짝 껍질을 갉아 냈다. 돌돌 돌려 이로 깎아서 무의 하얀 속살이 나오면 나에게 내밀었다. 오빠가 깎아준 무를 들고 할머니처럼 무수태평을 외치고 입으로 가져갔다. 약간 매운맛과 함께 달고 시원해서 갈증이 일순간에 달아났다.
 
생무를 먹다 보니 빛바랜 어느 해 가을이 생각난다. 그날도 오빠가 껍질을 갉아준 무를 받아 달게 먹고 있었는데 마을 쪽에서 빼딱구두에 핸드백을 든 진한 화장의 여자가 걸어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미소를 띠며 다가온다. 가까이 다가온 그 여자는 나에게 손을 내밀며 빨간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한 입만 먹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손에 든 무를 불쑥 내밀었다. 여자는 입을 크게 벌려 무를 깨물고는 나에게 남은 무를 건넨 뒤 읍내 쪽으로 걸어갔다. 그 여자가 먹은 무에는 시뻘건 립스틱이 칠해져 있었고 화장품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흡사 피 칠갑을 한 것 같아 몸을 부르르 떨고, 갖고 있기에도 꺼림칙한 그것을 길섶에 내동댕이쳤다. 
 
황순원의 소나기 소설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소년이 무를 손톱으로 돌돌 껍질을 벗겨 내고 먼저 먹어 보고는 윤 초시네 손녀에게 내민다. 소녀는 한 입 먹다가 맛없다고 퉤 하고 뱉어낸다. 그걸 보고는 소년이 말한다. 
 
"무 먹고 트림을 안 하면 산삼보다 좋데"
 
생무를 먹을 때마다 소년의 그 말이 생각난다. 무심코 베어 먹을 때마다 한낱 무에게 산삼의 효과를 바라며 올라오는 트림을 의식적으로 누른다. 올라오면 참는다. 또 참는다. 속이 거북해진다. 그러나 어느 순간 꺼억 소리와 함께 답답하던 속이 시원해진다. 산삼보다 좋다 하지만 트림도 개운하다. 훗날 있을지도 모를 산삼효능보다 지금 당장 속이 뻥 뚫리는 배출이 더 좋은 것 같다.
 
할머니가 무를 드시기 전에 외치던 무수태평은 어쩌면 무사태평과 발음이 비슷해서인게 아닌가 싶다. 무수태평이든 무사태평(無事太平)이든 그 긴 겨울을 평안하게 아랫목에 앉아 화롯불을 쬐며 숟가락으로 무를 박박 긁어 드시던 할머니 모습이 생각난다. 
 
지금 이 겨울은 어느 과일보다 맛있는 무의 계절이다. 가격 싸고 영양가 좋고 가슴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무를 먹을 땐 이왕이면 무수태평이라 외치며 먹어보자. 이어서 나오는 트림까지 해보면 이래저래 응어리진 마음 속이 한결 시원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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