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아련히 떠오르는 첫사랑의 추억처럼, 나의 대학시절은 타는 목마름의 시간들로 기억되곤 한다. 유신체제가 수명을 다해가던 그때, 정치사회적인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던 청춘들은 상대적으로 문화적인 욕구 분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통기타로 새롭고 자유로운 음악적 정서를 표출하였고, 독서를 통하여 숨막히는 시대의 불만을 해소하였다.
 
그 무렵 나는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읽으면서 파리의 볼로뉴 숲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주인공이 마시는 칼바도스라는 술을 통하여 이국의 문화를 동경하였고, 암울했던 그 시절 마음 둘 곳 없는 지식인의 고독과 분노를 함께 느꼈다. 카뮈의 <이방인>, 카프카의 <변신>, 게오르규의 <25시>라는 문학 작품을 탐독하기도 하고, 남몰래 김지하의 '오적'이라는 시를 읽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헤르만 헤세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바람과 구름과 호수의 작가라고 알려진 헤세가 내놓은 수많은 명작들 중에서 <지(知)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책이 온통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원제목은 <나르치스(Narzis)와 골트문트(Goldmund)>이다. 항상 스스로 절제하는 이성과 합리적인 사고를 상징하는 나르치스와 개인의 욕구 충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자유로운 영혼과 감성의 상징인 골트문트가 거쳐 가는 삶의 여정이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 스스로가 어떤 삶이 더 가치가 있으며, 어떻게 사는 것이 더 나은 삶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참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청년기에 내가 이 책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행운이고 행복이었다.
 
피가 끓던 청년시절인지라, 솔직히 처음에는 아름다운 여인을 향한 골트문트의 거침없는 사랑의 행각과 내일을 생각하기 보다는 지금 이 순간의 욕망에 충실하려는 모습이 더 멋지고 아름다워 보였다. '이유없는 반항'이라는 영화의 주인공 제임스 딘처럼 주변의 시선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은 젊은이들에게는 매력적인 캐릭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욕망을 잘 다스려가면서 지식을 갖추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늘 이성적으로 판단하면서 올바른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는 나르치스 또한 청년들에게는 이상적인 삶의 모델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 그 무렵 당대 지식인들의 삶의 철학을 담은 글들을 함께 묶어서 내놓은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가?>라는 책을 읽으면서 나의 생각이 조금씩 영글어가기 시작했다. 새는 양 날개가 있어야 멀리 힘차게 날아갈 수 있는 것처럼, 이성과 감성이 균형을 이룬 사람만이 세상을 똑바르게 살아갈 수 있음을 깨우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교육에서도 청년들에게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알게 함으로써 지성을 갖추게 하고, 시서화(詩書畵)를 가까이 하게 함으로써 감성을 지니도록 하지 않았던가?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처럼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차가운 이성과 따뜻한 감성의 조화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이유갑 씨는
김해녹색성장연구소 소장, 지효 아동청소년 심리발달연구소 소장, 인제대학교 유아교육학과 겸임교수(심리학박사)로 활동 중이다. 제 8대 경상남도의회 의원과 김해교육문화연구센터 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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