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민 기 문학박사·문학평론가
차 민 기 문학박사·문학평론가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그의 저서 '위험사회'(1986)에서 성찰과 반성이 없이 급속한 근대화를 이룬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로 규정한 바 있다. 울리히 벡은 이 책에서, 전염성이 강한 위험은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점점 더 심화될 것이고, 안전이라는 가치가 평등이라는 가치에 앞서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위험사회를 온몸으로 겪고 있다.
 
'위험'과 더불어 최근 우리가 체감하는 또 하나의 일상적 단어가 바로 '위기'이다. '기후 위기', '경제 위기', '출산 위기' 등 그야말로 '위기시대'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위기'라는 단어를 생활 속에서 처음 체감했던 것은 2000년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문학판은 온통 '문학의 위기'라는 단어로 도배될 정도였다. '문학의 위기, 이대로 좋은가?' 하는 물음들이 각종 문학제와 학술심포지엄의 주제들로 반복되었다. 어느 문학제 뒤풀이에서 만난 한 유명 작가는 "왜 내 작품을 모르는 거야? 책도 안 읽는 무식한 것들!"이라는 푸념 섞인 주정으로 문학의 위기에 항변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2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문학은 위기 속에 있다.
 
왜 이 '위기'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그것은 말로만 위기를 외치면서 그 해결을 위한 구체적 실천이 따르지 않는 까닭일 것이다. 20년 전, 그 유명 작가는 자신이 누려왔던 공명(功名)을 내세웠을 뿐 그 스스로 대중을 위한 자리에 나서는 일을 본 적이 없다. 그건 작가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한 탓이다. 이런 케케묵은 태도와 사고들이 문학의 위기를 자초한 셈이다. 유럽의 작가들은 신작이 나오거나 독자들의 요청이 있을 때면, 10~20명 남짓의 펍(pub)에 모여 기꺼이 자신의 작품을 낭독하고 그들과 어울려 자신의 작품 세계를 들려준다. 꼭 작품 얘기가 아니더라도 독자와 동등한 자리에서 소소한 일상의 얘기들로 그들의 삶의 한 때를 대중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작가들은 이름이 좀 있다 싶으면 스스로 대접받는 존재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정말 문학의 위기를 해결하려면 대중들에게 책임을 돌리기 전에 작가들 스스로 먼저 대중들을 찾아다녀야 한다.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자신의 책다발을 들고 나서야 할 일이다.
 
이 위기라는 단어가 최근 '지방'과 맞물리면서 우리의 생활 전반을 위협해 오고 있다. '지방의 위기', '지방 대학의 위기' 등은 당장 우리의 삶터에서 체감되는 현실이다. 조선 개국 이래, 서울 중심의 역사가 600여 년이 넘었다. 그 역사까지는 다 헤아리지 않더라도, 근래에 이르러 '지방의 위기'를 부르짖은 이후에 과연 지방관들과 행정 책임자들은 위기 극복을 위해 무엇을 얼마나 했는지 따져 묻고 싶다. 번듯한 아파트 몇 채 지어 올리고, 기업체들 몇 유치하는 정도의 행정력만으로는 더이상 지방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보다 더 미래지향적인 방법을 모색할 때다. 이를 위해선 도시에 대한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자신의 삶터 곳곳에서 도시를 즐겁게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거리'들을 만들어 가야 한다. 지역 곳곳의 특색을 고려해 살릴 것은 그대로 살리고, 허물 것은 허물어 도시의 낯빛을 다채롭게 가꾸어야 할 일이다. 이를 위해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로 TF를 꾸려 유·무형의 콘텐츠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도시를 만들어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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