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부터 '공간&'을 연재합니다. 김해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과 명사들의 '공간'을 찾아가는 코너입니다. 공간에는 그 사람의 삶과 철학이 배어 있습니다. <김해뉴스>는 그 공간의 의미를 찾아 여행을 떠납니다.

▲ "내 작품은 어디서 만나든 다 알아볼 수 있어. 내 새끼나 마찬가지니까." '양제서각전시장'에 빈틈없이 들어찬 작품들에 둘러싸여 있는 류제열 씨. 김병찬 기자

소음조차 멈춰버린 듯한 골목, 세월이 비껴간 것 같은 낡은 건물
3만여 점의 작품들이 숨쉬는 곳
그곳에서 장인은 50여년을 보냈다

"옛 김해관광호텔 근처 장유가도 입구에 금은방인 봉황당이 있어요. 거기서 안쪽으로 진입한 뒤 호텔 뒤편으로 난 오른쪽 길로 가지 말고 똑바로 가면 양제서각전시장이 있어요. 아마 보는 순간, 저기구나! 느낌이 올 겁니다."
 
길 안내를 해준 사람의 말이 딱 맞았다. 사람들과 차량이 붐비는 가락로에서 좁은 이면도로로 들어서면 소음이 얼마간 줄어드는데, 양제서각전시장을 만났을 때는 그 얼마간의 소음조차 멈춰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마치 세월이 비껴간 듯한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지번은 부원동 835이다.
 
회색 바탕에 한문으로 '暘濟木工藝(양제목공예)'를 흰색으로 쓴 간판과 '暘濟書刻(양제서각)'이라고 쓴 입구 유리문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아 오히려 더 눈에 잘 띄었다. 건물에도 표정이 있다면,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열중하는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는 건물이었다.
 
2층은 생활공간, 1층은 목공예와 서각작품들로 가득한 이곳이 양제 류제열의 세계이다. 그는 여기서 친구들과 지인들을 만난다. 작품을 팔지는 않는다. 그저 자신의 많은 작품들에 둘러싸여 차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며 세상을 바라본다.
 
23㎡(7평) 남짓한 1층을 거의 빈틈없이 채우고 있는 작품들은 류제열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3만 여 점 중 일부이다. 삼층장, 약장 같은 목가구 사이에 경대며 벼루함, 필통 같은 소품들이 들어차 있다. 나무 재질이 아닌 물건을 찾기가 힘든 공간이다. 이 많은 작품들은 두어 달 지나면 보관 중인 다른 작품들과 교체된다. 류제열은 그렇게 자신의 작품들과 끊임없이 다시 만나고 있다.
 
작품이 많아서 누가 집어가도 모르겠다고, 무엇부터 봐야 할지 모를 정도로 흥미롭다고 하자, 류제열은 "누가 집어 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만나면 내가 만든 것인지 아닌지는 금방 안다"고 덧붙였다.
 
류제열은 맨 처음 만든 작품이 무엇인지를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기억하지 않는다고 해야 옳겠다. 나무를 만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무엇인가를 만들었으니 처음이 언제인지 애매하고, 너무 많은 작품을 만들었기에 특정한 몇 작품만을 기억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류제열은 장유에서 갑부 류진곤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산진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공부를 잘해서 일본유학을 떠난 게 아니라, 공부를 너무 등한시 한 탓에 부모가 억지로 보낸 것이었다. 형제들은 모두 서울대를 졸업한 수재이지만, 류제열은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냥 나무 깎고, 다듬고, 두드리고, 부수고 하는 게 너무 재미있고 좋았어.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평생 이 길을 걸어온 게지."
 
일본의 외갓집에 머물며 나라현의 공작학교를 다니던 중, 류제열은 일본해군에 강제입대했다. 선박에 관한 모든 것을 만들던 일본해군공작학교에 배속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군대생활 1년이 사회생활 10년이라잖아. 강제로 끌려갔지만 목공예 기술을 제대로 배우고 나왔지. 해방 후에는 부산 동구 좌천동으로 갔어. 당시 부산에서 24번째 부자로 손꼽히던 아버지 체면도 아랑곳 없이 바로 목공소에 취직을 했어. 연장 쓰는 방법을 좀 더 익히고 싶어서였지."
 
류제열은 연장 사용을 익히고 난 다음에는 자신에게 맞는 연장을 직접 만들었다. 그래야 원하는 작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연장을 제대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그래서는 옳은 작품을 만들기 힘든데…. 요즘에는 기계를 많이 사용하는데, 기계를 사용하면 세밀하게 표현할 수는 있어. 그러나 나오는 작품마다 다 똑같애. 그건 재미없지. 자연적인 맛도, 멋도 없잖아."
 
류제열은 말끝에 손을 뻗어 명함을 넣어 보관하는 용도로 만든 함 두 개를 보여주었다. 디자인도 크기도 같은데, 자세히 보면 각기 개성이 있다. 그래서 그가 만든 모든 작품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품이다. "장식장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거 말고 실생활에 쓰이는 작품이 좋아. 그리고 아름다워야지. 그래야 예술이지."
 
류제열이 김해로 돌아와 부원동에서 작업을 시작한 지는 50년이 넘었다. 60년 나무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김해에서 보낸 셈이다. 서각으로 시작해 목공예에 이르기까지 평생 나무를 만져온 그는 나무를 구하기 위해 숱하게 산에 올랐다. "쓰러진 나무며 부러진 나무도 줍고, 나무 공부도 하고, 산에 많이 올라갔지. 산에서 길을 잃어버린 적도 더러 있어.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나무 보느라고."
 
류제열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무를 만져보았다. "나무를 만져보면 이 나무가 고생을 한 나무인지, 고이 쭉쭉 자란 나무인지 알 수가 있어. 나무도 고생을 해. 학교 한 쪽에서 개구쟁이 꼬마들의 돌팔매질을 당하거나, 동네 어귀에서 청년들의 화풀이 대상이 되면서 상처를 입은 나무는 만져보면 느껴지지. 나무하고 통하는 거지."
 
류제열은 식사할 때, 쇠 젓가락을 쓰지 않는다. 나무 젓가락만을 사용한다. "나무 젓가락을 잡으면, 나무의 둥치에서 잘라 만든 건지, 가지에서 잘라 만든 건지 알 수 있어."
 
류제열의 눈은 매섭고 정확하다. "어디든 들어서면 그 안에 어떤 물건들이 있는 지 전부 보여.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알 수 있지. 똑같이 만들어 내라면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그냥 보여."
 
상처 투성이 손을 보자 "훈장이야, 나무와 같이 살았던 영광의 훈장"

류제열의 손은 상처투성이다. 뚜렷하게 흉터가 남은 자국도 있다. "훈장이야. 나무하고 같이 살았다는 영광의 훈장."
 
▲ 류제열 씨는 아마추어 아코디언 연주자이다.
'손의 마술사'라는 말을 듣는 류제열, 그런데 그의 손은 또 하나의 재미난 취미를 가지고 있다. 아코디언과 기타 연주다. "18번? 홍도야 우지마라, 타향살이, 나그네 설움. 이런 노래 알아? 옛날 노래야. 젊은 사람들에겐 어떻게 들릴지 몰라도 이런 노래가 좋지. 아코디언은 어려워. 악보 보면서 열심히 연습도 하고, 흥이 나면 연주도 하고. 재미있잖아?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거 하면서 재미있게 살아야 해."
 
류제열은 '재미'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생각난 듯 장식장의 작은 서랍을 열고는 어린아이 새끼손가락 굵기만한 목각상을 보여주었다. 세밀하게 만들어진 십이지신상들인데, 몇 개 남지 않았다. "자신의 띠에 맞는 걸 누가 또 집어갔구먼"하면서 하나를 집어 들고 "요런 거 재미나게 만들다 보면 하루가 후딱 지나가지"라고 말한다. 다시 봐도 재미있다는 듯 빙그레 웃는다. 나무로 못 만들 게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양제 류제열. 어쩌면 그가 피노키오를 만든 제페트 할아버지처럼, 나무로 사람을 만들어 낸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닌 듯 하다.

양제 류제열─────────
주요 건물 현판 100여개 제작
한국 서각계의 대표작가

1927년 김해 장유 출신. 1950년대 이후 한국 서각계의 대표작가. 1993년 '자랑스런 신한국인'으로 선정돼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안중근 의사의 친필, 독립선언문(1천700자), 금강경(5천700자), 국회의사당의 반야심경 등 서각작품(20여 만자)들과 현충사, 수로왕릉, 범어사, 경남도공관 등 100여 개의 주요 현판들을 제작했다. 호 양제(暘濟)는 '볕이 건너간다'는 뜻이다. 빛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음각과 양각의 서각 작업을 일컫는 의미로, 작품세계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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