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약산 중턱에 있는 범어사 말사 '구천암'에서 내려다본 성포마을 '이작들'. 뜨거운 여름과 모진 태풍을 뚫고 가을로 익어가는 들판이 싱그럽다.
코발트블루의 가을 하늘과 순백의 면사무소가 이루는 콘트라스트가 눈부시다. 초록의 정원수들과 어울려 나래 펴는 학 모양 사무소 양쪽에 말끔한 보건지소와 복지회관이 있다. 일 보는 주민이 적어선지 너른 주차장의 시원한 공간이 방학 중의 학교 같은 분위기다. 맞은편에 일렬횡대로 늘어선 5기의 비석들은 고장의 전설을 얘기한다. 흔한 지방수령들의 송덕비이지만 맨 왼쪽에 있는 것은 조금 스케일이 다르다. 생림 출신의 이유인(李裕寅)이 고종 황제의 덕을 칭송하기 위해 마을 동쪽 끝에 선은대(宣恩臺)를 쌓고 세웠던 비석이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유인은 민비가 총애하던 진령군(眞靈君)이란 무당과의 묘한(?) 관계를 통해 과거도 거치지 않고 지금의 시장 격인 양주목사(정3품)로 발탁돼 벼락출세한 사람이다. 고종 31년(1894)에 함남병사로 임명되었고, 광무 2년(1898년) 12월에 법부대신이 되었다. 1900년 5월, 경무사(警務使) 자리에 있으면서 민비 시해에 가담했던 안경수와 권형진을 법적 절차 없이 교수형시켰다. 고종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으려는 독단이었다. 1907년 체포 당시 김해에 있다가 밀양의 촌집에서 급사했다고 한다. 한말 황실 세력의 인물답게 고향인 생림에 고종의 은혜를 기리는 흔적을 남겼던 것이다. 맨 오른쪽에는 그가 생림 10개 마을의 세금을 감면해 주었던 송덕비가 있다. 그의 출세와 충성 이야기는 임기응변에 뛰어나며 박력있고 의리에 굳은 김해인의 기질과 통하는 바가 있는 듯하다.
 
▲ 마현산성. 테뫼식 산성으로 서문 안쪽에는 집수지가 있어 낙동강 방면 길목 통제의 목적으로 쌓았던 것으로도 추측된다. 도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돼 있다.
면사무소 맞은편에 이제 막 개원한 듯한 생림공원이 있다. 바닥분수가 있고, 어린이놀이터와 농구장이 있는데, 과연 놀아줄 아이들은 얼마나 있을지가 걱정이다. 조금 위의 생림초등학교 역시 1923년 12월 개교 이래 4천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지만, 지금은 63명(남 37)의 학생과 14명의 유치원생이 재학하는 작은 농촌학교다. 제40대 정상률 교장 이하 20명의 교직원들이 1대 1 맞춤형교육과 지역사회 연계의 다양한 체험활동으로 '찾아오는 학교'를 만들어 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도내에서 교육과정과 특색과제 추진 우수학교로 선정되기도 했다. 생림교(1965.1) 건너에 산성마을회관이 있다. 생림대로 개설로 동서로 마을이 나뉘게 되었지만, 동쪽 뒷산에 있는 마현산성(馬峴山城)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도기념물 제150호의 마현산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도호부 조에 '과녀산성(寡女山城)으로도 부르며 둘레 1천300척의 우물 하나가 있다'고 적혀 있다. 2010년과 2011년의 발굴조사를 거쳐 상태가 좋은 서쪽 성벽과 북문·서문을 복원하고 있다. 수로왕 축조의 전승도 있지만 정상부를 머리띠 두르듯 축조한 소규모의 테뫼식 산성으로 서문 안쪽에는 집수지가 있다. 낙동강 방면 길목 통제의 목적으로 쌓았던 성으로 고대산성의 가능성도 있다. 하필이면 '과부산성'이란 별명이 붙었을까? 과부가 많이 생긴 격렬한 전쟁이라도 있었던 걸까?
 
산성마을회관에서 생림대로 밑을 지나 오르는 길 끝에 김해찻사발 재현에 공을 들이고 있는 안홍관의 지암요(志岩窯)가 있다. 시에서도 장려하고 전통문화예술진흥협회의 '대한민국 차사발 명장'에도 선정되었지만, 생림초등학교 아이들의 체험활동에도 손을 빌려 주시는 모양이다. 다시 봉림로로 돌아오다 보면 생림119안전센터 조금 위에 설도예공방이 있다. 최기영 신라대 겸임교수와 염경희 부산디자인고 교사 부부의 도자공방이다. 최 작가는 주로 파란 수국이나 민들레, 그리고 초록의 이파리가 깨끗하게 그려진 담백한 생활자기를 잘 만들고, 염 작가는 심플한 선에 얼굴도 몸도 동글동글한 토제인형을 자주 굽는다. 부부작가의 깨끗한 품성과 온화함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다.
 
지난 1997년 8월에 입주한 4개의 자동차부품업체의 봉림농공단지를 지나, 봉림로가 생림대로와 합쳐지는 삼거리 오른쪽에 부산기독공원묘원과 마현산성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1990년대 초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부산기독공원묘원과 이후의 공장들이 산성의 문화적 경관을 심하게 훼손하고 있는데, 산성 바로 아래를 두꺼운 띠처럼 두르고 있는 공원묘원은 그 정도가 심하다. 산성과 영혼들 양자 모두가 불편한 관계를 만들어낸 건 1996년 3월의 때늦은 문화재지정이었다. 산성 아래 생림대로 건너편에는 40여 가구의 마현마을이 있다. 서쪽의 마현고개는 한림면의 금곡리로 넘어가고, 북쪽의 마현(말티고개)을 넘어 생철리로 가는 고개마을이다. 좀 전에 지나 온 산성마을과 함께 마현산성의 이름을 반씩 나눠 가진 모양이 되었다.
 
▲ 생림들판을 가로질러 시원하게 내달리는 생림대로.
말티고개를 넘으면 생철리다. 날 생(生), 쇠 철(鐵), 마을 리(里)니 '철이 나는 마을'이다. 1970년대까지 '쇠부리' 일을 했다는 증언이 있고, 무척산 천지에서 생철1교(2008.1) 아래로 흐르는 냇가에서는 지금도 철광석과 쇠똥(슬래그)이 채집된단다. 동네 어른들이 생철리를 '쇠뿌리'라 부르는 것도 제철을 뜻하는 우리말의 '쇠부리'가 세게 발음된 모양이다. 뒷산의 무척산을 먹을 식(食)의 '식산'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밥상을 받은 땅의 형세'로 설명하는 전승도 있지만, 귀한 먹을거리가 되는 철광석이 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철의 왕국, 가야'를 뒷받침해 주는 강력한 지명전승이 되고 있다.
 
말티고개를 내려가기 시작하면 무척산을 가리키는 커다란 도로 표지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모은암을 찾고 천지를 거쳐 무척산 정상에 오르는 길이다. 길 입구의 공장들을 뚫고 나가면 넓은 무척산주차장이 나타나지만, 등산이 아니라는 핑계로 차에서 내리길 거부한다. 석굴암의 절 표지판을 지나 급경사의 임도를 끝까지 오르면 바로 모은암의 턱 밑이 된다. 등산철에 여기까지 차로 오르는 건 쉽지 않을 텐데 아직은 괜찮은 모양이다. 지난해까지의 공사로 말끔해진 돌계단과 박석이 깔린 길을 편안하게 오른다. 제 몸이 힘들어 느끼는 감동은 없지만, 마지막 계단쯤에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보면 한 것도 없는데 세상은 어느새 발밑이다. 멀리 낙동강과 들판을 내려다 보는 느낌이 청량감 그 자체다. 좌우의 단풍을 의식하며 내려다 보는 황금들판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푸른 하늘과 아스라한 강물 사이를 물들이는 초록의 향연에도 가슴이 설레긴 마찬가지다. 이쯤 되면 굳이 모은암의 유래를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는다. 그래서 없을 무(無)에 짝 척(隻)의 '견줄 수가 없는 산'이라 하는 모양이다. 절에서는 붙을 착(着)을 써서 '애착을 버리는 산'의 무착산을 즐겨 쓰긴 하지만.
 
▲ 부산기독공원묘원과 마현산성 북측.
어미 모(母)에 은혜 은(恩)이다. 가락국 2대 거등왕이 어머니 허왕후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절이란다. 오르던 길 중간의 무착산모은암중창기적비(1984.4. 금정산 光德 지음)에도 그렇게 적혀 있지만, 우리는 불행히도 건국기 가야불교에 대한 물증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고려 공민왕 13년(1364)의 명문이 새겨진 작은 종 하나가 출토되었다는 기록이 남았을 뿐이다. 452년께 제8대 질지왕 대의 가락불교를 인정할만한 자료는 있지만, 400년이나 빠른 1세기께의 불교전파를 증명할 객관적인 증거는 아직 없다. 극락전(대웅전)에는 도문화재자료 제475호로 지정된 조선시대의 석조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고, 뒤쪽 암벽 틈새로 올라가 머리를 디밀어 보면 산신령 한 분이 작지만 눈에 가득 들어온다. 바위 위의 비좁은 공간이라 보통 높이의 1/3에 불과한 낮은 산신각이지만, 오르는 이의 시선이 건물바닥이기 때문에 낮다는 느낌이 전혀 없는 재미난 건축물이다. 모은암 뒤쪽의 동굴에는 아이를 안은 흰색의 관음상이 앉아 있다. 약수가 나는 모은암의 관음보살에는 생명수가 든 정병 대신에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의 모습이 더 어울렸던 모양이다.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는 것 같은 거대 바위들의 천정이 신기하다. 관음상 아래에는 길쭉한 바위 둘이 세워져 있는데, 우리 민속의 남근석이라고도 하고 인도의 링가라고도 한다. 극락전 지붕 위로도 또 하나의 남근석(또는 부부암)이 보이는데 등산객들은 여기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생산에 효험이 있는 '어머니의 절'이라고나 할까. 30분 정도면 가야시대에 시내에서 왕릉을 만들다 물이 계속 솟아 파서 멈추게 했다는 천지(天池)에 오르고, 조금 더 고생하면 정상의 신선봉에도 오르게 되지만, 산을 찾는 다른 기획에 양보하고 나는 발걸음도 가볍게 산을 내려간다. 무척산 정상부에 '하늘공원'을 조성한다는 얘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 생철·성포·창암·도요 등 무척산 아래 4개 마을에서 나는 생산물을 이용한 체험관광과 판매촉진사업을 펼치고 있는 무척사랑센터./ 무척산 자락에 자리잡은 낙동강학생수련원.
생림우체국 앞에서 생림1교(1991.8)를 건너는데, 왜 여기 우체국은 면사무소나 파출소와 같이 있지 않은지가 궁금해졌다. 그래 물었더니 일찍부터 생림의 균형발전을 위해 분산시켰다는 아주 선구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일찍부터 면소재지의 봉림에 뒤지지 않는 생철마을이었기에 우체국은 물론, 2009년 12월 개관한 생림체육관과 생철권역개발사업의 중심인 무척사랑센터도 여기 세워진 모양이다. 이름이 '무척'이나 재미있는 무척사랑센터는 무척산 아래의 생철, 성포, 창암, 도요 4개 마을에서 나는 우렁이농법쌀, 가지, 딸기, 한우, 감자, 고구마 등을 이용한 체험관광사업과 판매촉진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1949년 9월에 사학으로 개교했던 생림중학교는 앞마당 정원이 인상적인 학교인데, 특히 앞마당 전체를 짙은 그늘로 덮고 있는 350살짜리 팽나무는 참 감동적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푸르고 빽빽한 이파리에 초대형 양송이처럼 원만하고 풍성하게 균형잡힌 예쁜 몸매는 '학교의 무궁한 발전을 상징하고 용기와 희망과 안정을 준다'는 학교 측 안내판 문구를 저절로 긍정하게 한다. 1993년에 조건없이 교육부에 헌납해 공립학교가 된 이래 3개 학급 70명(남 32)의 학생들이 제 20대 손영순 교장 이하 15명 교직원들의 가르침으로 거목의 꿈을 키우고 있다.
 
동쪽 담장 너머에도 또 한 그루의 노거수가 있다. 태풍에 한쪽 둥치가 부러져 나가는 바람에 정자나무의 자격도 잃었고, 마을 스피커 여러 대를 이고 있는 품이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보호수로 지정된 300살의 회화나무다. 오랫동안 담장 안의 팽나무와 오랜 친구가 되어 왔다.
 
생철마을에서 안양로를 따라 가면 오른쪽 무척산 자락에 낙동강학생수련원이 있다. 경상남도의 지원으로 2009년 3월에 개원한 수련원에선 정준영 원장 이하 28명의 교직원들이 고등학생들의 체험캠프를 지도하고 있다. 올해만도 48개 고교, 7천847명의 1학년생들이 2박 3일 일정의 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공동생활·장애체험·통일교육을 통해 공동체의식을 함양하고, 명상·미래설계를 통해 나를 발견하며, 전통예절과 사물놀이를 배우고, 달리기·양궁·심폐소생술 등의 건강과 안전교육이 진행된다. 낙동강까지 드넓게 펼쳐진 '도빙기들'을 가로질러 성포마을로 간다. '도빙'이란 일제강점기에 낙동강 제방을 쌓아 논을 만들었던 일본인 와타나베의 한자 음 '도변'을 김해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성포마을에선 '이작들'이라 하고, 건너편 안양마을에선 '모덩개벌'이라 불렀고, '생철들판'이라고도 부른다.
 
성포(省浦)는 이름대로 낙동강의 배가 드나들던 포구마을이었다. '이작들'이 되기 전에는 신포리라고도 했다. 우리말 이름 '섶개'를 섶나무 신(薪), 갯가 포(浦)로 표기했다. 이후 농사도 짓고 소를 키우면서 백화점지정목장의 간판처럼 양질의 한우특화마을을 추진하고 있다. 북쪽 끝의 이작초등학교는 지난 1936년 4월에 안양간이학교로 시작해 1948년 4월에 개교했다. 학생 64명(남 28, 유치원 10)이 이기충 교장 이하 20명의 교직원들과 공부하고 있다. 교명이 특이해 마을서 소를 키우는 조갑제 씨에게 물었더니, 마현을 기준으로 남쪽을 '일작(一作)', 북쪽을 '이작(二作)'으로 나누던 전통에 따른 것이란다. <김해지리지>는 조선후기의 농지생산력에 의한 구분을 말하나, 같은 때 '도맥이작(稻麥二作)'이란 말도 보인다. 쌀과 보리가 다 되는 마을이다. 서쪽 작약산 중턱에는 범어사 말사의 구천암(龜泉庵·1931년·주지스님 각명(覺明))이 오붓하고, 그 위엔 겨울에 더운 바람이 나오는 것으로 유명한 풍혈(風穴)이 있다. 마을의 품안이 꽤 깊은데도 아직까지 공장 하나 없는 청정마을이다. 지난번에 약속했던 낙동강 변 산책은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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