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 잠깐의 유년기를 보낸 백부님 댁은 작은 자전거포로 생활하고 있어서 늘 매캐한 기름 냄새가 났다. 그 기름 냄새는 사실 우리 가족이 부산으로 살림을 나고 내가 성장하기까지 오랫동안 주위를 맴돌았다. 어떤 향수보다 기름 냄새가 더 달콤하고 향기롭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런 생각은 아마 그 기름 냄새가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지 싶다.
 
그만큼 내 몸 속에는 도시의 피가 흐르고 있다. 아는 분의 소개로 아버지는 화물차의 조수로 일자리를 얻게 되었고 어머니와 나는 그런 아버지를 따라 비교적 쉽게 도시에 정착했다.
 
그 무렵 도시는 시골 사람이 한결같이 꿈꾸는 새로운 터전이었다. 동란을 치르고 모든 게 쑥대밭이 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시점이 아니어서 도시에 근거지를 마련하는 게 쉽지 않았다. 소녀들은 식모살이라도, 소년들은 공장 직공으로라도 도시에 나가는 게 꿈이었다. 도시로 나온 한 사람이 시골에 남은 대가족의 든든한 생활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무작정 도시로 나온 사람들이 도시 이곳저곳에 터를 잡았는데 주로 방값이 싼 산동네에 첫 둥지를 트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꼬방'이라고 부르던 판자집이었지만 도시로 진출했다는 한가지만으로도 의욕은 충만했다. 젖먹이 시절 나도 그렇게 부모님을 따라 도시로 진출한 것이었는데 그 당시를 회고하는 어머니 말씀을 따라 나는 가끔 그 시절을 아련히 회상해 보곤 한다.
 
그 중 하나가 백열등 하나를 주인집과 같이 썼다는 내용이다. 아마 방 하나를 합판으로 갈라 반쪽씩 나누어 쓴 구조였을 것인데 그렇게 방을 반으로 나눈 것에서 그치지 않고 칸막이 중간에 구멍을 내 백열등 하나를 같이 썼다고 했다.
 
지금 기준으로는 감히 상상도 못할 근검절약이다. 합판으로 방을 나누었으면 그 자체로도 방음이 제대로 될 리 없는데 거기다 구멍까지 뚫려 있으니 서로의 작은 인기척도 금방 감지될 게 뻔하다. 고급 축사보다 못한 공간이라고 지금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겠으나 시누이와 조카를 포함해 여남은 명이 한 방에서 살았던 시골생활에 비하면 그곳은 우리에게 고대광실이었다. 그리고 주종의 거래 관계가 아닌 세입자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인 집주인의 살가운 배려라는 생각마저 든다.
 
집주인은 방을 놓아 얻는 금전적 이득보다 도시에 살면서 홀연해진 공동체에 대한 향수 때문에 세를 들인 것이고, 우리 가족은 낯선 타관객지에서 그래도 의지하고 살만한 이웃을 확보한 일이었다. 그 바람에 내가 울기라도 하면 어머니는 저녁 내내 나를 업고 산동네 이곳저곳을 쏘다녀야했다지만 큰방 어른들은 어느 날 우리 가족을 위해 자신들이 쓰던 밥상 하나를 선물했다고 했다. 방바닥에 밥과 찬을 놓고 식사하는 걸 보다 못해 그랬다는 것인데 우리 집의 가구 1호는 그렇게 이웃이 쓰던 헌 밥상이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 도시는 꿈을 키우고 그 꿈을 이룬 곳이었다. 누구에게나 도시는 부푼 희망의 처소였다. 그 뒤 여러 동네를 이사 다니며 성장했는데 줄잡아 70년대까지는 그와 비슷한 이웃간의 넘나듬이 있었다. 먹을 걸 나누는 건 물론이고 이런 저런 부업거리를 함께 하며 바지런한 정담이 끊이지 않았다.
 
이제 그런 이웃의 모습을 찾기가 힘들어졌다. 성폭행, 유괴, 살인과 같은 끔찍한 사건들이 줄을 잇고 있고 그 범인은 아침저녁으로 마주치는 이웃이다. 사람살이의 모습이 너무 빠른 속도로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자괴감을 떨칠 수 없다. 분명 우리는 예전보다 궁핍하지 않지만 예전보다 잘 살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궁핍했던 시절은 이웃의 끈끈한 정이 허기를 채워주었지만 궁핍하지 않은 지금은 광기와 폭력이 말할 수 없는 정신적 허기를 느끼게 한다.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