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랜 세월 이 공간에 배어든 묵향이 물씬 풍겨져 나온다. 서실 한 가운데에 놓인 서예체본과, 글씨를 연습한 화선지, 벼루 등이 자리한 큰 책상은 옛 양반가의 글방을 떠올리게 한다.
벽암 허한주가 머무는 서상동 탑마트 3층 '벽암서실' 공간의 풍경이다.
 

▲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을 생각입니다." 벽암 허한주가 서예 체본을 들여다보고 있다.  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

"내 마음에 드는 글을
아직까지 써본 적이 없어
그래서 멈출 수 없는 길이지

스승인 와암 이한우 선생은
몇 백자 글자 속에서도
잘못된 부분 정확히 짚어주셨어
마지막까지 붓 들고 글을 쓸거야

일제억압이 울분으로 남아
안중근의사만장시 가장 좋아해"


허한주는 1931년 김해 외동에서 태어났다. 집 마당에서는 임호산 흥부암 뒤편의 커다랗고 단단한 바위가 올려다 보였다. 지금처럼 나무가 무성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이끼 낀 바위가 푸르게 보였다. 훗날 한 지인이 "너는 임호산 푸른 바위처럼 굳센 기질을 가졌다"며 호를 '벽암'이라 지어주었다.
 
허한주는 다섯 살때 조부 허규에게 천자문을 배웠다. "한 일주일 쯤 구양순체 목판인쇄본 천자문으로 글자를 익혔을까. 할아버님이 직접 가르치기 힘이 드셨던 모양이야. 못 익히면 때리기도 해야 하는데 차마 그러질 못하고…. 자식 가르치기가 더 힘들다는 말도 있지. 할아버님 등에 업혀서 서당엘 갔어."
 

▲ 허한주가 작고한 운정 류필현의 묵화를 보여주고 있다.
어린 손주 허한주는 천자문을 손에 꼭 쥐었고, 조부 허규는 손주를 업은 채 1㎞를 걸어 외동서당을 찾아갔다. 류씨 성을 가진 훈장은 조부의 후배였다. 조부는 "우리 손주 천자문 좀 떼게 해주게"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섯 살 손주에게 "걸어서 혼자 집에 올 수 있겠나?"라고 물었다. 허한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서당에서 허한주는 본격적으로 천자문을 익히기 시작했다. 3년 뒤, 신식학교인 합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외동서당에서 정확히 5백자를 익혔다. "합성학교를 다니느라 천자문의 뒷부분은 서당에서 배우질 못했고, 나중에 따로 익혔어. 다섯 살때 천자문을 익히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해. 단 한 자라도 틀리면 훈장님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곤 했지." 허한주와 서예가로서의 인연은 이렇게 조부가 맺어주었다.
 
김해에서 팔십 성상을 살아온 허한주는 김해의 원로이다. 허한주는 1960년에 총무처가 시행한 공무원시험에 합격했다. "김해군 김해읍 산업계로 초임 발령을 받았어. 읍사무소에 첫 출근을 하던 날 어찌나 기쁘던지. 1968년에 읍사무소 총무계에서 인사 겸 기획 업무를 맡았는데, 김해시 승격조서를 내가 썼어. 김해의 발전 사항을 말해주는 각종 지표의 지난 10년과 다가올 10년의 통계자료와 전망을 내놓는 작업이었는데, 쉽진 않았어. 당시 박해수란 분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작한 비닐하우스와 조규인 씨를 중심으로 한 양계사업이 김해의 소득을 높일 거라고 전망했던 기억이 나."
 
김해의 시 승격조서에 이어 또 하나의 주요 문건이 허한주에 의해 작성됐다. 비닐하우스로 우리나라 농업의 발전을 이끈 공로로 박해수 씨가 1967년 '5·16민족상(산업부분 본상)'을 수상했을 때, 그 공적 조서를 허한주가 작성했다.
 
김해사람으로서 또 공직자로서 김해의 발전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허한주는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생각했던 것의 1백 배 이상으로 김해가 발전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김해가 발전한 만큼이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동네마다 우물가를 갖고 있던 아름다운 김해가 너무 많이 훼손되어 버렸어. 외형적으로는 발전했지만, 정서가 메말라 버렸다고나 할까."
 
공직생활 중에도 허한주는 붓을 놓은 적이 없다. 혼자만의 시간으로 돌아가면 늘 붓을 잡았다. 볼펜조차 없었던 시절, 공무원들은 펜촉에 잉크를 찍어 서류를 작성했는데, 글씨를 잘 썼던 허한주는 각 부서의 결재서류 표지판을 도맡아 썼다. 연말에 서류를 모아 철을 한 뒤, 표지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읍사무소 서류보관소에 보관된 각종 서류들 중 약 6년간의 서류 표지가 모두 허한주의 글씨로 돼 있다.
 
서예를 생활의 일부로 삼았던 허한주는 1983년 신문에서 'KBS 전국휘호대회' 광고를 보고 작품을 응모했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다음해에 또 응모했으나 역시 낙선했다. "자신이 있었는데, 그때 깨달았던 거야.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하고 말이야."
 
허한주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1985년부터 천자문을 구양순체로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다. 1989년 '전국창작미술대전' 입선은 그래서 더 기쁜 소식이었다. 같은 해 12월 20일 정년퇴임을 했을 때, 퇴임식에서 비디오 촬영을 맡은 이가 "오늘로 공직생활이 끝난다. 이 시간 이후로 무엇을 할 거냐"고 물었다. 그때 허한주는 "서예를 더 배우고, 계속 글을 쓰겠다"고 답했다.
 
이후 허한주는 본격적으로 서예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부산에서 소정 서정환의 가르침을 받고, 1990년에는 와암 이한우를 만났다. 와암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년간을 스승으로 모시며 '와암서실'에서 글을 썼다.
 
요즘은 먹을 갈아주는 기계가 있지만, 예전에는 직접 손으로 먹을 갈아야 했다. "글씨를 많이 썼으니 먹도 많이 갈아둬야 했어. 힘든 일이었지. 먹을 갈 때는, 오늘은 선생님한테 지적을 받지 않도록 잘 써야지 하는 생각뿐이었어. 그래도 글을 다 쓰고 나면 선생님한테서 한 두 자씩은 늘 지적을 받곤 했지. 누락된 글자, 틀린 글자, 획이 바르지 않은 글자…. 선생님은 한 눈에 내가 잘못 쓴 글자를 찾아내셨지."
 
몇 백 자의 글자 속에서 틀린 부분을 정확히 짚어주던 와암이 세상을 떠난 후, 허한주는 '와암서실'을 물려받았다. 같은 자리에서 1994년 4월 '벽암서실'을 열었고,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줄곧 정진을 하던 허한주는 1997년 일본에서 큰 상을 받았다. 11월 '일본 대분현(오이타현) 예술제 운용전(한·중·일의 서예가들이 경연을 벌이는 서예전)'에 '왕희지 난정서'를 응모, 최고상인 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허한주는 '왕희지 난정서'를 150번이나 썼다. 왕희지는 중국 동진의 서예가로, 해서·행서·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서예의 지위를 확립한 인물이다. 중국에서 고금의 첫째 가는 서성(書聖. 서예의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중국 동진 저장성 난정에서 명사 41명이 모여 쓴 시를 모은 시집의 서를 왕희지가 썼는데, 이를 '왕희지 난정서'라 한다. 전28행 324자로 이루어져 있다. 난정서는 70㎝ 폭에 2m길이의 국전지에 쓰여졌다. 출품한 작품은 일본에 있고, '벽암서실'에는 허한주가 다시 쓴 난정서가 걸려 있다.
 
▲ 묵향 그윽한 벽암서실 내부.
한주가 가장 좋아하는 글은 '안중근의사만장시'이다.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로 히로부미를 저격한 기개에 감복한 중국 총통 원세개가 지은 시이다. "평생에 원했던 일 이제는 마쳤네. 죽음을 각오하고 한 일인데 살기 바라면 장부가 아니지. 몸은 비록 삼한에 있지만 죽어서 그 이름 만국에 떨쳤네." 허한주가 한글로 풀어 들려주는 원세개의 시는, 당시 중국인들이 안중근 의사를 얼마나 존경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이 시도 서실에 걸려 있다.
 
'안중근의사만장시'를 설명하면서 허한주는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우리 집은 머슴 둘을 데리고 농사를 지었어. 농번기에는 머슴 한 둘을 더 데려왔지. 할아버님부터 온 가족이 농사를 지었는데, 가을에 추수를 하면 일본 경찰이 집에 와서 쌀가마를 모두 실어내 갔어. 1년 내내 일을 하고서도 쌀밥 한 톨 먹을 수 없었지. 그걸 몇 년을 지켜보았는데, 어린 마음에도 어찌나 분하던지. 그래서 안중근 의사를 생각하면 늘 가슴이 뜨거워지곤 해."
 
허한주는 1997년부터 한시를 짓는 일에도 몰두하고 있다. 한시를 짓는 모임 '금관이우회' 활동을 하면서 지금까지 200여 수의 시를 지었다. 한시를 짓는 서예가 허한주는, 흐르는 세월 속에서 옷차림은 달라졌으나, 속마음은 전통을 지켜가는 선비의 모습 그대로이다.
 
"아직 내 마음에 드는 글을 써 본 적이 없어.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들고 글을 써야지. 멈출 수 없는 길이야." 같은 글을 수십 장, 수백 장씩 쓰면서 서예가의 길을 걸어가는 허한주는 온 몸으로 '느림의 철학'을 완성해 가는 중이다.

>> 벽암 허한주는
1931년 김해 외동 출생. 1989~1996 전국창작미술대전 입선 9회, 1993~1994 한국서화작가협회 특선 2회, 1994~1996 국제미술창작회 특선 2회, 1997 일본 대분현 운용전 예술제 대상 등. 2005 설송문화상·2006 추사상 수상, 2007 율곡상 수상 등. 금관이우회 회장 역임. 현 김해원로작가회 회장 및 김해미술협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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