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대 전의 김해를 기억하면서 김해를 다시 찾은 사람들이라면 틀림없이 눈을 커다랗게 뜰 것이다. 논과 밭이 있던 고즈넉한 자리에 대부분 판상형 고층아파트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해의 예전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옛 사진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진 외에 한 가지가 더 있다. 서양화가 박영호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다.

▲ 박영호의 '행운'. '처녀가 닭을 안고 있는 건 행운'이란 의미를 지닌 그림이다.
박영호는 장유 무계리에서 태어나 지금도 장유에서 살고 있는 김해 토박이다. '장유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음악과 미술 그리고 연극에 이르기까지, 어린 박영호의 취미는 감성적이었다. 특별활동도 미술반에서 했고, 학급 게시판에는 늘 박영호의 그림이 붙어 있었다.
 
산 아래 혹은 아파트 사이 작은집
병아리와 닭 놀던 시골집 마당 등
사라져가는 농촌과 기억 속 풍경
어린 시절부터 봐온 그 모든 것들
아타까움의 붓 터치로 되살려내

그의 마음 속에는 농촌으로서의 장유와 그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90년, 전시회 팸플릿에 남긴 글 '나의 작업'을 보면 박영호의 고향 사랑을 가감없이 느낄 수 있다. "나는 농촌을 사랑한다. 그런데 그 농촌이 자꾸만 줄어든다. 나는 이것이 무척 아쉽다(물론 사람이 살기에 편리하도록 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요즘 나의 그림 속에는 잠식되어가는 농촌의 풍경이 등장한다. (중략) 자꾸만 줄어져가는 내 소년 시절의 공간이 안타까워 오늘도 어설픈 솜씨로 농촌과 도시, 그리고 도시의 작은 집들을 그리고 있다."
 
박영호는 점점 사라져가는 농촌, 옛 기억 속의 풍경, 산 아래 혹은 아파트 사이 작은 집 등을 주로 그렸다. 그의 전시회를 다룬 신문기사들을 들춰보면, '김해를 기록하는 화가' '김해를 담아낸 그림' 등의 제목이 붙어있다.
 
작업실 이름 뜻은 '계곡의 여신' 수필가 박경용 씨가 이름 붙여줘
미술교사 생활 50살 때 그만두고 오직 그림 그리는 데에만 집중
자연과 인간 공존의 미학 평가


박영호의 작업실은 장유면 응달리 태정산 기슭에 있다. 산기슭으로 올라가는 길은 좁고 꼬불꼬불하다. 올라갈 때는 잘 느끼지 못하는데, 작업실에 들어서면, 시야가 툭 트이면서 나뭇가지 사이로 응달리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 들녘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수필가 박경용 씨는 박영호의 산 속 작업실에다 '벨로니아(velonia)'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계곡의 여신'이란 뜻의 라틴어이다. 박영호는 20여 년 전 이 작업실을 지은 뒤, 무계리의 집에서 매일 아침 출근을 하고 있다.
 
작업실 안은 갤러리 수장고 같다. 그가 그렸거나 현재 그리고 있는 그림들이 가득하다. 김해문화의전당에서는 연말에 '김해인물전'을 개최할 예정인데, 박영호는 진영 출신의 소설가 김원일의 초상화를 맡았다. 현재 이 작업을 하고 있다.
 
박영호는 김해여고와 마산고에서 미술교사를 지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50살에 퇴직할 때까지, 그는 두 학교의 교지 표지화를 그렸다. 김해여고와 마산고를 졸업한 사람들은 박영호의 표지화가 들어 있는 교지를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김해여고 국어교사였던 소설가 고 김성홍은 미술교사 박영호와 가깝게 지냈다. 김성홍은 박영호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폴 고갱을 방불케 하는 명암 짙은 얼굴이면서도 어쩐지 앳돼 보인다. 특히 눈이 그렇고 시부저기 웃는 모습이 그렇다. 앳된 건 외양만이 아니고 마음까지 그렇다. 그가 매우 순진한 사람이라는 것 또한 중평이다."
 
▲ 서양화가 박영호는 요즘 연말 김해문화전당에서 개최하는 '김해인물전'에 선보일 소설가 김원일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
박영호는 소나무를 좋아하고 그 중에서도 해송을 특히 좋아해 '웅송(雄松. 곰솔)'이라는 호를 가지고 있다. 김성홍은 박영호의 호를 두고 "아호는 웅송이라 하는데, 범상한 듯 하면서도 인간 박영호를 절묘하게 집약한 것이라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만고상천 불굴의 소나무에 기대앉는 고집 세고 듬직한, 그리고 값비싼 쓸개를 지닌 곰"이라 적기도 했다. 산 중의 외딴 작업실에서 혼자 묵묵히 그림을 그리는 박영호에게 웅송이라는 호는, 아닌 게 아니라 절묘하게 들어맞는다는 느낌이다.
 
20여 년 전 이 산에 처음 작업실을 마련했을 때는 산돼지가 왔다 간 흔적이 더러 보였단다. 야생 산돼지는 맹수이니 무섭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적응이 됐다. 최근에는 산 아래에 철로가 깔렸기 때문인지 산돼지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고라니며 꿩은 지금도 가끔씩 보인다.

"아무래도 주변 환경이 작가에게 미치는 영향이 많지. 자연에 둘러싸여 지내는 동안 그린 작품에는 초록색이 많아." 박영호는 작품 몇 점을 가리켰다. '숲'이라는 제목을 가진 그림은 온통 초록색의 작은 네모들로 가득하다. 산과 나무의 모습을 극도로 단순화해 표현한 작품이다.
 
박영호는 얼마 전부터는 닭을 그림의 소재로 등장시켰다. "어린 시절 집 마당에는 늘 닭이 있었어. 엄마 닭 뒤로 병아리들이 종종 따라가는, 시골집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 기억이 내게 병아리와 닭을 그리게 한 거지." 그러니까, 박영호의 그림에는 어린 시절부터 그가 내처 보아온 김해의 자연과 김해사람들의 삶이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일? 사실 참 슬픈 일이야. 좋은 그림을 못 그리니까 너무 슬프지. 10여 년 전만 해도 내 그림은 엉터리였다고 나는 생각해.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계속 그리는 것,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의미이지. 그렇다고 너무 욕심을 부리면 안돼. 욕심을 부린다고 좋은 그림이 나오는 건 아니니까."
 
박영호는, 비록 40여 년 동안 그림을 그려오고 있지만,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한 건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세간의 주목을 받고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는다 하더라도, 예술가들은 스스로의 잣대로 자신의 작품을 평가하기 때문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 태정산 기슭에 자리잡은 박영호의 작업실 '벨로니아'.
수필가이며 미술평론가인 정목일은 박영호의 작품세계를 '자연과 인간의 공존미학'이라고 표현했다. 정목일은 "작가 박영호는 김해 장유가 낳은 작가로서 그가 빚어내는 선과 색채는 장유의 자연과 정서의 선이며 빛깔이다. 장유의 산능선의 선형, 논두렁 밭두렁의 곡선, 산야에 피어나는 들꽃의 색채를 담아낸다. 그의 색채는 파스텔 색조처럼 은은하고 투명하다. 자극적이거나 화려하여 눈을 끌지 않으면서 깊고 온유한 세계를 보여준다. 한없이 부드럽고 맑은 서정의 빛깔은 장유의 대지가 피워내는 영혼의 언어이다"라고 설명한다. 이 글을 읽으면 박영호가 애정을 담아 그려내는 장유가 부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장유는 박영호를 낳았고, 자연의 입김을 불어넣어 그를 화가로 키웠는데, 박영호는 어쩌면 자신을 낳고 기른 이 장유를 화폭에 담아내 보답하고 있는 건 아닐까.

>> 박영호는
1943년 김해 장유에서 태어났다.
개인전/12회. 단체전/2011, 서울미술관 개관 4주년 기념 정예작가 부스전. 2008, 79회 구상전 100호 회원전(세종문화회관). 1994, 대한민국미술대전-조소(국립현대미술관), 1986, 동아미술제-회화(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 외 2백여 회.
국제전/1994, 오늘의 한국현대미술의 단면전(뉴욕 소호갤러리) 외 50여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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