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콰이강의 다리'로도 불린 낙동철교. 1940년 4월 개설됐다가 경전선 이설로 폐쇄된 지 3년이 지났다. 레일바이크 등 관광자원으로 활용될 예정이었으나 감감무소식인 채 세월의 더께만 더하고 있다.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이작들판이 아름답고, 들판의 북쪽 가장자리를 휘감아 도는 낙동강은 모처럼의 볼륨을 자랑한다. 김해 생림과 밀양 삼랑진 사이의 낙동강에는 5개나 되는 각양각색의 다리들이 걸쳐 있다. 생림 북부의 마사리, 안양리, 도요리를 돌아보는 생림순례의 마지막 발걸음은 낙동강에 얽힌 사연과 다리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될 모양이다.
 
지난번에 걸음을 멈추었던 성포마을의 이작초등학교에서 북으로 '사깍창모롱이'를 지나면 마사리의 송촌마을이다. 원래는 말 마(馬)에 쉴 휴(休)라 낙동강 건너는 나루에서 말이 쉬는 마을이라 마휴촌이라 불리다가, 제방에 모래가 쌓이면서 모래 사(沙)를 붙여 마사리가 되었단다. '솔말'이라 불렸던 송촌마을은 작약산 아래 소나무 마을로 알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현풍 '솔(率)리'의 곽 씨가 입주하면서 마사리의 마(馬)를 붙여 '솔마(率馬)'가 되었다가, '솔'이 소나무 송(松)으로 표기되면서 송촌(松村)이 되었던 모양이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한 두 그루의 젊은 소나무를 제외하면 소나무가 그다지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다. 70여 가구에 두 서너 채의 전원주택이 새로 보이는데, 구봉사 오르는 길을 오르고 또 오르면 산 중턱에 고라니골(高鞍谷)이라 불리는 작은 마을이 숨어 있다.
 
마사로를 따라 북으로 가면 북곡마을 표지석이 있다. 서쪽으로 꺾어 만나는 작약산 자락에는 가야시대로 추정되는 북곡고분군이 있고, 북쪽으로 마을입구를 연 북쪽 골짜기엔 70여 가구가 산다. 북곡마을 위의 낙동강 변에는 '독뫼'의 독산마을이 있다. '콰이강의 다리'로도 불렸던 낙동철교를 생림 쪽에 앉힌 언덕이 '독뫼'고, 동쪽에 또 하나의 작은 언덕이 '아래 독뫼'의 하독산마을이다. 이 두 언덕이 비록 작고 낮긴 하지만, 생림수리제방을 쌓아 330만㎡(100만 평)의 이작들판을 만들어내는 데는 아주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었다 한다. 경전선의 이설로 철교폐쇄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철도건널목의 표지판이 남아있는 낙동철교 앞에 선다. 가까이 다가가 기하학적 철근골조의 아름다움을 탐닉하다 일제강점기 1940년 4월의 개설을 떠올렸다. 무슨 까닭에선지 불현듯 중국에서 압록강철교 너머로 북한 땅을 바라보던 생각에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철교 오른쪽의 사각형 통제소와 아랫쪽 원통형 벙커의 이끼 끼고 색바랜 콘크리트가 그런 감상을 부채질하는 모양이다. 서쪽으로 향하던 옛 경전선의 녹슨 철로를 잠시 따라 걷다 저 앞에 막혀 있는 마사굴(새굴, 1.5㎞)을 보고 발걸음을 돌린다. 레일바이크 등의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겠다던 계획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낙동철교 앞 건널목에서 강쪽으로 내려가면 1905년 5월에 철교로 가설되어 1962년부터 인도로 변한 낙동강의 첫 번째 다리 옛 삼랑진교에 이른다. 옛 삼랑진교 앞에는 김해시의 도로표지판과 생림면의 '생림동천(生林洞天)'이 함께 서 있는 삼거리가 있다. 구 삼랑진교와 그 앞의 마사교(1996.9)를 오가며 사진을 찍는데 과일노점을 편 아주머니 한 분이 뭐하느냐고 묻는다. 이 연재를 위한 취재 내내 이럴 때가 제일 곤란했지만, 어느새 <김해뉴스>의 기자 사칭에 익숙해 있음에 놀란다. 20년 전 쯤, 김해에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운전도 서툰데 이 다리를 건너다 대항차를 만나 사이드미러를 접어가며 진땀 흘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너비가 4.3m밖에 되지 않는 이 다리에서 재수없게(?) 다른 차라도 만날라 치면 아예 울어버리고 말았다는 '아지매' 운전자들의 회상도 이제는 우스개가 되었다. 동쪽 낙동철교 너머에 넓고 시원한 삼랑진교(2008.12)가 새로 개통되었기 때문이다. 모두 생림대로에서 곧장 이어지는 새 다리를 애용하게 되었지만, 한림에서 마사리를 거쳐 삼랑진과 밀양으로 가는 차들은 여전히 '용맹스럽게' 이 다리를 건너다니는 모양이다.
 
▲ 삼랑진으로 건너가던 창암나루터.
7개의 철근아치가 그려내는 금속성의 곡선과 사선이 아름다운데, 다리 아래 모래밭에서 키다리 미루나무를 등지고 비스듬히 바라보는 철근아치와 콘크리트교각의 조화도 아름답다. 빛나는 아침 햇살에도 좋지만 저녁 놀엔 더욱 아름답다고 우기는 매니아도 있다. 다리 구경으로 내려선 이곳에는 김해부와 밀양부를 잇던 중요한 나루터의 해양진(海陽津)과 해양원(海陽院)이 있었다. <김해읍지>에는 서애 유성룡의 부친 중영이 여기서 지었다는 '뢰진(磊津)'이란 시가 실려 있다. '금관은 천고의 옛 땅이니(金官千古地), 마땅하겠구나 또 한 아이에게(可矣一又童), 말없이 맑은 강물을 바라보다(默對淸江水), 정감만 가득 품고 동쪽으로 향한다(含情向我東)'. 금관은 김해의 옛 이름이고, 동쪽은 밀양을 가리키는 모양이다.
 
다시 마사교 앞 삼거리에 올라 제방 위의 금곡로를 따라 서쪽의 마사1구로 간다. 얼마 안돼 KTX가 달리는 신품의 연보랏빛 낙동강교 아래에 선다. 서쪽의 한림정역에서 생림터널을 빠져 나온 뒤에도 한참동안이나 강변을 달려야 비로소 강을 건너게 되는 참 길고 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다리란다. 지난 2009년 9월에 개통한 이 다리는 맞은편 강가에 있는 도문화재 제306호 삼강사비(三江祠碑)에 대한 영향 때문에 문제가 된 적이 있다. 건설사가 처음 제시했던 철근트러스트는 아주 짙은 보랏빛이었다. 강기슭 양쪽의 녹색과 푸른 강물, 그리고 하얀 모래에 어떻게 진보라가 어울릴 거라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위원들과 함께 한심해 했던 기억이 새롭다. 결국 좀 연해지긴 했지만 보라를 바꾸지는 못했고, 환경이나 문화재와의 위화감도 해결하지 못한 채, 저 혼자만 예쁜 다리가 되었다. 강을 건너는 교량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곡선과 함께 색채도 아름답다는 철도매니아도 있는 모양이다.
 
▲ 선로를 잃은 채 봉쇄돼 있는 경전선 모정굴.
오른쪽으로 아득한 강변습지를 감상하며 달리다 보면 제법 넓은 '마사뜰'을 마을 앞쪽에 펼쳐놓은 마사1구에 이른다. 마을신의 당집이 있어 '당골'로도 불렸는데, 마을회관 뒤쪽 철로 건너에 당집과 당산나무가 있다. 철도와 건물 때문에 밖에서는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320살짜리 주엽나무의 당산은 두 배나 되는 400살짜리 느티나무 두 그루를 좌우에 거느리고 있다. 황금빛 추수를 기다리는 마사뜰 역시 예전엔 낙동강물 출렁거리던 고성진(古城津)이란 나루터였다. 오래된 고성이란, 한 마리의 용이 낙동강으로 뻗어나가는 것 같이 생긴 산정상에 축조된 마사왜성(馬沙倭城)을 가리킨다. 1916년 2월의 측량도면에는 정상부를 따라 길게 뻗은 토축이 그려져 있다. 김해평야 한 가운데에 있는 죽도왜성(竹島倭城)의 지성으로 임진·정유왜란 때 나베시마나오시게(鍋島直茂)가 밀양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여기에 수운 감시의 목적으로 '반시로(番城)'로 축조한 것이라 한다. 둘레 500m, 높이 3m 정도의 토축을 2단으로 쌓아 올렸다는데, 풀이 많고 시간도 없어 확신은 어려웠지만 그럴싸한 구조는 확인했다. 답사는 제대로 못 되었지만,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마사뜰과 낙동강, 생림터널과 마사마을의 아름다운 그림은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호사가 되었다. 마사왜성의 동쪽 끝에선 한림면 모정마을로 넘어가는 금곡로가 구불구불 오르고 있다. 금곡로를 되돌아 내려오다 보니 구 경전선의 '모정굴'이 선로를 잃은 채 남아 있다. 막힌 터널입구에 어느 경비회사의 표지가 붙어 있는 걸로 보아 저장고 같은 시설로 이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 김해 생림과 밀양 삼랑진 사이 낙동강 위엔 5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발길을 되돌려 다시 독산에서 생림제방길을 따라 하독산에서 삼랑진교 밑을 지나 창암취수장에 이른다. 하루 12만t의 낙동강 물을 퍼올려 삼계·명동정수장으로 보내 51만 김해시민에게 수돗물을 공급하는 출발점이다. 가동 중의 취수장 맞은 편에는 예전의 취수장(1984.8) 건물이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다. 조금만 손보면 훌륭한 공연장이나 갤러리로 변신하기에 충분한 시설이다. 크고 푸른 바위 창암(蒼岩)이 낙동강으로 뻗어나간 모양이나, 강변공원으로 정비된 아름다운 수변공간, 삼랑진으로 건너가던 창암나루의 주막과 사연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문화인프라다. 이웃 도요마을에 뿌리를 내린 연출가 이윤택 선생과 중국 계림의 이강과 서안의 화청지에서 한참 흥행 중인 장예모 감독의 대형 야외오페라가 오버랩 되어 생각나는 건 아마도 필자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 무척산관광예술원과 노영환 대표.
취수장 바로 아래 길가에 공덕비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1932~1937년 사이에 두 번이나 둑이 터지는 고난을 이겨내고 330만㎡의 이작들판을 일구어냈던 두 분의 공덕비다. 왼쪽이 공사비를 댔던 정영태(鄭永泰) 공의 공덕비이고, 오른쪽은 당시 조중환(曺重煥) 조합장의 기념비다. 창암마을 입구에는 정영태 공의 외손 노영환 씨가 운영하는 무척산관광예술원이 있다. 관광예술원에는 간척 당시의 사진도 있고, 대구 김천 등지에서 옮겨 온 60~2백년 된 고택들도 있는데, 각각 상량문이 있어 영남지방 전통건축의 시기적 특징을 살피기에 좋다. 집안에 있는 우물로 화제가 되기도 했고, 2008년부터 2년간 한국팜스테이회장을 지내기도 했던 노영환 씨는 15년 전부터 감자와 고구마도 캐고, 딸기와 단감도 따는 수확체험과 모내기, 연날리기, 달집태우기, 도예같은 문화체험의 농촌체험관광사업을 펼치고 있다. 1년에 3만5천 내지 4만 명의 체험활동객이 다녀간다는데, 오늘도 자기가 태어난 방에서 잠자리에 드는 '진짜토박이'의 마을 일구기 성공담이다. 뒷산에 올라 낙동강을 내려다 보면 가랑이 사이에서 빠져나온 생림2터널이 낙동대교를 건너 대구부산고속도로로 달려 올라가고, 서쪽에선 석양에 붉게 물드는 4개의 다리가 아름답다. 남쪽으로는 멀리 생림대로 중앙에 말 귀처럼 솟아 오른 마현까지 황금빛 생림 들녘이 따뜻하게 펼쳐 있다.
 
▲ 새로 놓인 낙동대교가 시원하게 뻗어 있다.
창암마을을 돌아 안양로에 나서면 들판으로 뻗은 작은 봉우리의 불미산(34m)이 있고, 맞은 편 산에 오르면 대구~부산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원래 가야고분의 존재가 알려져 있었지만 2002년의 발굴조사에서 5세기께 수혈식석곽묘(71기)의 가야고분군이 확인되었다. 최고 지배층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창녕스타일 토기의 출토로 낙동강을 통한 활발한 교류도 확인되었다. 안양리고분군으로 명명되었지만 이미 심한 경작과 도굴에 의한 파괴도 있었고 고속도로 때문에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다. 남쪽으로 안양리의 본 마을인 안양마을을 지나, 신안과 선곡마을을 돌아보는데, 신안마을회관 옆의 300살 넘은 회화나무 두 그루가 '킥'하는 웃음을 자아낸다. 회관 쪽 나무에서 땅위로 뻗은 뿌리가 다른 나무줄기를 반원형으로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마누라 허리를 은근히 감싸는 엉큼한 영감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발길을 되돌려 안양마을에서 동쪽으로 양지마을을 내려다 보며 도요고개를 넘는다. 산을 끼고 강변길을 따라 돌면 도요보건진료소가 도요마을에 들어섰음을 알린다. 원래는 도요새가 많은 물가의 모래섬이라 도요저(都要渚)라 불렸던 어촌마을이었다. 지금은 70여 호에 불과하지만 조선 초만 해도 수백 호였고 가야시대에는 3천여 호나 되었다는 전승도 있다. 삼랑진으로 건너가는 깡층나루와 양산의 작원관으로 건너가는 작원진이 있었던 수운의 요지였다. 조선 성종 때 점필재 선생의 도요진이란 시가 이런 마을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동쪽 마을의 딸은 강 건너 서쪽 이웃집에 시집가고, 남쪽 배의 고기가 오면 북쪽 배에 나누며, 한 조각의 언덕이라도 살아가기 간단하니, 자손들이 밭갈고 김매는 건 꿈도 꾸지 않는다'. 나루 대신 도요감자가 유명해졌으니 시대는 변하였다. 가운데 마을회관에서 돌아보면 서쪽 산 중턱엔 고풍스런 도요교회가 있고, 맞은 편에는 이작초등학교 도요분교를 리모델링한 도요창작예술촌이 있다. 한동안 화가와 조각가들의 공방으로 활용되다가 2009년부터 연출가 이윤택의 극단이 둥지를 틀고 출판과 공연의 판을 벌이고 있다. 매월 둘째 토요일 오후 2시 30분에 시작되는 토요가족극장이 어느새 성황을 이루는데, 여기서 초연된 연극이 밀양에 가고, 서울 연희단 공연으로 올리기 때문에 초연을 즐기려는 매니아도 적지 않다는 게 촌장 김영철 시인의 귀띔이다. 남쪽 이웃 상동면의 여차마을로 통하는 길도 없고 더 나아갈 곳도 없다. 100여 객석을 가득 채운 관람객들과 함께 로맨틱 뮤지컬 '사랑을 지껄이다'의 감상으로 생림면 순례의 발걸음을 마감한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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