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두둑, 후두둑. 가지가 휘도록 달려있던 밤송이들이 떨어져내렸다. 나뭇가지를 흔들어대자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한 밤송이들이 먼저 떨어져내렸고, 긴 장대로 치니 남은 밤송이들이 우수수 또 떨어져내렸다. 밤나무 아래는 금세 가시로 중무장한 밤송이들이 지천으로 깔렸다. 갈라진 틈새로 토실토실 여문 알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월봉서원의 추석 차례상에 올라갈 밤들이 잘 익었다.
조선 11대 임금 중종의 5남 덕양군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김해 장유면 관동리 덕정마을 월봉서원. 추석을 일주일 앞둔 지난 23일 일요일, 월봉서원의 추석맞이 풍경을 취재했다.

▲ 화재 이우섭의 삼남 이봉규 씨가 화재의 위패를 모신 연강재의 감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

월봉서원 앞에서 화재 이우섭(월헌의 아들, 작고)의 부인 김문협 씨를 만났다. 그는 영남 기호학파의 마지막 거유 월헌 이보림(月軒 李普林 1903~1972)의 둘째 며느리이기도 하다. 추석을 앞두고 며느리들의 장 보는 일을 챙기는 중이었는데, "명절 때면 방송국에서 와서 서원에서 차례 지내는 걸 몇 번이나 찍어갔는데, 올해도 전화가 왔습디다. 방송국에는 '그 상이 그 상입니더. 이제 그만 찍으러 오이소' 라고 말했는데, <김해뉴스>는 김해에 있는 고마운 신문사 아입니까"라며 기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화재의 서재이자 감실(龕室. 신위를 모셔둔 곳)이 있는 연강재에는 화재의 삼남 이봉규, 사남 이준규와 아들 종형, 장손 이종한 씨 등이 추석 준비를 위해 모여 있었다. 김문협 씨와 월헌의 장남 이양섭 씨의 큰며느리 남증우 씨도 자리를 함께 했다.

▲ 추석을 앞두고 화산재 뒤편 조상 묘 앞에서 절을 올리고 있는 후손들의 모습.

"제주로 쓸 술을 빚는 게 추석 준비의 첫 번째 일인데, 그러고 보면 한 달 전부터 일이 시작되는 셈"이라며 김문협 씨가 말문을 열었다. 그는 그러면서 "찹쌀로 빚어야 옳은 동동주가 돼요. 추석 사흘 전에 떡쌀 두 되 정도를 담그고, 추선 전 날 오전에 불린 쌀을 빻아, 오후에 며느리들이 둘러앉아 송편을 빚어요. 도미 조기 대구 등의 생선을 장에서 사오면 소금단지에 묻어 보관했습니다. 전은 산적, 육전, 명태전을 올리고. 대소가의 며느리들이 모이면 일하는 여인네들이 족히 스무 명 남짓 되지요. 요즘은 냉장고가 있어 일하기가 수월하지만, 예전에는 음식이 상할까봐 조바심도 많이 쳤지요"라고 말을 이어갔다.
 
김해읍에서는 추석을 앞두고 큰 장이 섰다. 차가 없던 시절엔 김해읍에서 장유까지 음식 재료를 이고 지고 날라야 했다.
 
조상 분향은 집안 여인 모두 참여
가문 묘소 70여기 틈틈이 벌초

월봉서원의 여인들은, 업무분장을 하지 않아도 각자 자신 있는 음식을 알아서 척척 만들어낸다. 청명·한식·단오·추석·동지·설날에 올리는 차사(차례제사) 외에도 기제·시제·향사를 올리기 때문이다. 일이 많은데, 다행히 일손이 많아 감당이 된다. 다 후손들이 번성한 덕분이다.
 

집안 여인들이 술을 빚고, 장을 보고, 음식을 하는 동안 남자들은 따로 할 일들을 한다. 평소 선조들의 산소가 있는 화산재 일대의 선산을 돌보고는 있지만, 추석에는 더욱 더 정성을 다해 벌초를 한다. 선산에 있는 선조들의 산소는 12대조에서부터 화재선생의 묘에 이르기까지 70여 기이다. 평소에는 각지에 흩어져 사는 후손들을 위해 근처에 사는 이민규 씨가 이 산소들을 다 보살피고 있다. 화산재로 올라서니, 아니나 다를까, 이민규 씨가 벌초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벌써 집안사람 몇몇이 다녀갔다고 한다.
 
하늘 뜻하는 향로와 땅 의미 모사
조상 부르는 도구라 정갈하게 준비
차례는 고조부부터 다섯번 지내

기본 다섯가지 과일은 직접 길러

어른들을 따라 선산에 오른 초등학교 5학년 종형 군은 절하는 품새가 제법 의젓하다. 그러면서도 "서원에 오면 절하는 거 언제 끝나나 싶어요"라며 짐짓 엄살을 떨어댄다. 아들에게 윗대 선조들의 산소를 일일이 일러주던 이준규(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씨는 "아들을 데리고 서원이나 한옥을 찾아가면, '이런 거 우리 집에도 많은데, 놀러다닐 때도 이런 데를 찾아오면 어떡하냐'고 말해요"라며 웃었다. 종형이는 자신이 월헌과 화재의 후손이란 사실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는 듯 했는데, 화산재가 곧 문화재로 지정된다는 말을 듣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 향로와 모사를 정리하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
이봉규 씨는 추석을 앞두고 가장 중요하게 치는 일이 향로와 모사를 정갈하게 닦고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향로는 차례상에서 향을 피우는 작은 화로를 말하고, 모사는 고운 모래를 담은 그릇에 짚으로 만든 띠를 꽂은 것을 일컫는다. 향로는 하늘을, 모사는 땅을 뜻한다. 향로와 모사는 강신(신이나 조상을 부르는 것)을 위한 도구라, 이봉규 씨의 손길은 조심스럽고 경건하기 이를 데 없다.
 
추석날 새벽에는 월봉서원의 명휘사에서 분향을 먼저 올린 후, 일신재와 연강재에서 차례를 지낸다. 고조할아버지에서부터 화재선생에 이르기까지 다섯 번의 차례를 지내고 나면 오전 9시가 넘는다. 차례를 마친 후손들은 화산재 뒤편의 산소에 성묘를 한 뒤, 화산재에서 점심을 먹는다.
 
명휘사는 추석 내내 문이 열려 있다. 덕정마을에 차례를 지내러 온 외지의 후손들이 새벽 일찍 분향을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후손들이 분향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날은 집안의 여인들도 모두 분향을 한다.
 
연강재는 종일 집안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월봉서원에서는 차례를 지낸 후 가족들이 모여 화투놀이를 하는 경우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가장 큰 이유는 집안 일 의논하기에도 바빠 그런 걸 하고 있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흩어져 살던 후손들이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으니, 서원의 일이며 집안 대소사를 의논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연강재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데 어느덧 오후가 되었다. 후손들은 차례상에 올릴 밤을 따야 한다며 일제히 일어섰다. 월봉서원은 차례상에 올리는 대추, 밤, 감, 배, 사과 다섯 가지의 기본 과일을 직접 길러 추수한다. 이 다섯 종류의 나무들이 모두 월봉서원 안에 있다. 아버지, 큰 아버지, 사촌 형 등이 밤나무를 흔드는 동안 종형이는 밤송이를 까 알밤을 모으느라 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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