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운암에서 내려다본 용산.
김해 동쪽의 윗동네라 상동(上東)이라 했다. 지난 8월 현재 1천666 가구, 3천661명(남 1천981)의 주민 수는 김해에서 가장 적은 것이지만, 무척산 남쪽에서 신어산 북쪽에 걸쳐 있는 70.58㎢의 면적은 김해에서 가장 넓다. 그만큼 인구가 희박하다는 얘기인데, 입주공장은 무려 910여 개에 이르고 있다. 1개 공장에 최소한 10명의 근로자만 셈하더라도 9천 명이 훨씬 넘을 것 같지만, 주민의 숫자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일은 상동에서 하되, 살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청정마을을 기대하고 시작한 상동순례이건만, 산골짜기마다 들어찬 엄청난 공장에 놀란다. '기업하기 좋은 김해 만들기'가 아니라, '살기 좋은 김해 만들기'의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 공장은 늘어도 인구는 줄어드는 모양이다. 우리 시가 크고 풍요로워지는데, 우리가 치른 희생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절실하게 느낀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모양이다.

시내에서 면소재지로 가는 통로는 삼계동에서 나전까지 갔다가 상동로를 따라 가는 길, 어방동 인제대에서 도둑고개를 넘고 묵방을 지나 장척로를 내려가는 길, 대동에서 낙동강가의 동북로를 따라 북쪽으로 거슬러 오르는 세 갈래 길이 있다. 북쪽에서부터 여차리, 감로리, 매리, 대감리, 우계리, 묵방리의 6개 마을이 있는데, 지역의 동쪽을 대구부산고속도로가 남북으로 관통하게 되었지만, 마을 간의 소통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주로 무척산 남동쪽과 신어산 북동쪽의 산자락과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들은 원래 서로 떨어져 있는 산골마을들이었다.
 

▲ 양산 용당나루에서 바라본 김해 용당나루.
가장 위쪽에 있는 여차리에서부터 상동순례의 걸음을 시작하려 한다.
 
여차리로 가기에는 생림의 나전공단 끝에서 상사촌 뒤로 여차로를 타고 오르는 길이 편하다. 가장 높은 여덟막고개에 서서 멀리 대구부산고속도로 너머의 낙동강과 여차~백학~용산의 3개 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보너스도 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차가 지날 수 없는 길이라, 낙동강 쪽의 용산으로 나가, 매리를 거쳐 대동면을 다 지나고, 선암다리 앞에서 불암을 지나, 부원동으로 들어가야 하는 참으로 멀고 먼 길을 돌아다녀야 했다. 여차고개로도 불리는 여덟막고개는 어떤 이가 명당을 얻기 위해 여덟 번이나 이장하며 초막을 쳤던 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여차리의 본 마을인 여차마을은 배 여(艅), 이을 차(次)라 배가 닿는 마을이었다는 전승이 지배적이지만, 여(余)의 뜻 '남을'이 '넘을'과 통하고, 서쪽의 여덟막고개와 남쪽의 아홉살고개(九曲嶺)를 넘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고개너머 마을'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라는 풀이도 있다. 그러나 낙동강이 여차천을 따라 만입해 있었던 과거의 지형과 조선 예종 때 <경상도속찬지리지>의 여차저(余次渚)로 기록된 것을 보면 전자의 설득력이 높다. 저(渚)가 강 하구의 삼각주를 뜻하기 때문이다.
 
마을은 용성천(龍城川)으로도 불리는 여차천을 중심으로 무척산 기슭의 서용성과 여차로 변의 동용성으로 나뉜다. 동용성에는 도기소(陶器所)가 있었다 하고, 마을회관 뒤쪽의 여차교(2002.1)를 건너면 서용성 입구엔 마을의 간판마담과 수호신이 있다. 이제 곧 화려한 변신을 준비하는 간판마담의 은행나무는 유달리 빛나는 노란색을 자랑하고, 그 뒤에 넉넉하게 자리한 400살의 당산나무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크고 당당한 시 보호수의 팽나무다. 청정 환경 속에서 더욱 씩씩하게 보이는데, 만삭의 임산부 배처럼 튀어나온 크고 둥근 유종은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로도 유명했던 모양이다. 풍만해서 편안한 당산나무도 좋지만, 녹색의 무척산을 배경으로 혼자만 노란색으로 물드는 은행나무 순례는 필자의 가을앓이가 되었다. 지난해는 가물어서 그렇지도 못했지만 강수량이 많다는 올해는 혼자만의 노란색 축제에 대한 기대가 자못 크다.
 
▲ 전원주택지로서 인기가 높은 백학마을 전경. 20년 전부터 시작된 사업이 결실을 맺고 있다.
동쪽 이웃의 백학(白鶴)마을은 아래쪽의 백운동(白雲洞)과 위쪽의 학운동(鶴雲洞)이 합쳐진 이름이다. 쇠 소리를 내면 학이 날아간다고 풍물도 하지 않는 조용한 마을로 무척산에 의지해 여차천을 앞에 둔 수려한 경관으로 전원주택지로서 인기가 높다. 20년 전부터 시작된 전원주택지 조성사업의 결실이 이제 나타나는지, 몇 년 사이에 갑자기 다양한 스타일의 전원주택이 늘어나 남해의 독일마을 등을 연상케 하고 있다.
 
마을입구의 백운암 안내판을 따라 무척산에 오른다. 2.8㎞나 되는 산길은 겁이 날 정도로 경사가 급하고 멀다. 마음을 가다듬고 좁고 가파른 임도를 오르고 또 오르면 정상 가까운 8푼 능선쯤에서 이제 막 세워진 단아한 일주문을 만난다. '무척산백운암(無隻山白雲庵)'이란 편액을 달고 있다. 가락국의 무척대사(?)나 장유화상 관련의 연기나 전승도 있는 모양이지만, 유지 김두영(金斗榮)과 송유철(宋有轍)의 지원으로 된 1801년의 중수가 가장 확실한 기록이다. 개산(開山)이 곧 창사(創寺)를 뜻하듯이 아래의 백운동도 이 절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백운동의 유래도 그렇거니와, 여기서 아래를 내려다 보아야 비로소 여차~백학~용산의 모든 지명이 왜 용(龍)과 연결되는지를 알게 된다. 발 아래로 펼쳐지는 산들과 낙동강의 절경은 절로 탄성을 지르게 하지만, 낙동강으로 머리를 내민 용 한 마리는 누구에게나 그럴 듯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뾰족한 입과 튀어오른 머리, 구불구불한 등줄기와 가늘어지는 꼬리는 누가 봐도 용 그 자체다. 대구부산고속도로의 용산터널로 인해 꼬리 쪽엔 제법 큰 흠집이 생겼지만, 강 이 쪽 여차리의 용 관련 지명과 강 저 쪽 가야진사의 용신제, 심지어는 4대강사업에서 용산과 가야진사 사이의 하도확장이 왜 문제가 되었는지까지도 이해가 된다. 명부전에서 극락왕생을 비는 스님의 독경소리를 뒤로, 브레이크 밟은 다리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아슬아슬한 산길을 내려온다.
 
▲ 백운암 일주문.
어른 열사람의 팔도 모자랐다는 포구나무(팽나무)가 있어 포구정이라 했다는 마을을 지나, 확성기와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요란한 용산초등학교에 이른다. 여느 면지역의 초미니 학교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1938년 5월에 설성갑 교장이 여차간이학교로 시작했다가 1948년 3월에 용산초등학교가 되었다. 학생의 감소로 폐교직전까지 갔으나, 2003년부터 전원학교의 특성을 살리면서 영어·중국어의 외국어교육강화, 국악·골프·피아노·미술 등 방과후학교의 내실화 등을 통해 멀리 시내에서 통학하는 아이가 다수 생기게 되면서, 어느새 '명문초등학교'의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왠지 자신감 있어 보이는 아이들 148명(남 73, 유치원 17명)이 이경희 교감 이하 26명의 교직원들과 신나게 뛰놀며 공부하는 모습이 흐뭇하다.
 
▲ 용당나루에서 바라본 양산 원동의 가야진사.
학교 뒷산을 온통 깎아내리고 있는 4대강사업 이주민정착촌 조성 현장을 지나 고속도로 밑을 지나면 용산마을이다. 마을회관과 경로당을 지나 얼마 되지 않아 길은 여차제방으로 막히는데 바로 여기가 용당나루터다. 일제강점기에 여차제(余次堤)를 쌓은 뒤 제방 당(塘)의 용당(龍塘)으로 표기하게 되었으나, 원래는 용신을 모시는 당집의 용당(龍堂)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맞은편 강가의 모래언덕을 엄청 깎아낸 탓에 이제는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 양산 원동의 가야진사에도 용당나루가 있다. 양산이 숫룡, 김해가 암룡이란 전승처럼 이 낙동강의 용은 비 내리는 용한 재주로 섬겨졌고, 그래서 양쪽 모두에 용당이 있었던 것이다. 이 쪽에도 조선말까지는 기우단도 있었고, 1955년의 심한 가뭄에는 김해군수가 여기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지만, 보다 확실한 역사는 저 쪽에 남아 있다.
 
원래 가야진사(加耶津祠·도민속자료 제7호)는 신라의 내물왕이 가야를 치러가면서 무운을 빌었던 사당에서 비롯되었다 하고, 용신제(도민속자료 제19호)의 기원은 신라가 강에 제사를 지내던 4독(瀆)의 국가제사(中祀)로 경주에서 특별히 파견되는 칙사가 제물로 돼지를 용산 앞의 용소에 빠뜨리던 것에서 이어져 오는 전통이다. 백운암에서 보면 잠긴 용머리의 위치가 용소에 해당하는 것이 너무나 그럴싸하게 보인다. 같은 용당나루였건만 보다 확실한 형태로 역사에 남은 것은 승자 신라 쪽이었던 모양이다.
 
용산마을에서 동북로로 남하하니 곧 감로마을의 표지석이 나타난다. 감로리의 시작이다. 1914년까지 소감마을이었던 것을 감로로 고쳤단다. 이후 맞은편 원동의 원리로 건너가던 감로나루 마을이 되었고, 함께 아랫마을의 감로는 신곡으로 고쳤던 탓에 이 감로마을을 감로사가 있었던 동리로 착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마을입구의 감로교회(담임목사 이상돈)와 마을회관(2005)을 지나면 마을을 독차지 한 큰 공장 뒤에 마을의 역사를 지켜 본 증인이 있다. 300살에 14m나 되는 당산의 개서어나무는 근육처럼 줄기와 가지가 울퉁불퉁한데, 속명 '카피너스'는 '나무의 우두머리'란 뜻이란다. 우리나라가 세계분포의 중심이라는데, 태풍 때문인지 군데군데 잎이 바래고 가지가 부러졌다. 입향조였던 남양방씨의 선조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세계적인 나무인데 우리가 너무 천대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
 
▲ 신곡마을에 있는 현재의 감로사.
아래의 신곡마을 역시 골짜기 전체가 공장들로 변해버린 건 마찬가지지만, 고려시대의 대찰 감로사(甘露寺)가 있었던 곳이다. 고종 24년(1237)에 해안(海安)이 창건한 감로사는 충열왕 때 원감국사(圓鑑國師)의 시호를 받는 충지(沖止)가 주석할 정도였고, 안유(安裕)·안향(安珦)·박인량(朴寅亮)·이견간(李堅幹) 등 당대의 명유들이 시를 남길 정도의 명찰이었다. 조선 전기에도 국가의 번영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전국 자복사찰 중 하나였고, <경상도지리지>는 선종사찰 신어산 감로사를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상당한 피해를 입었던 것 같지만, 영조 7년(1731)에 부속 건물로 24개의 돌기둥을 가진 진남루(鎭南樓)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만만치 않은 사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임진왜란 때의 사연은 바로 여말 성리학의 시조 안향이 읊었던 '감로사'란 시에서 비롯되었다. 선조 24년(1591)에 사헌부 감찰로 임명된 함안 사람 안민(1539~1592)은 마모된 선조 안향의 시판(詩板)을 복구하고자 휴가를 내어 감로사를 찾았다. 그런데 마침 왜적들이 김해성을 함락시키고 양민들을 도륙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승려와 장정 100여 명을 이끌고 김해성으로 향하다 지금의 불암동인 입석강(立石江)에서 왜의 대군과 마주쳐 전사하였다. 비록 전과는 없었으나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활동으로 기록되는 사건이다. "거울 같은 강물 위로 잎사귀 하나 날아드니,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나는 빈 하늘은 부처의 왕성이라, 푸르고 푸른 고갯마루에 아지랑이 피고, 돌 위에 흐르는 잔잔한 물은 빗소리 같구나. 볕이 따뜻한 정원의 꽃은 연녹색을 갈무리하는데, 선선한 밤 산 위의 달빛은 옅은 빛을 보낸다. 백성 걱정한다면서 도탄에서 구하지를 못하니, 부들방석(불교)에 내 반생을 맡기고 싶구나." 안민 공이 다시 새겨 부치고자 했던 안향의 '감로사'란 시다.
 
감로사는 폐사되고 세월은 흘러 마을 이름마저 '새 골짜기'의 신곡(新谷)으로 바뀌었어도 한말까지는 양산 물금의 용화사로 팔려간 보물 제491호의 석조여래좌상도 있었고, 1975년 11월의 동아대박물관 조사 때만 해도 석탑은 남아 있어 탑골(塔谷)이라 불리기도 했었지만, 부산 부민동의 동아대박물관 앞 화단에 옮겨져 외롭게 서있는 감로리 석탑은 우리 김해인의 부끄러운 얼굴이다. 감로사지의 석축과 탑재 등은 아직도 밭이나 민가 등에 흩어져 있지만 제대로 조사된 적도 없이 참으로 따뜻한 골짜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공장들만 가득 들어차게 되었다. 4대강사업으로 강변부지의 농사가 불가능해진 마을주민들은 이주단지 등으로 떠날 예정이라 어쩌면 마을 자체가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2년 전까지도 마을 가운데에 있었다는 지석묘 1기와 상석 1개 역시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게 되었는데, 오늘 보니 어떤 회사 표석의 받침돌로 둔갑한 모양이다. <김해읍지>는 감로사의 암자로 남(南)·중(中)·서(西)·도솔·백련·석영암 등을 전하고 있으나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다 없어진 빈자리만 붙들고 나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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