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척마을에서 바라본 장척산과 능선. 멀리서 보기에도 완만한 경사면은 마치 곱게 늙은 산길처럼 호젓한 사색의 공간을 내어준다. 사진=최기봉 Kibchoi@korea.kr
김해의 계곡 중에서 물 깨끗하고 골 깊기로는 장척계곡을 빼놓을 수가 없다. 때 묻지 않은 자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신어산 긴 산줄기가 장척계곡으로 발을 담그고, 실타래 풀어놓은 듯 구불구불 생명고개로 길을 내는 임도는, 나그네의 가을타는 마음마저 아련하게 만든다.

이 장척계곡을 감싸 안고 있는 산줄기 중 오른편이 신어산 줄기이고, 왼편이 장척산 줄기이다. 그 장척산 줄기의 정상이 바로 장척산(531m)인 것이다. 원래 장척산은 10년 전만 해도 이름조차 갖지 못했던 무명의 봉우리였다. 그러다 김해의 산을 좋아하는 몇몇 산꾼들이 '장척계곡 위의 산이니 장척산으로 부르자'며 호명한 것이 지금의 장척산이 되었다.
 
장척산은 능선을 오르고 내리는 '자잘한 재미'는 없다. 완만한 경사를 일정하게 유지하기에,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능선을 오르고, 다시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능선을 내리는 담담한 산행이다. 그런데 정작 산에 든 사람은 나무숲에 파묻혀, 세상 시름 모두 잊고 그 지루한 능선 길에 심취하게 된다. 장척산이 생각 깊은 자에게 '사색의 능선 길'을 제공하기에 그렇다.
 

▲ 장척산 오르는 능선에서 바라본 석룡산과 무척산. 수묵담채의 기법처럼 층층의 농담을 연출하고 있다.
마치 곱게 늙은 산길이라고나 할까? 험한 산세가 아니기에 지친 몸 다스리느라 '생각' 빼앗길 일 없고, 그렇다고 그렇게 호락호락한 산은 아니기에 '잡념'에 빠지지도 않는다. 그러니 오롯이 호젓한 사색의 공간을 즐길 수 있는 것이 장척산 산행이다.
 
이번 산행은 장척계곡 위 생명고개의 낙남정맥 이정표를 들머리로 하여 임도, 백두산 방면 이정표, 452m봉, 장척산 정상, 능선, 385m봉으로 하여 롯데 상동야구장으로 하산하는 코스다.
 
장척마을에서 생명고개 들머리로 가는 길. 천관사 방향으로 도로를 오르다 보면, 생수공장도 나오고 왼쪽으로 장척산 줄기도 보인다. 벚나무 가로수는 이미 단풍 들어 머리에 붉은 모자를 쓰고 있다. 조금 더 오르자니 장척계곡에서 오르는 임도와 만나게 된다.
 
장척계곡 임도는 인간의 인생길 같이 구불구불하여, 길 따라 소곤소곤 많은 이야기를 숨기고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내밀하고도 그윽한 임도이다. 여유 있을 때 이 길을 따라, 삼림욕 하며 어슬렁어슬렁 오르는 맛도 꽤 괜찮겠다.
 
생명고개. 상동면과 대동면을 잇고, 낙남정맥의 시작점인 동신어산과 신어산을 아우르는 고개. 이 생명고개에 서니 멀리 마을 쪽에서 닭 홰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김해의 온 생명들이 이곳 품에 안겨 살아가고, 또 떠나감을 알리려는 듯 울음소리 한 번 호쾌하다.
 
신발 끈을 조이고 낙남정맥(매리) 이정표 따라 길을 오른다. 초입부터 밤송이들이 굴러다닌다. 밤송이를 까보니 토실토실한 알밤 두어 개, 윤기 도는 얼굴을 내민다. 어느새 임도 따라 낙엽은 떨어져 가을햇살에 바스락대고, 길섶으로는 억새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억새의 몸짓 따라 나그네의 마음마저, 가을바람처럼 소슬하게 흔들리고 있다.
 
오던 길을 뒤돌아보니, 신어산 능선이 그 위용을 드러내며 우뚝 솟아있고, 남쪽으로는 삿갓을 쓴 듯 백두산 정상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 올린다. 좀 더 오르자 임도와 산길의 갈림에서 '백두산 5.9㎞' 이정표가 서 있다. 이정표에서 산길로 접어들어 452m봉을 탄다.
 
경사가 가팔라진다. 오르는 발길에 채여 상수리나무 열매인 꿀밤이 또르르 굴러 내린다. 가만 보니 꿀밤이 지천이다. 꿀밤 헤아리며 산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452m봉 능선 길.
 
가을 정취 물씬 풍기는 오솔길 따라, 미역취가 꽃대를 올려 자잘하게 노란 꽃을 피우고 있다. 산마늘도 꽃대 위에 마늘을 맺었다. 산마늘 한 알 입에 넣고 씹는다. 알싸하고 향긋한 마늘 향이 입 안 가득 진동한다.
 
▲ 연리지 소나무.
452m봉에서 길을 내린다. 올망졸망한 버섯들이 곳곳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크고 작고, 희고 노랗고, 마치 버섯체험교육장에 온 것 같다. 길을 거의 다 내려와서는 버섯 채취하는 분들을 만난다. 식용버섯, 독버섯 하나 구분 못하는 백면서생으로서는 참 부러운 인사들을 만난 것이다. 얼마나 채취했는지 묻자 그냥 건성으로 대답한다. 동업의 사람으로 오해를 하는 모양이다. 산 속에서도 삶의 치열함은 가시지 않는가 보다.
 
다시 오르막. 곧이어 그늘진 곳에서 군락을 이룬 솔이끼가 눈에 띈다. 이끼 위로 고깔 모양의 암그루 홀씨주머니가 수없이 고개를 곧추세웠다. 마치 부처상에 발현한 우담바라처럼 생겼다. 산속에 든 불목하니의 수고로움이 기특해서, 잠시 쉬어가라고 우담바라를 열어주시는가? 한참을 합장하듯 솔이끼 앞에서 서성거린다.
 
오름세가 계속된다. 진달래 가지 끝 이파리는 짙은 단풍이 들었고, 길 따라 피어나는 닭의장풀은 남색 꽃이 더욱 선명하다. 돌무지를 만나고, 그 돌무지를 다 지날 즈음 연리지 소나무 한 그루가 처연한 모습으로 서 있다.
 
각기 다른 태생으로 세상을 살다, 그 사랑이 절절하여 한몸이 된 나무, 연리지(連理枝). 서로 껴안고 있는 품이 외설적이지 않고, 되레 절절한 고통이 느껴지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들의 비틀리듯 엉켜있는 사랑의 고통을 보며, 그들이 받은 세상의 오해와 질시가 눈에 선해 안타깝기만 하다.
 
오른쪽으로 조망이 잠시 트이면서, 멀리 백두산과 그 능선이 펼쳐진다. 왼쪽으로는 석룡산과 무척산 산릉들이 수묵담채 기법처럼 층층의 농담(濃淡)으로 산수화를 연출하고 있다.
 
얼마를 더 오르니 백두산과 장척산 갈림길 이정표가 보인다. 주위의 나뭇가지에는 산악회 리본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낙남정맥의 주요지점이란 뜻이리라. 이정표에서 롯데 상동야구장 방향으로 오르면 곧바로 장척산 정상이다.
 
▲ 정상 부근 왼쪽편의 고사목. '살아서 백년, 죽어서 천년'이라고 했던가?
장척산(531m). 33㎡(10평)의 공간에 벤치 두 개가 짝을 이뤄 앉아있다. 정상석은 없고, 정상 팻말과 정상을 알리는 이정표가 서 있다. 정상 왼쪽으로는 큰 고사목 한 그루 눈에 들어온다. '살아서 백년, 죽어서 천년'이라고 했던가? 비록 고산준령의 주목나무는 아닐지라도 하얀 뼈로 남아 '백년은 살아라'고 돌 하나 얹어놓는다.
 
산을 내린다. 지금부터는 길고 긴 낮은 경사의 내리막이 계속 된다. 좁다란 오솔길로 길은 호젓하다. 한 사람 지나갈 정도의 너비에다, 조망은 전혀 없다. 키 큰 참나무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계속 낙엽을 밟으며 내려가야 한다.
 
여름을 지난 나무들은 피곤하게 나뭇가지를 늘어뜨리고, 간혹 이파리 몇 잎 낙엽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소임을 다하고 안식을 취하는 이들의 여유로움을 낙엽에서 읽는다. 발밑 낙엽들의 한가로운 '귀소(歸巢)의 잠'이 새삼 부러워지는 시간이다.
 
능선 길인데도 길은 깊고도 좁다. 얕은 봉우리 몇 개를 오르내리며 길을 계속 내린다. 구비지고 휘돌아드는 길. 새 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만 동무하며 가는 길. 가끔 나뭇가지 부러지는 청량한 소리만 산 속을 울릴 뿐, 닫혀 있는 '사색의 공간' 속 길이다.
 
꽤 내려온 상황에서도 조망은 좀체 터지지 않는다. 금강송 군락 쯤 와서야 솔가지 사이로 신어산 능선이 하늘과 맞닿아 있음을 확인한다. 돌무지 지대를 지나고, 솔숲과 참나무 숲을 지나다 만난 바위에서 발을 멈춘다.
 
▲ 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을 닮은 기암.
어디서 많이 본 듯 낯이 익다. 자세히 보니, 사람의 옆 얼굴을 닮았다. 그 중에도 이스터 섬의 석상 '모아이'와 아주 흡사하다. 넓은 이마, 큰 코, 다부진 턱을 가진 세 사람의 옆 얼굴이 바위에 조각한 듯 명료하게 드러난다.
 
능선의 한 봉우리에 선다. 나무 뒤로 장척산 정상이 얼핏 보이고, 백두산 줄기가 멀리 대동 쪽으로 내달리고 있다. 길 양 옆으로는 깊은 계곡이다. 골이 깊어 아찔하다. 낙남정맥의 깊디깊은 속살을 보는 것 같다. 봉우리 하나 더 오르니 조망이 트인다. 도봉산 자락과 대감마을이 멀리 보이고, 그 뒤로 석룡산과 무척산이 크게 다가온다. 조금 더 내리니, 소감마을과 신촌공단이 보이고 동신어산과 멀리 양산의 토곡산도 조망된다.
 
계속되는 능선 길. 조금 단조롭다 싶을 때 산줄기가 크게 꺾인다. 곧이어 날머리인 롯데 상동야구장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다른 이정표는 없고, 날머리 근처의 음식점 '하늘마당' 이정표를 따라 길을 내리면 된다.
 
내리는 길에서 만난 취나물 흰꽃과 보라색 방아꽃, 분홍의 여뀌꽃들이 오랜 사색의 시간에 방점을 찍듯 속속 나그네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날머리 입구의 감나무와 밤나무가 가을의 깊이를 실감케 한다.
 
날머리에서 잠시 몸을 식힌 후, '장척산'을 호명했다는 신상경 씨를 찾아간다. 온갖 화초로 예쁘게 꾸민 '하늘마당'이 그의 집이자 호구지책의 음식점이다. 정원에는 양다래가 먹음직스럽게 익어가고, 상사화는 그 붉은 꽃잎으로 한창 제 사랑을 활활~ 불태우고 있다.
 
상동 막걸리 한 잔 들이켠다. 온몸에 장척계곡의 시원한 물길이 흘러넘친다. 연거푸 한 잔 더 들이켠다. 세찬 물소리가 막걸리 주전자에서 들려오고, 잔에서는 흥겨운 노랫가락이 흘러나온다. 그렇게 물과 사람과 산이 하나가 되어 흐르고 또 흐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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