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산홍엽. 산 아래 억새밭에서 바라본 황새봉이 한 폭의 수채화를 닮은 듯 하다.
가을이 깊어가다 서서히 그 정점을 맞이하고 있다. '깊어가는 것'은 '안으로 품는 것'이고 '주변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 '깊어감'을 되새기는 산행으로, 주촌면과 진례면의 경계에 있는 황새봉을 찾는다. 이번 산행은 가을 숲길의 고즈넉하고 호젓함을 찾아가는 길이라, 다소 짧은 코스에 담담한 오르내림의 산행이다. 혹 가을 능선을 길게 즐기려면 냉정고개에서 양동산성의 임도를 거쳐 황새봉으로 오르는 길도 좋겠고, 가볍게 깊은 가을을 즐기려면 진례면 고모리 고령마을 쪽에서 황새봉으로 오르면 된다. 어쨌거나 모두 짙은 가을 정취를 한창 느낄 수 있는 코스들이다.
 
주촌면 '추모의 공원' 초입을 들머리를 해서 누릉내미재~고령마을 갈림길 이정표~덕암 갈림길 이정표~내삼폭포 갈림길 이정표~황새봉 정상~다시 고령마을 갈림길 이정표로 되돌아와 고령마을로 내려오는 코스이다.
 
▲ 황새봉 들머리 이정표.
황새봉을 오르려면 주촌면 덕암공단에서 '추모의 공원' 방향으로 길을 잡아야 한다. 추모의 공원 초입 2차선 오르막 도로를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 '황새봉 1.7㎞ 낙원공원 3.3㎞' 이정표가 보인다. 이곳이 황새봉 들머리이다.
 
들머리부터 가을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시간이다. 시작부터 평상이 놓여있다. 낙남정맥 냉정고개~영운리고개 코스에서 두어 숨 돌려야 하는 곳이라 쉴 곳을 배려해 놓은 모양이다. 길가로는 자리공의 붉은 줄기가 유난히 빨갛다. 자리공 넓은 잎들도 단풍 색감을 슬슬 끌어올리고 있는 중이다.
 
임도는 넓고 평탄하다. 가을 햇살이 곱게 숲길을 물들이고 있고 꽃향유의 보라색 꽃들이 군집을 이뤄 사람의 눈길을 끌고 있다. 곧이어 누릉내미재라는 팻말이 보이고 조금 더 숲으로 들어서자 '황새봉 1.6㎞m' 이정표가 나온다.
 
오르막이 시작된다. 천천히 오름새를 즐기며 좁은 가을 산길을 마음에 두고 걷는다. 얼마쯤 올랐을까, 길섶 주위로 새털이 낭자하다. 하얀 깃털과 솜털이 여기저기 흩어져 뒹군다. 야생의 포식자에게 희생당한 흔적이리라. 풍성한 가을, 축복의 숲에도 이러한 폭력과 약육강식의 법칙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흰 개망초꽃 군락은 햇빛을 받아 하얗게 눈부시다.
 
한차례 급박한 경사를 오른다. 숨이 제법 차오를 때쯤 넓은 터를 가진 부부 유택이 고즈넉이 앉아 있다. 따뜻한 햇볕에 금슬 좋게 누워있는 품이 참으로 넉넉하게 보인다. 유택 뒤로 난 길을 다시 따른다.
 
오솔길 양지 바른 곳으로 구절초 군락이 하얗게 펼쳐지고, 주위로 분홍색 여뀌꽃들도 한 자리 차지하여 햇볕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앉았다. 완만한 경사를 한차례 오르내린다. 두 번째 봉우리에서 널찍한 터가 나오고, '황새봉 1.2㎞' 이정표가 길을 내고 있다.
 
오솔길 따라 길을 가다보니, 넓은 터에 때죽나무 군락이 오롯이 서 있다. 그 중 한 그루에 '황새봉' 나무 팻말이 걸려있어 산의 행방을 알려주고 있다. 잠시 고개를 오르자 다시 이정표. 왼쪽으로 완전히 꺾어 길을 잡는다. 그리고 급한 내리막을 내린다.
 
▲ 고령마을로 내리는 길. 산은 온통 가을로 짙어가지만 산 아래는 아직도 푸른 빛이 오솔길을 감싸고 있다.
내리막을 내리며 지세를 보니 황새봉의 활짝 펼친 오른쪽 날개 부분을 오르내리는 형국이다. 곳이어 다시 오르막. 기분 좋게 바스락대는 낙엽을 밟으며, 단풍 든 나뭇잎을 일별하다 보니 고령마을 갈림길 이정표. 고령마을로 내리는 길이 고향길처럼 아련하고 애틋하다. '황새봉 1.1㎞'.
 
길은 다시 오르막이다. 두 팔 휘적거리며 오른다. 길옆으로 낙엽이 한차례 우수수 떨어진다. 바람은 한 해의 갈무리를 끝낸 나무 이파리를 이승에서 저승으로 데려간다. '순응의 미학'이 이런 것일까?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형기 시인의 시를 빌지 않더라도 새삼 적확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깔딱고개를 넘어서자 다시 새로운 이정표가 보인다. 덕암마을 갈림길 이정표. 황새봉까지 600m 남았다. 낙엽이 깊이 쌓인 산길은 푹신푹신한 융단 위를 걷는 느낌이다. 산이 높아질수록 군데군데 소나무들이 넘어져 길을 막고 누워있다. 그래도 잎을 내고 푸른 가지를 하늘로 뻗어내느라 사력을 다하는 모습이다. 쓰러진 소나무 밑을 고개 숙여 지나간다. 생명의 존엄함을 고개를 숙여 배우게 되는 것이다.
 
호젓하게 오솔길을 사부작사부작 걷다보니 내삼폭포 갈림길 이정표. 내삼폭포는 주촌면 내삼마을 안쪽 황새봉 깊은 자락에 자리한 아름다운 폭포다. 수량이 풍부해 사시사철 시원하고 아름다운 비경을 간직한 곳이다. 오늘은 내삼폭포를 마음에만 담아 간다. 정상까지 400m 남았다.
 
넉넉한 길은 참으로 평온하고 한적하다. 그야말로 가을을 걷는 사색의 유산(遊山)이다. 평강한 마음이 이 길을 이끈다. 길 따라 자리공은 제 넓은 잎 붉게 펄럭이고, 숲을 이루고 있는 밤나무들은 발치에 수많은 밤송이를 떨어뜨려 놓았다. 제피나무들도 길 따라 나그네와 눈을 마주치는데, 한 잎 따다 입에 넣어보니 짙고 알싸한 향이 입 안에서 진동을 한다.
 
황새봉 안부 체육시설. 철봉도 있고 평상도 보인다. 앞쪽 황새봉 가는 길 오르막을 오른다. 잠시 치고 오르니 넓은 공터가 나오고, 통나무로 만든 평행봉과 철봉이 있다. 그 옆으로 통나무 벤치도 함께 만들어 놓았다. 철봉은 나무와 나무 사이에 통나무를 걸쳐서 만들었는데, 누구의 솜씨인지 몰라도 빙그레 웃음짓게 한다.
 
▲ 황새봉 정상의 이정표. 오래전 진례가 물에 잠겼을 때 황새 한 마리가 내려앉을 곳을 찾다가 겨우 한 봉우리를 찾아 내려앉았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곧이어 사방이 숲으로 가려져 있는 황새봉 정상(393m)에 닿는다. 황새봉 정상 이정표가 서 있고, 그 옆으로 삼각점과 삼각점 안내도가 보인다. 황새봉의 지리적 위치는 경도 128도 47분 44초, 위도 35도 15분 43초, 해발고도 393m로 표기돼 있다. 정상의 조망은 없다.
 
황새봉. 진례면 고모리와 주촌면 내삼리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오래전 진례가 모두 물에 잠겼을 때, 황새 한마리가 내려앉을 곳을 찾아 헤매다 겨우 한 봉우리에 내려앉았는데, 그곳을 황새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를 가지고 있다.
 
다시 하산길을 내린다. 솔가리가 수북한 길을 내리자니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조심조심 내려서 체육시설 안부 평상에서 잠시 쉰다. 적요한 가을 햇살이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며 나그네의 그림자를 길게 끌고 간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 한줄기가 숲으로 들어와 사금파리처럼 반짝인다.
 
오를 때 안보이던 부부 유택이 보인다. 무덤 앞으로 감나무 세 그루, 빨갛게 감이 익었다. 조랑조랑 열린 감이 제법 탐스럽다. 나무 꼭대기의 까치밥 하나, 새가 쪼아 먹고 간 자리에 가을하늘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감나무 단풍, 참 곱기도 하다.
 
▲ 보랏빛 꽃향유 군락이 나그네의 눈길을 끈다.
고령마을 갈림길 이정표에서 고령마을로 길을 내린다. 넓고 안락한 길이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아직 풀이 웃자라 푸른 물이 싱그럽다. 잠시 기분 좋게 끄덕끄덕 길을 내리니 고령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꽃향유 군락이 자지러지고, 서양민들레가 하얀 홀씨를 폴폴 날리며 제 갈 길을 내고 있다.
 
마을 근처로 내리자 멀리 잘 자란 금강송 세 그루가 고령마을의 우애 좋은 3형제처럼 든든하게 서 있다. 곧 임도가 나오고 마을의 집들이 보인다. 길 주위의 고로쇠나무는 단풍을 곱게 잘 입었다. 외딴집의 개 짖는 소리도 그저 한가롭기만 하다.
 
고령마을에 도착한다. 여유롭고 한적한 동리다. 벼는 이미 추수가 끝나고, 밭에는 고추, 콩, 수수 등속이 여물대로 여물었다. 가을이 익을 대로 익어, 집집마다 따뜻한 손길이 느껴진다.
 
▲ 고령마을로 내려서자 잘 자란 금강송 세 그루가 우애 좋은 3형제처럼 든든하게 서 있다.
어느 집 담장에는 담쟁이덩굴이 단풍들어 예쁘고, 어느 집에서는 잘 익은 사과나무의 빨간 사과를 따서 나그네에게 권한다. 고구마 밭에서는 고구마를 먹어보라며 한 봉지 건넨다. 인심 또한 넉넉하다.
 
고령마을에서 황새봉을 바라본다. 황새가 활개를 치는 형상이다. 왼쪽으로는 추모의 공원 자락이, 오른쪽으로는 무릉산 줄기가 양 날개처럼 뻗어 하늘로 날아오를 기세다. 그 황새봉의 추색이 처연하다. 온 산이 깊을 대로 깊었다. 고령마을과 함께 만산홍엽(滿山紅葉), 고스란히 깊어지는 산 능선을 눈으로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산을 등지고 바라보니 억새밭이 역광에 빛나고 있다. 하얗게 눈부신 억새들이 수만, 수천의 햇빛을 품고 흔들린다. 억새가 흔들릴 수록 황새봉도 이리저리 흔들린다. 강물처럼 그 억새들이 물소리로 흐른다. 그리하여 억새밭에는 물소리가 가득하다. 그 물소리 흐르고 흘러 큰 물길을 이룬다. 그 물길의 출렁임이 예사롭지 않다. 온 들판을 눈부시게 흘러넘치다, 궁극에는 사람의 마음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나그네의 마음도 억새꽃 홀씨가 되어 바람에 날려간다. 저녁놀 지는 황새봉 자락으로 환하게 불 밝히며 가는 것이다.






최원준 시인/ 문화공간 '守怡齊수이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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