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발견과 더불어 인류 문명은 눈부신 속도로 발전했다. 금속이 강해지면서 전쟁도 다반사로 일어났지만, 인간생활에 필요한 도구의 수준도 크게 나아졌다. 금속공예는 그 덕에 시작됐다. 과학이 발달하고, 수많은 종류의 금속이 발견되고, 새로운 합금기술이 개발되면서 금속공예는 발전을 거듭했다. 금속공예의 기법 중에서도 '주금'은 오랜 옛날부터 사용해 오던 것으로, 금속을 가열·용해시켜 틀에 부어 기물과 조각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주금기법으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선 '조각'과 '주조' 두 가지 기술이 있어야 한다. 그 두 가지 기술에 모두 능한 금속공예 작가는 드물다. 김해에서 금속공예 작업을 하고 있는 변종복(63)은 조각과 주조 둘 다를 해낼 수 있는 흔치 않은 작가이다. 그는 2006년에 노동부가 선정한 대한민국 금속공예 명장이다.

▲ 작업실 조각부에서 작업중인 '가야기마인물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금속공예 명장 변종복.  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

진례면 송현리 850. 이런 곳에 야외조각전시장이 있었던가? 변종복의 작업실 '장인의가 고려' 앞 넓은 잔디밭에는 그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작업실에는 조각부, 연마실 그리고 용광로가 포함된 주조부가 들어서 있는데, 그냥 작업실이라 부르기에는 매우 크다. 공장이라 불러야 할 수준이다. 대형작품을 만들자면 이 정도 크기의 작업실은 되어야 한단다.
 
작업실 옆에는 집이 있다. 1층은 생활공간이고, 2층은 작품 전시장이자 응접실이다. 가을햇살이 따사로운 커다란 창문 옆에 차탁이 놓여져 있다. 고목의 둥치를 잘라 만든 건가 했는데, 찻잔을 내려놓자 경쾌한 금속성이 울렸다. 나이테며, 나무의 결이 실제 원목차탁처럼 보였는데, 변종복 자신이 만든 금속공예작품이란다.
 
열여섯에 주조회사에서 '주경야독'
4년만에 부산기능경기대회 금상


▲ 명장이 만든 작품으로 가득한 전시장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변종복은 1950년 경남 통영군 욕지면 국도에서 태어났다. 눈만 뜨면 망망대해를 마주하며 살던 소년 변종복은 좀 더 큰 세상에서 자신의 인생을 펼쳐보기 위해,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부산으로 갔다. 어머니를 언니라 부르며 따르던 한 아주머니가 부산 영도에 살고 있었다. 변종복은 그 집 이층에서 하숙을 하며 밤에는 중학교를 다녔고, 낮에는 주조 관련 회사인 삼화금속을 다녔다. 열여섯에 주조에 입문한 것이다. 그 회사가 오늘날의 변종복을 만든 첫 번째 단추가 된 셈이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을 하며 열심히 일을 배운 지 4년만인 1970년, 변종복은 부산지방기능경기대회에서 주조부 금상을 받았다. 스무살의 나이에 공장장도 됐다. 웬만한 어려운 작업은 다 해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 남들은 그만하면 성공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조각 배운 뒤 금속주조공예의 길
이탈리아에서 주조·색상부식 배워
조각·주조 두 기술 작품활동 유일


변종복은 어느날부터 조각을 배우기 시작했다. 홍익공예학원 1기생으로 등록해 3개월간 목조각을 열심히 배웠다.
 
"3개월을 배우고 난 뒤 통나무를 구해 비너스 두상을 깎았죠. 주위에서는 3개월 배운 솜씨가 아니다, 타고난 재능이 있다며 놀라워하더군요. 그 조각이 저의 첫 작품인 셈이네요."
 
외길 40년 되던 2006년 명장 영예
현재 '가야기마인물상' 재현 심혈
전수교육장 운영 계획도 차근차근
국보 원본과 똑같은 작품 제작 꿈


변종복의 전시장에는 40여 년 전에 만든 그 비너스상이 소중하게 전시되어 있다. 조각학원을 졸업한 뒤 그는 부산 영도에서 '종원목공예연구소'를 열었다. 조각을 배우러 오는 학생들과 직장인들이 많았다.

▲ 변종복의 작품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강한 쇠로 만든 꽃잎에는 무슨 사연이 녹아있을까.
그렇게 조각도, 주조도 다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변종복은 마침내 금속주조공예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친구의 집 마당 99㎡를 빌려 용광로를 묻고 작업을 시작했다. 김해 송현리로 온 것은 1997년이다. 현재의 자리에서 그는 수많은 작업을 했고, 각종 대회에서 상도 수십 차례 받았다. 외길을 걸은 지 40년이 되던 2006년, 그는 마침내 국가가 인정하는 금속공예 명장 1호가 됐다.
 
"조각을 하는 사람도 많고, 주조를 하는 사람도 많아요. 하지만 두 작업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어요. 어느 한 쪽만 잘 하면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지지요. 금속주조공예의 명장은 지금까지도 저 혼자입니다. 그래서 후진들을 키우고, 전통 금속주조공예를 전승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1990년에는 이탈리아에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조각가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에서 미술주조와 색상 부식과정을 배웠다. 그를 명장으로 만든 건 이런 노력과 열정이다.
 
"작품을 만들기 위해선 먼저 디자인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뒤 조각을 합니다. 점토나 밀랍, 석고 등으로 작품 형태를 만듭니다. 조각 작품이죠. 그 다음 안과 밖의 거푸집을 만듭니다. 흑연도가니에서 1천250도의 쇳물을 녹여 거푸집에 부은 뒤 서너 시간이 지나면 굳어요. 거푸집을 해체한 뒤에는 주물이 들어간 흔적을 제거하고, 부분 용접할 곳을 손보고, 연마를 하죠. 부식작업을 통해 색상도 내구요."
 
그의 작품들 중에는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들도 적지 않다. 부산 동명정보대 중앙분수 한가운데에 세워진 높은 책탑은 그가 만든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라는 의미를 담은 책탑은 책장을 넘길 수 있을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정교하다. 정일근 시인의 독서권장시를 주제로 한 김천시립도서관 광장의 조형물도 그의 작품이다.
 
김해 수릉원 입구에 세워진 허왕후상도 변종복의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을 만들 때 전국을 대상으로 자료를 수집했고, 인제대 이영식 교수를 비롯한 여러 전문가들을 직접 찾아가 자문도 구했다.
 
변종복은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은데, 좋은 작품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그는 현재 인제대에서 개설한 박물관학교를 수강 중이다.
 
"역사 공부는 제 작업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얼마 전 인제대 박물관학교에서 실크로드를 다녀왔는데, 돈황석굴을 비롯해 거기서 본 모든 것에서 영감을 많이 얻고 돌아왔습니다."
 
금속공예인인 그에게 '철의 제국'인 가야의 역사와 문화는 각별할 수밖에 없다. 그는 '가야기마인물상'을 금속주조공예로 재현하고 있는 중이다.
 
▲ 변종복은 후진을 양성하고 전통기법을 전승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하고 있다.
"현재 김해에는 곳곳에 '가야기마인물상'이 세워져 있는데, 조금씩 형태가 다릅니다. 기마무사의 등 뒤에 있는 두 개의 뿔잔이 문제입니다. 작품들마다 기울기가 다 달라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진품을 촬영해 와 계속 반복해 보면서 연구하고, 또한 만들고 있습니다. 국보 275호인 '가야기마인물상'을 진품과 똑같이 재현하겠다는 것이 현재 저의 목표이자 꿈입니다. 꼭 제대로 재현해서 김해시에 기증하려 합니다."
 
금속주조공예 분야의 후배들을 위해 전수교육장을 만드는 것도 그의 중요한 계획 가운데 하나이다. 송현리의 작업실 옆에 이미 400㎡의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변종복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의 무게가 만만치 않음을 잘 알고 있다. 그의 시선은 더 넓은 곳에 닿아 있다. 그는 다짐했다.
 
"우리 김해시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의 국보를 재현한 작품들이 원본과 거리가 멀게 제작된 게 많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금속공예 명장으로서 이러한 상황을 방관하지 않고, 바로잡아나가도록 할 생각입니다." 

>> 변종복
2006년 대한민국 금속공예 명장 선정. 노동부(제06-11호) 외 전국대회에서 다수 수상. 2007년 제1회 경상남도 최고장인 심사위원 위촉, 2008년 김해시 시민의종 건립 추진위원 위촉, 2008~2009년 한국 산업 인력공단 기능 전승자 심사위원 위촉 등 전국 주요 대회 심사위원 위촉. 김해시 가야의거리 가야유물, 진영읍 한마음 선원 중부경남지원 우주탑, 부여 백제문화단지 5층목탑 및 대웅전 풍탁 등 전국 각지에 작품 설치. 현재 '2006 대한민국 명장회 회장', 경남공예 명장장인회 회장, 김해공예협회 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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