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동 고암마을을 벗어나 오른쪽 표지석을 따라 오르면 멀리 낙동강과 양산, 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는 선무암에 다다르게 된다.
지난 두 차례의 상동순례에서 돌아보지 못한 마을이 있다. 서쪽의 우계리와 남쪽의 묵방리다. 먼저 이 마을들을 돌아본 후에 김해 순례의 마지막 발걸음이 될 대동면을 찾아보려 한다. 상동면소재지에서 대포천을 따라 오르며 시내 좌우에 늘어서 있는 우계, 소락, 광재의 3개 마을이 우계리다. 소락교 서쪽 끝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소락2교(2002.6)로 대포천을 건넌다. 오른 우(右)에 시내 계(溪)라는 '냇가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대포천의 위아래가 모두 어수선하다. 서쪽 생림의 나전에서 동쪽 상동의 매리로 가는 도로개설공사가 시간을 끌고 있다.
 
옛 소락교를 건너는데 상류 쪽으로 산자락을 잘라낸 붉은 황토의 도로포장 구간이 보인다. 매리의 동철골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도로공사에 앞선 2010년의 발굴조사에서 6∼7세기의 제철유적이 발견된 곳이다. 원래 우계리고분군으로 알려지던 곳이어서 같은 시기의 석실묘와 공방지도 발견되었다. 신라의 가야통합 후 김해 외곽에서 가야제철의 전통이 이어지던 모습이다. '철의 왕국(國)' 가야를 병합한 신라가 쇠 금(金)에 관리 관(官)을 부쳐 '금관군(郡)'으로 편성하던 역사의 전환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그러나 고대의 유적은 현대의 도로로 바뀌어 가고, 우리 지역사의 중요한 장면은 발굴보고서란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다.
 
상동로375번길로 공장단지를 뚫고 비탈길을 올라 차 2대가 교행하기조차 힘든 좁은 길을 지나면, 갑자기 작은 광장 같은 공간이 열리면서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얼굴을 내민다. 500살이 넘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우계마을의 당산나무다. 매년 1월의 첫 일요일에 당제를 지낸다는데, 무언지 모르게 그냥 대견하고 고마운 마음에 절로 몸뚱이를 쓰다듬는다. 당산나무에 어울리는 마을회관과 옹기종기 모여 앉은 70여 세대가 평화롭고 따뜻한데, 조금 과장하자면 무릉도원이라도 만난 듯하다. 우계리의 본 마을인 우계마을의 원래 모습이 이랬을 것이다. 좀 아래 냇가 쪽이긴 하겠지만, 조선시대 수도경비사령부 격인 수어청(守禦廳)의 물품을 모아 조달하던 낙동강 수로의 창고인 수어창(守禦倉)이 있었다 한다. 당제를 지낼 때 용왕제를 함께 지냈다는 구전은 낙동강의 조운선이 여기까지 올라왔었음을 말하는 모양이다.
 
▲ 광재마을에서 상동로로 내려서면 맞은편 언덕 위에 있는 불조사. 1995년에 세워졌다.
상동로로 내려오니 맞은편에 위 아래로 나뉜 소락마을이 있다. 공구상가 위에 올라앉은 마을회관과 옆에 세워진 '소락2호'의 공단표지판이 오늘의 소락마을을 말해 준다. 동쪽의 새가 숲에 사는 모양이라거나, 북쪽 시내에 반월이 잠기는 모양이라, 자손이 많이 날 명당이라 했다는데, 사람은 줄어가고 공산품을 생산하는 공장만 늘어간다. 장소 소(所)에 즐길 락(樂)이라는데, 그렇게 즐길 게 있을 것같은 동네는 아니다. 다만 윗소락교 서쪽 끝에서 만나는 구천서원(龜川書院)이 구원의 피안처럼 보일 뿐이다. 잘 생긴 소나무 두 그루와 재실 전각들의 기와지붕이 이루는 조화에서 위로를 얻는다. 죽암 허경윤(許景胤, 1573~1646년) 공을 기리는 이 서원은 원래 1822년에 지금의 외동 거인리에서 창건되었다가, 허왕후릉 동편으로 옮겼었는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던 것을 1996년에 여기에 복원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도굴되고 훼손되었던 수로왕릉과 남명 선생의 신산서원(대동면 주동리)을 복구 재건하고, 병자호란 때 통고일향창의여부토로적문(通告一鄕倡義旅赴討虜賊文)이란 격문을 지어 의병이 일어나게 했으며, 평생 학문 예절 효성에 지극해 향리의 본보기가 되었던 죽암 선생을 기리는 서원이다.
 
▲ 중국민항기 희생자를 기리는 신어추모공원탑.
생림의 나전과 경계를 이루는 '마당재' 조금 아래에서 광재마을정류장 쪽으로 들어서, 제법 긴 언덕길을 올라가면 우계리의 가장 위쪽 마을인 광재마을이다. 빛 광(光)에 있을 재(在)라, '빛이 좋은 마을'이다. 상동터널로 들어갈 고가도로가 걸쳐지고 있는 아래쪽은 좀 그렇지만, 석룡산(石龍山, 512m)에 의지해 아늑하게 자리잡은 양지바른 마을이다. 마을회관 앞 팽나무도 좋지만, 노란 은행잎이 빛나는 마을 당산의 커다란 은행나무와 그 아래 주칠기둥과 황토칠 벽에 회색 기와를 얹은 당집의 조화가 한 장의 그림엽서 같다. 사진 찍고 있는 내게 마을회관 앞에 앉아 옆자리 친구를 떠밀면서 "이 할매도 찍어가소!"하고 농담을 청하는 할매들을 뒤로 하고 다시 상동로에 내려선다. 맞은편 언덕 위의 불조사(佛祖寺)는 수로왕릉 참봉을 지냈던 김용채 씨가 장유화상을 기려 1995년에 세운 절이라는데, 대웅전의 현판 글씨를 김해김씨의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썼다고 한다. 불조사 맞은편에는 경남여성경제인협회 정경자 회장이 운영하는 삼전비료(1987)가 오래되었는데, 김해자원봉사회장도 역임했던 정 회장은 지난해 11월 창원에서 제1회 아시아여성기업인축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구천서원 옆 소락로를 따라 신어산 위의 묵방마을로 간다. 신어산에서 발원해 구천서원 앞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트는 대포천 상류를 거슬러 오른다. 윗소락마을의 공장단지를 벗어나면 이내 묵방리가 된다. 팔봉암(1979, 주지 송하스님)과 성화사(1981, 주지 보관스님)를 지나니 길 오른쪽 아래에 경남영묘원(신어공원추모관)이 있다. 2001년에 준공해 6천여의 분묘가 자리하는 사설 묘원인데, 묘원 한쪽에 2002년 4월 15일에 신어산 남쪽 돛대산에 추락했던 중국항공 CA-129편의 사망자를 기리는 추모탑이 2004년 11월에 세워졌다. 비행기 꼬리날개를 형상화한 탑 앞에는 이해인 수녀의 추모시비가 있고, 탑 뒤에는 한국·중국 희생자 명단을 적은 석판들이 나란히 서 있다. 탑 아래에는 가족과 친구들이 아쉽고 그리운 마음을 자필로 적어 붙인 타일들이 있다. "보고 싶은 둘써나! 네가 중국 가는 날 아침 좋아하는 미역국 한 그릇 못 끓여 준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구나"라고 적은 어머니의 글에서 차마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 묵방마을 열녀비.
소락로를 조금 더 오르면 장척로와 만나는 갈래길이 된다. 왼쪽 위로 가면 윗묵방을 지나 장척마을로 가게 되고, 오른쪽 아래로 가면 아래묵방이 된다. 마을회관이 있는 아래묵방을 향하다보면 갈래 길 바로 앞에 '예원찻집'이 있는데, 그 아래 도롯가 계곡에 커다란 글씨의 명문이 새겨진 '열녀바위'가 있다. 신혼의 남편이 나병으로 소록도에 격리 수용되기를 꺼려 해 목을 매자, 문화유씨의 아내가 그 시신을 안고 함께 감나무에 목을 맸다는 얘기다. 1937년에 그런 일이 있었고, 1940년에 명문을 새겼는데, 윗묵방쪽 대나무식당 근처에 있었던 사연인 모양이다. 이런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근처에는 예쁘장한 전원주택이 제법 많이 들어섰고, 제일 위쪽에는 김상자 씨가 운영하는 작은 박물관 '묵서재'도 있다.
 
윗묵방을 넘어 동쪽으로 굽이굽이 2㎞ 정도의 산길을 넘으면 장곡사(1991, 주지 도영스님)가 있고, 조금 더 가면 고갯마루에 장척저수지(1944)가 있는데, 이 언저리에 철제 슬래그가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는 신라대(1990)의 보고가 있다. <김해지리지>(1991)는 장곡사 옆 대밭이라 하고, <상동면사료집>(2011)은 장척저수지 서쪽 70m라 하나 찾지 못하였다. 가야제철유적일 수도 있어 따로 계획을 세워 조사해 보아야 할 유적이다. 저수지 아래에 장척마을회관이 있고, 장척로를 1㎞ 정도 내려가면 여름철에 많은 이들이 찾는 장척계곡이 있다. 신어산 뒤쪽 마을로 어둡기 때문에 먹 묵(墨)에 방위 방(方)이 되었다 하나, 슬래그, 철광석, 도요지 등의 유적분포를 보면, 벌목해서 숯을 굽고, 숯으로 제철하고, 가마에서 자기를 구우며, 그을음을 모아 먹을 만들던 수공업 집단의 마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인동 장씨의 집성촌이었던 장척의 척(尺)이 그렇고, 묵방의 방이 공방(房)이라면 더욱 그럴 듯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해 동쪽의 큰 마을 대동면(大東面)에겐 조금 면목 없는 일이 되었다. 지난번에 마무리 짓지 못한 상동면의 마을들 때문에 새로운 꼭지로 대동순례를 시작하지 못하는 죄송스러움이 있다. 대동 면민들과 <김해뉴스> 독자들의 이해를 구하고 싶다. 지금은 '동(東)쪽의 큰(大) 마을'이 되었지만, 원래는 '동쪽의 아랫마을'이라 하동면(下東面)으로 불리던 것을, 어감이 좋지 않다 하여, 1944년 10월 1일부터 대동면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신어산 줄기에 막혀 시내를 향해 동→서의 이동은 어렵지만, 불암동에서 남북으로 대동면을 관통해 상동으로 넘어가는 지금의 동북로가 1984년에 포장된 뒤부터 통행이 쉽게 되었다. 어찌 보면 동북로란 줄기에 매달린 가지와 잎들의 마을들이 대동면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북쪽에서부터 덕산리(德山里), 월촌리(月村里), 조눌리(鳥訥里), 대감리(大甘里), 괴정리(槐井里), 초정리(草亭里), 예안리(禮安里), 주동리(酒同里), 주중리(酒中里), 수안리(水安里)의 10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부분의 마을들이 신어산을 등지고 낙동강을 앞에 둔 경관을 자랑한다.
 
위쪽 덕산리부터 대동순례를 시작한다. 불암동에서 동북로를 달리기 시작해 상동면의 매리와 경계를 이루는 매리2교 앞에 선다. 다리쪽 건너로 보이는 공장단지의 상동과 지나온 동북로변의 아름다운 풍경의 대조가 너무 확연하다. 대동에만은 건설경기나 공장입주의 바람이 안 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맑은 가을날 동북로를 따라 달리는 도로변의 풍경이 아직은 자연스럽고 깨끗하다. 이미 김해에서는 드물어진 구간이 아닐까 한다. 대동 분들에겐 개발제한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겠지만, 달라진 시대와 달라져야 할 김해를 생각할 때,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의 발전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막 개통한 대동화명대교가 지나는 부산 강서구와의 경계에 대동면이 오래 전에 세워두었던 표지석의 '대동약진(大東躍進)' 의미도 이젠 달라져야 할 때가 왔다.
 
▲ 고암나루. 물금으로 건너다니던 배가 닿을 때 밧줄을 묶었던 '고디바위'가 있었다.
상동의 매리공단을 등지고 남쪽으로 첫걸음을 옮기자 바로 고암마을이 있다. 물금으로 건너다니던 배가 닿을 때, '고딧줄'(밧줄)을 묶었던 '고디바위'가 있어, 고암(高岩)이라 했단다. 지금도 배가 대어 있는 고암나루에는 새로 선착장을 만들 때 깨져나간 것 같은 바위가 있다. 고둥처럼 생겼다고 전해지는 '고디바위'인 모양이다. 건너편 물금의 선착장이 손에 잡힐 듯하다. 낙동강의 폭이 가장 좁은 곳이 아닌지 모르겠다. 고암마을을 벗어나자 바로 오른 쪽에 선무암(仙舞庵)의 표지석이 있다. 대구부산고속도로 밑을 지나 한참을 오르는데, 2년 전에 극락보전이 앉혀졌다고 하니,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다만 학이 춤추는 모양이라는 선무봉에서 낙동강과 양산, 그리고 고속도로를 내려다 보는 경치가 시원하다.
 
▲ 2년 전에 극락보전이 앉혀진 선무암.
덕산으로 넘는 당고개(堂峴)를 향해 오르다 보면 오른쪽 산비탈에 신촌마을이 있다. 40여 가구의 마을이 공장단지로 변해버렸다. 한가운데 작은 녹지 속에 자리한 은빛 첨탑과 붉은 벽돌 고암교회(담임목사 최현규)의 예배당(1980.4)이 고풍스럽다. 위쪽 도로 왼쪽에는 30여 가구의 신암마을에 마을회관과 신암교회가 함께 있다. 당고개를 내려가는 길 오른쪽에는 부산 시민의 상수도를 공급하는 덕산정수장의 기나긴 철조망의 블록담이 늘어서 있다.
 
정수장 뒤편에 솟은 덕산(德山) 아래의 덕산마을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김해에서 양산으로 가는 황산도(黃山道)의 덕산역(驛)과 덕산원(院)이 있었던 곳이다. 김해부의 남역인 삼정동에서 나와 이곳을 지나, 동쪽 월촌의 월당나루에서 양산으로 건너가던 교통의 요지였다. 그래서인지 중앙고속(대구부산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지선이 갈라지는 대동JC가 만들어지게 되었던 모양이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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