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이후부터 지금까지 맛 면을 담당해 온 박상현 객원기자가 약 2개월간 일본 규슈로 음식 취재를 떠났습니다. <김해뉴스>는 박상현 객원기자가 취재한 다양한 일본의 식문화를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당분간은 '김해의 맛'이 아닌 '일본의 맛'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김해의 음식점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을만한 것들도 제법 있을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이해와 관심을 기대합니다.

나라마다 국민들이 일상적으로 즐겨 먹는 대중음식이 있기 마련이다. 무엇이 그 나라의 대중음식인지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대중성은 길거리에 보이는 음식점의 숫자와 비례한다. 이렇게 봤을 때 일본의 대중음식으로는 규동(덮밥), 스시, 우동, 소바(메밀국수), 라멘, 카레 등을 꼽을 수 있다. 우동, 소바, 스시, 규동이 일본의 대중음식으로 자리잡은 것은 에도시대(1603년~1867년)로 거슬러 올라가니 그 역사가 만만찮다. 하지만 지금 일본에서 이들보다 많이 만날 수 있는 것은 뜻밖에도 라멘전문점이다.
 

▲ 반투명의 국물에 얇게 저민 돼지고기와 파를 올린 나가하마라멘은 후쿠오카 남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라멘이고 돼지국밥과 여러모로 닮은 구석이 많다.
라멘이라는 명칭이 정착된 것은 1958년 닛신(日淸)식품이 세계 최초의 인스턴트라면인 '치킨라멘'을 선보이고부터다. 라멘의 어원은 중국 간쑤성 란저우의 면요리인 납면(拉麵 라미엔)이다. 납면은 짜장면처럼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여러번 늘려 가늘게 뽑는 수타면이다. 때문에 중국 면요리의 영향을 받은 점, 정착한 지 100년이 넘는 역사성, '청출어람'이라 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대중성을 확보한 점 등으로 봤을 때, 일본의 라멘은 한국의 짜장면과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라멘은 크게 면·스프(국물)·고명으로 이루어진다. 면은 밀가루와 한께 간수라는 알칼리수 용액을 첨가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때문에 우동과 달리 노란빛을 띠고 아주 약간의 시큼한 향과 알싸한 맛이 난다. 스프에는 다양한 재료가 사용되는데 닭, 돼지뼈, 소뼈, 가츠오부시, 멸치, 말린 고등어, 다시마, 버섯 등을 조합하고 여기에 누린내를 제거하기 위해 파, 마늘, 생강, 당근, 배추 등을 첨가한다. 고명으로는 돼지고기를 간장에 졸인 '차슈', 죽순을 발효시킨 '멘마', 반숙 달걀 등이 일반적이고 그외에도 파, 김, 어묵, 미역, 시금치 등이 사용된다. 이러한 조합을 바탕으로 라멘은 같은 맛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발달했다. 아마도 이러한 개방성이 요리사에게는 창작의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소비자에게는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물론 다양성 속에서도 주된 흐름은 있기 마련이다. 흔히들 일본의 '4대 라멘'으로 쇼유라멘, 시오라멘, 미소라멘, 돈코츠라멘을 꼽는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독특한 점이 발견된다. 쇼유(간장), 시오(소금), 미소(된장)는 각각 양념재료를 기준으로 분류한 데 반해, 돈코츠(돼지뼈)는 스프를 만드는 재료가 중심이다. 이는 일본 라멘에서 돈코츠라멘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각별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 어시장 인부들을 위해 만들어진 라멘답게 간소나가하마야에 남자 손님들이 가득 들어찬 모습.
돼지 등뼈와 사골을 우려낸 돈코츠라멘은 규슈를 대표하는 라멘이다. 후쿠오카현 구르메시에서 시작된 돈코츠라멘은 이후 후쿠오카, 구마모토, 가고시마 등 규슈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돼지 등뼈와 사골을 강한 불에서 오랜 시간 끓여낸 덕에 유백색의 진한 국물이 특징이다. 때문에 밥 대신 면을 말았다는 것만 제외하면 돼지국밥과 매우 유사한 음식이고, 따라서 경상도 사람들에게는 매우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일본인들은 후쿠오카식 돈코츠라멘을 '하카타라멘'이라 부른다. 에도시대 후쿠오카는 시내를 관통하는 나카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은 영주와 사무라이가 거주하던 후쿠오카로, 동쪽은 상업도시로 번성했던 하카타로 나뉘어져 있었다. 1889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두 지역이 후쿠오카로 통합되기는 했지만 과거의 전통과 지역민들의 자존심이 고스란히 남아, 국제공항은 후쿠오카공항인 대신 항구와 중앙역은 각각 하카타항과 하카타역으로 명명하고 있을 정도다.
 
상업의 중심지였던 하카타의 나카강 주변에는 태평양전쟁 직후부터 대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때 등장한 것이 야타이(屋台 포장마차)다. 하카타라멘은 바로 이 포장마차에서부터 시작돼 후쿠오카의 향토음식으로 자리잡았다. 현재 후쿠오카에서 유명한 라멘집의 대부분이 포장마차에서 출발했고, 지금도 많은 포장마차에서 라멘을 팔고 있다.
 
한편, 1955년 하카타에 있던 어시장이 인근의 나가하마라는 지역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와 더불어 어시장 근처에서 라멘을 팔던 포장마차 역시 새로운 어시장 근처로 장소를 옮겼다. 이렇게 옮겨간 포장마차들은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이는 어시장 인부들을 위해 맞춤형 라멘을 개발하게 되니, 이를 '나가하마라멘'이라고 한다. 우선 돼지뼈를 우린 뽀얀 육수를 사용하는 부분에서는 하카타라멘과 차이가 없다. 대신 국수보다 더 가는 면을 아주 살짝만 익혀 말아냈으니, 이는 어시장의 분주함을 고려해 조리 시간을 줄이기 위함이었다. 대신 추가 사리는 원하는만큼 제공했으니, 이는 먹성 좋은 인부들의 양을 고려한 것이다. 고명은 화려함 대신 실속을 추구해 얇게 저민 돼지고기와 채썬 파만 올려 냈으니, 이는 고객들의 주머니 사정을 헤아린 선택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나가하마라멘은 전형적인 노동자 혹은 남성을 위한 음식이 됐다.
 
▲ 돼지육수와 해물육수를 섞고 돼지 등지방과 향미유를 곁들인 잇푸도의 라멘은 농후하면서도 개운한 맛이 일품이다.
포장마차에서 출발해 1955년 어시장 이전 당시부터 나가하마라멘의 전통을 만들어 온 '간소나가하마야(元祖長浜屋)'는 60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변함 없는 맛을 지켜오고 있다. 꾸밈없는 수수한 외형에 돼지 육수의 진한 풍미를 머금고 있는 나가하마야의 라멘은, 먹으면 먹을수록 돼지국밥과 닮은 구석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시장 인부들을 위해 탄생했고 그 전통을 너무 잘 지켜 온 덕인지, 나가하마야에는 지금까지도 남성 고객이 여성 고객보다 절대적으로 많다.
 
돈코츠라멘이 워낙 유명한 도시이다 보니 후쿠오카에는 라멘 하나로 성공 신화를 이룬 식당이 유난히 많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이 '잇푸도(一風堂)'다. 1985년에 창업한 잇푸도는 후쿠오카의 여느 라멘전문점에 비해 출발이 늦은 편이었다. 하지만 창업주인 카와하라 시게미는 돈코츠라멘의 원점에서 출발해 새로운 하카타라멘을 창조하겠다는 신념으로 자기만의 돈코츠라멘을 개발했다. 그 결과 일본 유명 방송국에서 주최한 '라멘왕' 선발 대회에서 네 번이나 우승함으로써 일본 최고의 라멘 장인으로 등극했다. 덕분에 현재는 일본 전국에 65개를 비롯해 뉴욕, 홍콩, 싱가포르, 서울 등 해외에도 지점을 가진 라멘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런 외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라멘전문점이 마케팅에 힘을 쏟는 동안 잇푸도는 오로지 돈코츠라멘의 맛에 집중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잇푸도는 일본에서도 가장 완성도 높은 라멘전문점으로 꼽힌다.
 
개인적으로는 2006년부터 7년째 매년 잇푸도의 라멘을 먹고 있는데, 단 한번도 같은 맛이었던 적이 없다. 이는 일관성이 없어서가 아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혁신을 거듭하기 때문이다. 먹을 때마다 '잇푸도야말로 궁극의 돈코츠 라멘이다!'라고 단언하지만, 그 다음해에 먹으면 또 다른 모습으로 발전해 있다. 이러니 매번 잇푸도의 문턱을 넘을 때면, '이번에는 또 어떤 맛일까?' 하는 기대와 궁금증이 생기기 마련이다.





박상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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