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산 황산나루로 건너가던 월당나루터. 대동면 월촌리에 있으며 낙동강과 대동운하가 만나는 지점이다.
고려~조선시대에는 김해에서 양산으로 가는 길을 황산도(黃山道)라 했다. 김해부의 남역(南驛, 김해시 삼정동)을 나서, 덕산역(德山驛, 대동면 덕산리)을 지나고, 월당나루(대동면 월산리)에서 낙동강을 건너, 양산군의 황산역(黃山驛, 양산시 물금리)까지 가는 길이라 황산도라 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이미 가야와 신라가 군사적으로 충돌하던 전장을 황산진구(黃山津口)라 기록했고, 근처의 낙동강을 황산하(黃山河)라 불렀다. 고대에 황산강과 황산나루가 먼저 있었고, 고려 이후에 역원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황산하를 건너는 길이라 황산도라 부르게 되었던 모양이다. 오늘의 발걸음을 시작하는 대동면 월촌리는 바로 양산의 황산나루로 건너가던 김해의 월당나루가 있었던 곳이다.

▲ 낙동강 제방 대동제 기점.
덕산역이 있었던 덕산삼거리에서 동쪽으로 대구부산고속도로 밑을 지나 월촌리로 간다. '물속의 달 섬'이라 불렸고, 꼭대기에 각성(閣城) 성터가 남아 있다는 각성산(137m)의 남쪽 자락 길을 간다. 다시 만난 고속도로 교각 아래의 표지판에는 문수암이라 쓰여 있다. 1900년대 초에 창건했다는 문수암(文殊庵)도 돌아보고, 대동JC도 한 눈에 내려다 보고 싶었지만, 지정(智正) 주지스님은 염불 중이었고, 조금 더 산을 올랐건만 원하는 그림은 얻지 못하였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낙동강과 비닐하우스가 숲을 이룬 월촌과 평촌마을을 내려다 보고 내려온다.
 
동쪽 끝 막다른 길 같은 곳에 이르러, 길은 오른쪽으로 U턴 하듯 급하게 남쪽으로 꺾여 내려간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동남로를 버리고 맞은편의 좁은 시멘트포장길을 오르자 갑자기 탁 시야가 터진다. 시원한 강바람에 답답했던 가슴이 한 번에 뚫리는 느낌이다. 1931~1933년에 낙동강제방을 쌓아 비로소 안정된 김해평야가 되게 했던 대동제(大東堤)의 시작이고, 7년 3개월의 대역사로 1967년 3월에 1만 3천 정보의 농토를 얻게 된 대동운하(大東運河)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제방 아래쪽에 낙동강과 대동운하가 만나는 곳이 황산도의 월당나루터다. 나루터 조금 안쪽에 서 있는 200살 넘은 팽나무와 푸조나무는 월당나루의 서낭목으로서 또는 월당마을의 정자나무로서 나루와 마을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뒤쪽의 각성산은 '달섬'이었고, 마을과 나루의 이름은 달 월(月), 집 당(堂)의 '달집'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달'음포향(達音浦鄕)이라 불렸다. 강물과 나루에 비치는 달빛이 그렇게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강 건너 산에 보름달이 떠오르고, 그 달빛이 강물 위에 은빛으로 가득할 때, 검은 꼬리를 끌며 황산나루로 가던 배 한 척의 실루엣은 저절로 '달집나루'란 이름을 붙게 했던 모양이다.
 
▲ 문수암. 1900년대 초 창건했다.
월당나루 바로 아래에 월촌리의 본 마을 월촌마을이 있다. 길가 마을회관 옆의 농로를 조금 들어가면 150살이 넘은 든든한 당산나무(팽나무)와 마을사람들이 당제를 지내는 시멘트 벽과 플래스틱 기와의 당집이 있다. 월촌마을 남쪽에는 이름 그대로 평평하기만 한 평촌마을이 있다. 낙동강제방으로 강가의 모래밭이 큰 마을로 변했단다. 1949년 11월 23일에는 마을 전부가 타는 큰 화재를 겪기도 했다는데, 동쪽은 낙동강, 서쪽은 비닐하우스에 둘러싸인 마을이다. 평촌마을에서 1.5㎞ 정도 내려가 아래 하(下), 모래판 사(沙)의 하사마을을 지나고, 많은 철새가 날아들어 '새누리' 또는 '새눌'로 불렸다는 새 조(鳥)의 조눌마을에 이른다. 조눌마을 아래에는 1947년에 새로 생긴 신동(新洞)마을이 있다. 조눌리의 본 마을 조눌마을에는 강 건너 부산의 부곡동으로 건너다니던 조눌나루가 있었지만, 4대강사업으로 도회적인 광장과 운동장으로 바뀌는 통에 옛 나루의 모습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마을회관 앞 제방위에 새로 지어진 정자 아래쪽 쯤 되는 모양이다. 이제 막 세워진 듯한 조눌교회(2007, 담임목사 이성우)가 마을에선 가장 큰 건물인 모양이다.
 
발길을 되돌려 평촌 쪽으로 돌아오다 보면, 서쪽 대감리의 감천마을을 가리키는 커다란 표지판이 보인다. 화살표를 따라 비닐하우스의 바다를 지나, 감천교(2008.2)로 대동운하를 건너면, 달 감(甘), 샘 천(泉)의 감천마을이 있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단샘'이 있어 그렇게 불렀다는데, 야트막한 산을 등지고 남향으로 앉은 참 평화로운 양지마을이다. 마을에 들어서기 전에 저쪽 언덕 위에 있는 벽돌색 예배당(1991.10)과 첨탑에 달린 흰색 십자가가 눈에 들어온다. 1904년 4월부터 예배를 시작했다는 감천교회(담임목사 김성권)의 단아함이 마을과 잘 어울리고 있다. 지난번 답사때 보이지 않았던 '산업단지입주반대'의 플래카드가 마을입구에 내걸려 있다. 여기까지 공장을 세워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 조눌마을 제방 위 정자.
서쪽 대감리의 감내마을로 가는 대동로962번길의 돼지고개를 넘지 않고, 진녹색의 대파들이 싱싱함을 자랑하는 비닐하우스들을 들여다 보며, 북쪽으로 대동운하를 조금 거슬러 오른다. 시루봉과 용머리의 산자락에 소감마을이 있다. 마을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낮은 언덕을 넘어 서쪽으로 1㎞ 정도를 간다. 대구부산고속도로 밑을 지나 대동로에 서니 맞은편에 감내마을로 가는 대동로 983번길이 보이고, 오른 쪽 위로 대감초등학교가 보인다. 1944년 4월 개교의 대감초등학교에서는 47명(남 22)의 학생과 유치원생들이 성위경 교장 이하 23명의 교직원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 '자립형영어체험학교운영' 축하의 플래카드를 보니 학생 감소의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노력이 눈에 선하다. 교문쪽 굵은 벚나무 아래로 보이는 선무산 배경의 교정은 아늑하고 정겨운데 주민과 학동의 감소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살고 싶은 도시 만들기의 첫 번째는 역시 교육인 모양이다.
 
▲ 자전거도로가 된 낙동강 제방.
학교 아래쪽 대동로 983번길에 들어서면 100m도 못 가 커다란 바위 하나를 만나는데, 예전부터 감내리지석묘로 보고되고 있는 고인돌이다. 얼마 전까지는 부추밭이었는데, 어느새 산딸기밭으로 변했다. 잔디 같은 초록색 부추 위에 잘 드러나 보이던 고인돌이었는데, 이제는 키 큰 산딸기 덤불로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비지정 문화재가 겪는 서러움이다. 조금 더 가면 대감리의 본 마을인 감내의 마을회관이 있고, 뒤로 감내저수지까지 군데군데 몇 개의 무리를 이룬 집들이 비교적 여유롭게 앉아 있지만, 저수지 뒤쪽에서는 부산외곽순환고속도로공사가 한창이다. 시내 불암동의 양장골에서부터 여러 개의 터널을 뚫고 또 뚫어, 수안리-주중리-예안리의 산속을 지나 남해고속도로를 대동JC에 곧바로 갖다대는 노선이다. 그래서 마을회관에는 대책위원회의 연락처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나 보다.
 
대동로에 나와 남쪽으로 내려가며 괴정리의 지라마을과 괴정마을을 차례로 만난다. 고속도로 건너에 있는 낚시터의 연못이 마을 앞에 있다 해서 못 지(池)에 땅 라(羅)를 썼고, 회화나무 아래 우물이 있다 해서 회화나무 괴(槐)에 우물 정(井)을 붙였다. 원래는 회화나무 정자의 괴정(槐亭)이었는데, 1914년에 지라리를 합하면서 우물 정의 괴정(槐井)이 되었다. 대동로쪽에 몇 개의 공장이 들어서기는 했지만, 할머니와 손자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 괴정마을 입구의 동구나무 길은 아직도 그림이 된다. 안쪽 언덕 위에는 나이 190살에 키가 20m가 넘는 건장한 팽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그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마을이 제법 안락하다. 지라마을과 괴정마을 사이 고속도로에는 대동나들목과 요금소가 있다.
 
신어산의 동남쪽 끝 봉우리인 백두산(白頭山)이 낙동강으로 뻗어나간 끝자락에 대동면 면소재지의 초정리 원지마을이 있다. 남부역과 덕산역을 연결하던 황산도의 초령원(草嶺院)이 있었던 마을이라, 역원의 원(院)에 터 지(址)를 붙여 마을이름으로 삼았다. 1924년 4월에 대동초등학교의 전신인 하동공립보통학교가 열리고, 1931년 1월에는 조눌리에 있었던 주재소가 옮겨왔으며, 1962년에 대동우체국이 개설되고, 1988년 11월에 아래쪽 초정마을에 있던 면사무소가 옮겨오면서 대동면의 중심마을이 되었다. 면사무소에서는 강인호 면장 이하 15명의 동 직원들이 3천485세대, 7천895명(남 4천134)의 주민들 돌보기에 여념이 없다.
 
면사무소 맞은편의 대동초등학교에서는 98명(남 56)의 학생들과 13명의 유치원생들이 김남조 교장 이하 24명의 교직원들과 뛰놀며 공부하고 있다. 극기훈련으로 백두산에 오르고, 교가로도 백두산을 부르니 애국가의 백두산과 혼동하지 않을까 하는 농담을 떠올리곤 혼자 실소를 금치 못한다.
 
<대동여지도>를 펴 놓고 저기 북쪽의 백두산(2천750m)에서 수직선을 그어내리면 마지막에 만나는 곳이 여기 대동의 백두산(353m)이라 하고, 백두대간의 끝이라고도 한다. 근처 산악인들에게는 가벼운 등산코스로도 잘 알려져 있다는데, 이름 때문에 모 TV프로그램에도 소개되었다지만, 정작 전해지는 이름의 유래에는 그럴 듯한 게 없다. 북쪽의 백두산이야 근처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 '하늘 아래 가장 빛나는 산'으로 빛날 백(白)에 머리 두(頭)를 썼고, '머리가 빛나는 산'은 한민족 태양숭배의 본향과 같이 받들어졌으며, 만주에서 일본열도까지 동아시아를 관통하는 백산(白山)신앙의 본 고장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 대동의 백두산에는 그런 유래가 없다. 오히려 배 방(舫)의 방산(舫山)으로 낙동강하구에 떠 있는 배와 같다는 또 다른 지명유래가 있을 따름이다. 부산에서 서낙동강을 건너오다 보면 삼각형 산으로 두드러져 보여, '배처럼 생긴 산'이란 유래에 고개가 끄덕여질 뿐이다. 혹시 고구려 건국신화의 변신 경쟁 모티프가 가야의 수로왕과 탈해의 그것으로 차용되었고, 일본열도로 건너가 오카야마(岡山)의 키비츠히코와 우라의 변신술 경쟁담으로 남았던 것처럼, 북쪽 백두산의 백산신앙이 일본열도로 건너가기 전에 여기 김해에 머물렀을 때의 흔적이 아닐까 하는 망상만이 머리를 맴돌 뿐이다.
 
▲ 원명사. 김해시의 유일한 보물 묘법연화경이 있다.
'불타는 짜장면'으로 방송에도 여러 번 소개되었다는 대동파출소 앞의 '오복반점'에서 허기를 채우고 다시 남쪽으로 길을 재촉한다. 배를 채운 때문인지 이제야 대동로변 은행나무 가로수의 노란 단풍이 눈에 들어온다. 미니체험동물원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드림주'를 지나자, 금방 세운 듯한 늘푸른전원교회(2007.11, 담임목사 정성재)의 높고 커다란 예배당이 초정마을을 대표하는 듯하다. 초정리의 본 마을 초정마을 회관을 지나 오른쪽으로 원명사를 가리키는 화살표가 보인다. 화살표 반대로 왼쪽 개천가의 농로를 따라 가니 알록달록한 어린이놀이터에 풍성한 그늘을 내리고 있는 세 그루의 거목이 보인다. 270살이 넘은 보호수인 팽나무가 오른쪽에 있고, 그에는 못 미치겠지만 옆의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도 만만치 않은 크기를 자랑하고 있다.
 
▲ 묘법연화경 표지.
초정마을을 헤치고 백두산을 향해 1㎞ 조금 못되는 산길을 오르면, 김해시의 유일한 보물 문화재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소장의 원명사(圓明寺)에 이른다. 묘법연화경은 천태종의 근본 경전으로, 줄여 법화경이라고도 하는데,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경전으로, 화엄경과 함께 우리 불교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목판의 경전을 닥종이에 찍은 것으로, 묘법연화경 4~7권을 1권의 책(가로 16㎝, 세로26.8㎝)으로 묶었다. 조선 태종 5년(1405)에 성달생과 성개 형제가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경한 것을 신문(信文)이 목판에 새겨 찍은 것이란다. 청색 비단의 표지가 남아 있고, 주홍색 바탕 위에 금색으로 제목을 썼다. 1988년 12월 28일에 보물 제961호로 지정되었는데, 1920년대에 불사를 시작해, 1950년대에 원명사가 되었던 절에 어떻게 이런 보물이 소장되었는지를 묻지는 못했지만, 김해의 자랑거리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마침 절에서는 국난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는 자모지장보살상을 옮길 정도로 큰 불사를 벌이고 있었는데, 언젠가 요사채 뒤편에서 1392년 '登福寺(등복사)'라 기록된 기와편이 출토되었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원명사를 내려오는 길에 석양에 더욱 붉어진 가로수들을 바라보다가, '새로 쓰는 김해지리지' 2년 연재의 마무리를 생각한다. 이제 단 한 번의 김해순례가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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