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카소의 시녀들
1896년 15세때 사실적 묘사 '첫영성체'
이듬해 표현력 돋보인 '과학과 자비' 등
초기 작품·어린시절 낙서 등 전시
세계적 거장의 삶과 예술세계 한눈에


라멩코를 보러 갔다. 안달루시아의 오래된 도시 코르도바. 춤을 보러 갔는데, 정작 마음이 빼앗긴 것은 소리였다. 춤, 노래, 기타, 손뼉. 4가지로 구성되었다는 플라멩코는 바닥이 판자인 공연장 타블라오에서 구두 소리와 손가락 퉁기는 소리, 그리고 할레오라 부르는 관중의 추임새 소리와 함께 뒤섞여 숨 막히는 정경

▲ 피카소가 아홉살이던 1890년에 그린 스케치 '투우와 여섯마리의 비둘기'.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에는 이런 스케치가 여러 점 있다.
을 연출해냈다. 플라멩코의 노래를 뜻하는 칸테. 우리의 판소리와 많이 닮은 칸테 CD를 한 장 사서 차에 꼽고 엉터리로 칸테를 따라 흥얼거리며 알함브라 궁전이 있는 그라나다와 그 그라나다를 배경으로 감싸고 있는 시에라네바다 산속의 마을들을 쏘다녔다. 바닷가 말라가에 도착한 것은 해가 질 무렵. 도시 외곽 도로 위에 차를 세우고 이제 막 불을 켜기 시작하는 말라가 시가지를 내려다보았다. 1881년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택시를 탔다. 바르셀로나 라디오에선 축구 중계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소리와 탄성이 뒤범벅된 소음이 쏟아져 나온다. 한참을 참다 못해 한마디 하려는데 택시 기사가 무슨 방송인지 알겠냐고 오히려 되묻는다. 카탈루냐어 방송이란다. 카탈루냐어? 그렇다.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스스로를 스페인 사람이라기보다는 카탈루냐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들이 생각하는 '지역색'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알고 있듯 우여곡절 끝에 카탈루냐는 1979년 정식으로 자치정부를 수립했다. 지금 이곳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제2의 도시 바르셀로나가 아니다. 카탈루냐 자치정부의 중심 카탈루냐의 수도 바르셀로나다. 택시 기사는 그러니까 내게 그것을 자랑삼아 가르쳐주고 싶었던 거다. 짜증과 효과가 동시에 최고인 방법으로.
 
▲ 피카소가 16세 때인 1897년에 그린 '과학과 자비'
피카소 미술관을 찾아간다. 구시가 고딕지역이라 부르는 미로 같은 몬트카다 거리 골목. 그곳은 지중해와 신대륙의 패권을 함께 누렸던 스페인의 화려했던 시기에 지어진 카탈루냐식 고딕풍의 건물들이 남아 있는 곳이다. 좁고 미로 같은 골목길. 1881년 안달루시아의 말라가에서 태어난 피카소는 1894년 미술교사직을 얻은 아버지를 따라 바르셀로나로 옮겨왔다. 그리고 19살 무렵 파리로 떠날 때까지 미로처럼 혼란스럽고 한편으론 고풍스런 이 거리에서 미술학교를 다니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 후 파리와 바르셀로나를 오가며 유럽 미술계의 새로운 공기를 호흡한 가난한 청년 피카소는 청색시대, 장밋빛시대, 그리고 큐비즘의 세계를 거치면서 세계적 거장이 되었다. 1963년 당국은 고딕지역 내의 아퀼라르궁을 피카소를 위해 미술관으로 개조했다. 그리고 피카소는 비록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 정부와 정치적 신념을 달리해 개관식에도 참석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작품들을 기꺼이 고국 스페인 아니 카탈루냐 정부에 기증했다.
 
오늘날 이름 있는 근현대미술관 중에서 피카소 작품이 없는 미술관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피카소 그림은 세계 곳곳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피카소 미술관이라 정식 이름 붙은 미술관도 유럽에만 4군데나 된다. 하지만 바르셀로나 피카소미술관은 특별하다. 그의 이름을 딴 첫번째 미술관이며 그의 초기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는 곳이다. 그의 어린 시절 낙서까지 전시되어 있어 그를 추억하기에 더 없이 좋은 미술관이다.
 
▲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자신의 버전으로 새롭게 해석한 1957년 작 '시녀들'.
구시가지의 좁은 골목에서 지치지 않고 다행히 길 찾기에 성공했다면 이젠 한숨 돌리고 전시관으로 들어갈 차례다. 5채의 대저택을 연결한 미술관이라 해도 그리 크지 않아 1시간 남짓이면 천천히 다 관람할 수 있다. 하지만 오래되고 비좁은 건물이라 방 번호의 표식을 따라가며 순번대로 구경하는 것이 좋다. 1번부터 사진과 자료들의 방을 지나고 나면 저만치 관람객들이 움직이지 않고 모여 있는 곳이 나온다. 166x118cm 제법 큰 크기의 '첫영성체' 앞이다. 첫영성체를 맞은 순백의 소녀와 미사를 관장하는 신부, 그리고 복사를 서는 소년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그림이다.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관람객들이 웅성거리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제목 옆에 새겨진 1896이란 숫자. 1896년, 15살의 피카소가 그린 그림이다. "나는 아이의 그림을 그린 적 없다. 아이일 때부터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렸다"라는 피카소의 말이 실감난다. 놀람은 다음 방에 있는 '과학과 자비'에서 다시 이어진다. 죽음을 앞둔 여인과 그녀를 돌보는 의사와 수녀의 모습을 그린 그림. 사실적인 묘사 뿐만 아니라 16살 답지 않은 사고의 표현력까지 엿보인다는 평을 받는 작품이다. 어린 피카소의 그림을 본 그의 아버지가 팔레트와 물감을 건네주며 자신의 절필을 선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튼 같은 전시실에는 '과학과 자비'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점의 관련 스케치가 함께 전시되어 있다. 조숙한 천재의 탄생 과정을 엿보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 본격 청색시대 직전에 그린 1901년 작 '기다림(Margot)'.
16전시실의 1901년 작 '기다림(Margot)'은 본격적인 청색시대 바로 직전에 그린 그림이다. 이제 막 유럽의 새 기운을 맛본 피카소가 점묘파와 야수파를 어떻게 체화했는지 보여주는 그림이다. 21전시실에 이르면 차츰 입체파(큐비즘) 화가로서의 피카소의 면모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22-23전시실.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이 자랑하는 전시실이다. 두 전시실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라스 메니나스)'을 자신의 버전으로 새롭게 해석한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안달루시아 세비야 출신의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미술을 비로소 서양미술사의 한 페이지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벨라스케스를 좋아했던 피카소는 지금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 중인 벨라스케스의 1656년 작 '시녀들'을 큐비즘으로 재해석하는 대대적 작업에 돌입한다. 정서는 사라지고 형해와 같은 구조물만 남은 작품 앞에서 이해의 길을 잃고 난감해하는 관람객들에게 피카소가 생전에 한 말을 떠올린다. "모든 사람들은 예술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왜 새의 노래는 이해하려 들지 않은가?" 이해하려 애쓰지 말고 그냥 즐기라는 뜻인지, 아무튼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이지만 20세기를 넘어오며 현대 미술의 미래를 앞장서 보여주었던 피카소의 '시녀들'을 보는 동안 관람객은 저마다 제 자신만의 방법으로 피카소로부터 벨라스케스를 이해하거나 혹은 피카소를 통해 자신과 현대 미술과의 거리를 가늠해 보기도 한다.
 
미술관 밖으로 나왔다. 나오다 뒤돌아보니 미술관 명패가 눈에 띈다. 미술관을 뜻하는 스페인어 Museo Picasso가 아니고 카탈루냐어인 Museu다. 이런. 아무튼 람브라스 거리를 따라 남쪽 바다를 향해 걷는다. 저 멀리 높게 세워진 탑 위로 콜럼버스가 보인다. 신대륙 탐험을 마친 콜럼버스가 은금보화를 가지고 이사벨 여왕을 알현하기 위해 돌아왔던 도시. 바르셀로나를 기념하는 탑이다. 플라멩코를 품어낸 정서적인 안달루시아에 비해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카탈루냐를 상징하는 탑이기도 하다. 바다를 본다. 배타적인 지역주의가 아닌 탑 위의 콜럼버스가 손을 뻗어 가리키는 바다처럼 넓게 열려 있는 '지역색'이라면 오히려 이 세상이 조화로운 꽃밭 같은 모습일거라는, 그런 생각을 잠시 했다.





■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 ─────
스페인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미술활동을 한 20세기의 대표적 화가이자 조각가. 대표작으로 큐비즘의 시대를 연 '아비뇽의 처녀들'과 스페인 내전 중 민간인들이 나치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학살당한 사건을 고발한 '게르니카'가 있다.






■ 피카소미술관(Museu Picasso) ─────
· 주소:Montcada 15-23 08003 Barcelona
· 전화:(+34) 93 256 30 00
· 개관시간:10:00~ 20:00, 월요일 휴관.
· 가는 길:지하철 4호선 하우메 1세(Jaume 1)역 하차.
· 특징:질적인 면에서는 대가가 된 후의 작품을 소장한 파리의 피카소미술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이지만 소년기, 청년기를 거치며 남긴 드로잉 등 습작과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를 응용한 연작 등 피카소의 연대기를 보여주는 소중한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http://www.museupicasso.bcn.es




■ 여행팁 - 흥미진진한 도시 바르셀로나 ─────
우리에겐 1992년 올림픽과 황영조의 마라톤 우승으로 기억되는 도시 바르셀로나. 까사밀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구엘 공원 등 건축가 가우디의 흔적을 찾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한 흥미진진한 도시다.
 
구시가지에 위치한 람브라스 거리는 늘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활기찬 쇼핑가. 피카소 미술관 외에도 몬주익 언덕에 위치한 호안미로미술관과 카탈루냐미술관이 유명하다. 음악 애호가들에게는 파블로 카잘스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에피소드로 유명한 도시이기도 하다. 시간이 많다면 행여 또 다른 악보가 바르셀로나의 어느 헌책방에 묻혀 있는지 한번 찬찬히 뒤져볼 일이다.
바르셀로나 관광청
http://www.barcelonaturisme.com/







윤봉한 김해윤봉한치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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