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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칼 없는 영토확보 전쟁 해외농업 개척 선구자⑦ 국제농업개발원 연구소장 이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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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재 2011.01.25 15:06
  • 호수 9
  • 17면
  • 윤현주 편집국장(hohoy@gimhaenews.co.kr)

   
 
김해 출신 중에 러시아 연해주에 어마어마한 농장을 경영하는 사람이 TV에 소개된 적이 있다는 지인의 제보를 받고, 수소문 끝에 이병화(66) 국제농업개발원 연구소장을 찾아냈다. 취재 결과 이 소장이 직접 농장을 운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연해주에 '미친' 사람임에는 틀림 없었다.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는 대뜸 "내 글부터 보고 오라"며 짐짓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가 읽어 보라는 글은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 '발해의 꿈'(http://blog.daum.net/dream-balhae)에 있는 150여 편의 칼럼과 수필류였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이토록 자신만만하단 말인가?
 
다소 언짢은 생각이 들었지만 반나절 꼬박 이 소장의 글을 읽어 봤다. 그의 글을 통독한 후에야 "내 글부터 읽어보라"는 의미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글에는 수많은 '사건·사고'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가족사와 삶의 굴곡들, 그리고 해외 식량기지 확보를 위해 전력투구한 노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아마도 삶의 깊이와 해외농업 개척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하고는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이 소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해외농업 개척의 선구자이다. 재단법인 국제농업개발원(서울시 송파구 가락동) 원장을 20년 넘게 지내며 러시아 연해주에 식량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130회 넘게 그곳을 드나들었다. 그는 스스로 '미친 X'라고 비하했다. 열정이 없었다면 그 일을 해올 수 없었을 것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이리라.
 
그의 아들은 10년 이상 연해주에서 일을 하고 있다. 대를 이은 '연해주 사랑'인 셈이다. 여전히 목소리에 활력이 넘치는 이 소장을 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 요즘 근황은 어떻습니까.
 
▶ 2009년 말 국제농업개발원 원장에서 물러나 연구소장으로 직급을 낮춰 일하고 있습니다. 요새는 정부 용역 사업에 매진하고 있어요. 최근 '붕괴되는 중국 동북 3성 조선족 수전(水田) 집체마을 재생을 위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행정안전부와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의 용역을 수행했습니다(그는 이 용역이 대단한 일이라며 소상하게 설명했다).
 
- 왜 연해주에 빠져들었습니까.
 
▶ 제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해외농업개발 업무와 해외농업 개척자 교육기관의 책임자를 겸임했었어요. 이후 1989년 우연찮게 옛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농업경제자문관으로 발탁되어 소련 전역을 탐방하게 되면서 연해주를 가보게 되었습니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던 한인들이 그곳에서 벼농사와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우리민족의 아픈 역사를 보게 된 것입니다.
 
사실 연해주는 해외식량기지를 구축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술과 북한의 노동력, 러시아의 기반시설이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어요. 남북한을 관통하는 철도 수송이 가능하고 기후적으로 벼농사와 콩·밀·감자 재배의 최적지입니다. 김대중 정권 때는 이곳에서 생산한 벼를 싣고 28차례나 북한에 보낸 적이 있습니다. 내가 직접 갔었지요.
 
이명박 대통령도 연해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2009년부터 연해주에 진출한 영농기업에 25년 장기상환 융보조금 자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 아드님은 연해주에서 무슨 일을 합니까.
 
▶ 해외식량기지 구축은 사실상 총칼없이 싸우는 영토확보 전쟁입니다. 이것은 정권과 관계없이 많은 세월 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를 이은 '선각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들(이창준·37)은 한국과 러시아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했고 현지 법대를 나와 국제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러시아 전문가입니다. 지금은 한국의 영농 진출자들을 위한 컨설팅 업무를 보고 있어요. 최근 러시아 정부 인사들에게 내가 해오던 업무를 완전히 인수인계 해줬습니다. 아직 미혼입니다. 중매 좀 해 주세요(웃음).
 
- 고향 김해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 내 삶에서 여러가지 의미가 있죠. 태어난 삼방동은 과거 재령 이씨 집성촌이었습니다. 김해시가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운 네 분의 의병장을 사충단(四忠壇) 사당에서 제사 지내고 있는데, 이 중 한 분이 저의 직계 조상인 이대형 할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백색 농업혁명(비닐하우스)의 선구자이자 선진 농민이었습니다. 원예농업 발상지인 김해에서 태어난 것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고향에는 아직도 2살 아래 동생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정책자금을 한 푼도 받지 않고도 서양채소를 재배하여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우리 집안은 타고난 농사군 체질인가 봐요.
 
어린 시절 어머니는 34살의 꽃다운 나이에 돌아가셨고, 돌 지난 남동생과 4살짜리 여동생도 함께 데려갔습니다. 가슴아픈 기억이 많습니다.
 
- <김해뉴스> 창간을 알고 계셨는지요.
 
▶ 그럼요. 고향에 훌륭한 매체가 생긴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김해는 경남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로 성장했고, 대통령 국무총리 영부인 장관 등 수많은 정치 지도자들을 배출한 고장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언론다운 언론이 없었잖아요. <김해뉴스>의 향후 행보를 주시할 겁니다. 김해를 더욱 사랑하고 발전을 견인하는 정론지로 뿌리내리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이병화 소장은 ─────
1945년 김해시 삼방동에서 태어나 활천초등학교와 김해중학교를 졸업했다. 김해농고를 잠시 다니다 그만두고 군 제대 후 박정희 대통령 경제특보실 농업생산 담당관을 7년간 지냈다. 신갈농민학교 교장, 문교부 정책자문위원 및 농업계 학생 지도위원, 경찰대학 및 육군행정학교 외래교수, 국제농업개발원 원장, 월간 '상업농경영' 및 계간 '기계화농업' 발행인 등을 역임했다. 러시아 국립 프리모스키 농업아카데미 농업경영학 박사와 국립 하바로브스크 기술대학 경제학 박사(독또르) 학위를 받기도 했다. 학회 활동과 외국정부 자문역 등 다방면에 왕성한 활동을 했다. 저서·논문·정부정책 제안서 등도 다수. 특히 차가버섯 관련 발명특허와 서비스 등록증, 상표등록증 등을 소유한 이색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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