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사람들이 품앗이를 하며 모내기를 하는 봄, 흐뭇한 마음으로 잘 여문 나락을 베는 가을, 그리고 추석과 설, 정월대보름에 마을 전체를 흥겹게 들썩이게 했던 농악놀이를 기억하시는지. 농악대가 징, 꽹과리, 소고, 장구를 치며 길굿(길놀이)를 하면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판을 벌여 판굿(공연)을 시작하면 농악대를 둘러싼 사람들은 어깨춤이 절로 났다. 상모놀이가 시작되면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머리에 쓴 상모에 달린 긴 띠가 재인의 빠른 고갯짓과 몸짓에 따라 하늘 가득 땅 가득 수많은 원을 그려내면,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상모놀이 중에서도 12발(발은 어른이 두 팔을 양옆으로 펴서 벌렸을 때 한쪽 손끝에서 다른 쪽 손끝까지의 길이. 12발은 약 18m) 상모를 돌리는 것을 '채상' 이라고 한다. 김해 부원동에서 '가야민속예술단'을 이끌며 국악풍물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이금조(68)는 12발 상모 명인 예능보유자이다.

▲ 이금조 12발 상모 명인은 5살때부터 지금까지 풍물사랑, 상모사랑의 삶을 살아왔다. 그의 공연을 보지 못한 <김해뉴스> 독자들을 위해 즉석에서 상모놀이를 하며 사진촬영을 허락했다. 김병찬 기자 kbc@gimhaenews.co.kr

일곱살 즈음에 놀이판 따라나서
스승 문백윤·황일백으로부터 진주삼천포농악 배우고 익혀
리틀엔젤스 타악지도·안무강사
국악예고서 김덕수 가르치기도


'이금조 국악풍물연구소'는 부원동 839의 8, 프리머스 영화관 건물 맞은편 '우리약국'의 지하에 있다. 진례에서 연구소를 연 지 20여 년만인 지난 3월에 부원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계단을 내려가 연구소로 들어서니 입구에 북, 장구 등 풍물악기가 가지런히 정리정돈돼 있었다. 안쪽에는 연수생들이 직접 밥을 해먹을 수 있는 주방공간이 있었다. 그릇과 접시의 수로 보아 연수생들이 밀려들 때면 보통 인원이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커피며 차는 종류대로 골라먹을 수 있도록 준비돼 있었다. 방학 때면 전국에서 모여들어 숙식을 하는 연수생들을 위한 침구도 연구소 안쪽 방에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이금조는 1945년 7월 14일 경남 하동군 횡천면 학리에서 태어났다. 전주 이씨들만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다섯 살 무렵에 부모와 함께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로 이사를 했다. 그는 이때 농악을 접한 뒤 운명처럼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멀리서 풍물소리만 들리면, 가지고 놀던 장난감도, 먹고 있던 음식도 내던지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용산리에서는 고모부뻘 되는 아재가 꽹과리를 치는 상쇠였다. 농악대가 한참 풍물놀이를 하다가 상모를 벗어놓고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켤 때, 어린 이금조는 몰래 아재의 상모를 훔쳐 작은 머리에 써보곤 했다. 아재가 혼내고, 어른들이 말려도 소용없었다. 풍물소리만 들리면 달려 나가고, 상모 훔쳐 쓰고, 악기 만져보고 두드려 보고, 아무리 쫓아내도 끝까지 놀이판을 따라다녔다. 상모를 쓰고 흉내를 낸답시고 빙빙 돌다가 나자빠지기도 일쑤였다. 집안 어른들은 "전주 이씨 양반 집안에 사당패 나게 생겼다"며 야단이었지만, 한 번 넋을 빼앗겨 버린 이금조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어린 아이가 흥에 겨워 상모를 돌리는 걸 보며 "그 놈 참! 하면 되겠는 걸!" 하면서 감탄하고야 말았다.
 
일곱 살 즈음에 이금조는 본격적으로 놀이판을 따라나섰다. "작은 깃발을 하나 들고, 일행 중에서 제일 앞에서 우쭐대며 걸어갔지요. 좋다고 춤추면서요. 내가 대장이라고!" 이금조는 옛 일을 더듬으면서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 너머로 일곱 살 어린 소년의 자랑스러움이 얼핏 보였다.
 
이금조는 9살 무렵, 진주로 한 번 더 이사를 갔다. 부친이 비단을 짜는 회사인 동양염직의 총감독으로 직장을 옮겼기 때문이다. 용산리에서 풍물을 익힌 이금조는 진주 천전초등학교 시절 '진주삼천포농악'을 배웠다. 문백윤(1910~1981. 삼천포 농악의 이름난 명상쇠)을 중심으로 한 삼천포농악과 황일백(1903∼1976. 진주 농악의 이름난 명상쇠)을 중심으로 한 진주농악은 자연스럽게 합쳐져, 농악에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1966년에 문화재(중요무형문화재 제11-가호)로 지정됐다. 이금조는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 문백윤과 황일백에게서 농악을 배웠다.
 
이금조의 삶은, 어쩌면 다른 일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는 지도 모른다. 1965년 진주 사범공인학교를 수료하고 이듬해부터 진주세무서에서 근무했다. 그러던 중 문백윤의 소개로 리틀엔젤스(1962년 창단된 민속예술단) 무용단의 타악지도와 안무강사를 맡으면서 세무서를 그만두고 1969년 서울로 올라갔다. "제가 우리 풍물에서 우리 소리에서 조금만 멀어지면 사람들이 가만 안 뒀어요. 서울 생활이 시작되면서 저도 전국적으로 좀 많이 알려졌죠."
 
이금조는 서울 국악예술학교 교사와, 서울대 농과대학 타악강사로 활동했다. 국악예고에서는 고 2였던 김덕수를 가르치기도 했다. 당시 서울에서는 이금조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영남과 호남을 두루 다니면서 농악과 상모를 익힌 이금조는, 서울·경기지방 전통예술인들 눈에는 한마디로 '놀람' 그 자체였다. 이금조가 12발 상모를 돌리면서 자반뒤집기(반쯤 옆으로 쓰러져서 몸을 180도씩 뒤집으면서 무대를 한 바퀴 도는 것)를 하자 "저런 기술도 있었어?"라는 반응을 보였단다. 요즘은 상모놀이를 할 때 으레 자반뒤집기를 하지만, 그건 사실 이금조에 의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간 것이다.
 
영남제(영남지방 류)와 호남제에 익숙한 이금조도 경기제의 음악을 들으면서 "이런 음악이 있다니"하며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요새 사람들은 의아하겠지만, 당시만 해도 교류가 제대로 안 됐고, 우리 문화와 음악이 제대로 정리가 안 됐던 것이지요. 당시 국악·풍물·연희판에서 활동하던 전통예술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놀라고, 서로에게 배우곤 했지요."
 
그의 서울 생활은 낮에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공연을 다니느라 쉴 새 없이 바빴다. 외국공연도 다녀와야 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스스로도 힘이 들어 "나이 50이 되면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가족에게 약속을 했다.
 
진례 연구소 20여년 생활 접고
올 초 부원동 국악풍물연구소 차려
"내가 가진 모든 것 다 전수할 것"


그는 49살에 서울 생활을 접고 진주 진성면에 자리를 잡았다. 4만 9천500㎡(1만 5천 평) 정도의 단감농장도 마련했다. 과수원 일도 배우고, 일하는 사람도 구했다. 그렇게 상모를 그만 돌리고 단감농사를 지을 계획이었는데 그건 이금조의 바람에 불과했다. "잘 왔다, 오기를 기다렸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면서… 이번에도 사람들이 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진주시립국악학교에서 다시 연수를 시작했죠. 의령, 김해와도 연결이 돼 제자들도 많이 가르쳤죠. 공연도 많이 했구요. 20년 전에 진례로 터를 옮겼습니다. 지난 3월에는 부원동으로 옮겼지요."
 
그는 김해의 각급 학교에서 풍물을 가르치는 한편,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수도 계속하고 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김해와 경남의 각 지역 그리고 부산을 오가는 숨 쉴 틈 없는 일정이다. 그나마 일요일 하루가 쉴 수 있는 날인데, 이 날도 공연이 있으면 쉬지 못한다. 이번 겨울에도 김해로 연수생들이 대거 몰려온다. 학생들은 안명초등에서, 일반인들은 부원동 연구소에서 이금조의 연수를 받는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가 전립을 갖춰 입고 상모를 썼다. 고갯짓 한 번에 12발 띠가 공간을 가르며 연구실 안을 가득 채웠다. 농악대가 길굿을 하면서 사람을 모으고, 장구며 소고를 든 사람이 차례대로 나와 벌이는 판굿 중에서도 상모놀이는 가장 주목받는 하이라이트이다. 긴 띠가 공간을 가르고 천정과 바닥을 치는 소리, 현란하게 그려지는 수많은 원, 재인의 빠른 몸짓이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상모가 왜 놀이판의 꽃인지를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까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후배와 제자들에게 다 주고 떠날 생각입니다." 즉석 공연을 마친 그가 말했다. 이번 겨울, 부원동 거리의 지하 연구소에서는 이금조제 전통풍물과 상모놀이가 후대에 전수된다. 내년에도 또 그 다음해에도.

>> 이금조
1945년 경남 하동 출생. 1969년 리틀엔젤스 무용단 타악지도 및 안무강사, 1970년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교사·서울대 농과대학 강사 역임. 1975년부터 47개국 3년간 순회 공연. 1987년 미국 독립기념 200주년 행사, 88서울올림픽 상모 쓴 호돌이 홍보. 대한민국 특사(특사번호 25981-4255) 자격으로 워싱턴 광장 공연. 1987년 김덕수 사물놀이 지도위원 및 세계 사물놀이 겨루기 심사위원, 그 외 심사위원 다수. 2000년 풍물축제 한마당 명인전 출연(국립국악원) 외 명인전 공연 다수. 국제 문화협회 총재 감사장 및 예술교육기능장 외 기능장·감사장 수여 다수. 현재 김해생명과학고 외 여러 학교에 출강. 목포 세한대학교 전통연희학과 겸임교수, ㈔의령예술촌 부촌장, ㈔의령예술촌 민속예술단장, 이금조 국악연구원 원장. 기야민속예술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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