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라안산 정상부. 찬바람을 맞고 선 소나무 몇 그루와 나그네를 배려한 듯한 의자 하나가 겨울 햇살을 받아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12월이 중순으로 접어들었다. 한 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다. 무릇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살(矢)'같이 빠른 한 해가 벌써 그 뒷모습을 보이며 일몰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2012년.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다.
 
이번 산행은 지나간 1년을 되돌아보면서, 대동의 자연마을을 감싸고 있는 '편안한 산(安山)'을 가볍게 걸어보기로 한다. 어미닭이 병아리 품듯, 감천마을과 소감마을을 포근하게 안고 있는 지라안산(池羅安山) 산행이다. 소감마을을 들머리로 하여 대나무숲길, 공동묘지, 감천마을 고개로 내려와 지라안산 정상, 차나무 밭을 지나 삼각점 봉우리, 괴정마을로 하산하는 코스다.

대동공영버스를 타고 끄덕끄덕 마산부락을 지나 대동벌 사이 논두렁길을 덜컹이며 간다. 그러는 사이 안막, 괴정, 지나, 감천마을 거쳐 감내 정류소에 도착한다. 달디 단 내(川)가 있어 지어진 듯한데, 우리말이 입에 되뇔수록 달디 달다.
 
▲ 지라안산 전경
감내에서 내려 오른쪽 중앙고속도로 굴다리를 향해 간다. 찬바람이 휘익~ 사람 몸을 마구 흔들어 놓고 지나간다. 전날 폭설이 내리더니 추위가 제법 매섭다. 그 와중에도 강아지 한 마리 콩콩 짖어대고, 대동농장 축사에서는 송아지가 '음매~음매에~' 제 어미를 찾는다.
 
굴다리를 건너니 잘 생긴 소나무 두 그루가 나그네를 반긴다. 서로 사이좋게 어깨동무 하고 노년을 의지하고 있다. 산딸기 밭에는 산딸기 이파리가 단풍이 져 밭이 온통 짙붉다. 산을 끼고 녹지 않은 눈길 위로, 사람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지나온 한 해를 걸어오며 '뽀드득 뽀드득' 그 찍힌 발자국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어느 누구의 인생길에, 우리는 서로의 작은 발자국 하나라도 남겼을까?
 
갈대가 역광의 햇빛을 받아 흔들린다. 해는 벌써 뉘엿뉘엿 백두산 능선 쪽으로 바쁘게 달려가고, 모든 것들이 해를 넘기는 외로움에 쓸쓸함이 잔뜩 묻었다. 휘적휘적 마을을 향해 걷다보니 어느새 소감마을에 도착한다.
 
▲ 지라안산 들머리 부근에서 본 부산 금정산. 소감마을 앞으로 시원하게 조망된다.
마을 앞으로 부산의 진산 금정산이 시원하게 조망이 된다. 삿갓 모양의 고당봉과 파류봉, 상계봉 능선까지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서있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니 집집마다 김장을 한다고 바쁘다. 사과나무에는 아직 사과가 달려있고, 치자나무에는 노란 치자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응달진 길에는 녹지 않은 눈이 하얗다. 오르막 골목을 오르다 보니 '길없슴' 표지가 보이고 그 왼쪽으로 산길이 나있다.
 
밭을 끼고 돌면 대나무 숲이 나오고, 그 숲으로 산길이 시작된다. 그 길 따라 얼마간 울창한 대나무 터널길이 나그네를 반긴다. 초입부터 기분 좋은 대나무숲길로 시작하는 것이다. 겨울바람이 잠깐잠깐씩 숲으로 내달리며 '서걱서걱' 댓잎소리를 내고 있다.
 
▲ 대나무밭
대숲을 지나자 따뜻한 양지 녘에 평안하게 누운 유택들이 보인다. 남향의 햇볕을 받아 더 없이 평화로워 보인다. 공동묘지를 끼고 오른다. 뒤로는 계속 금정산 능선이 나그네의 산행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다.
 
응달의 무덤가에는 소담스레 눈이 덮여있고, 눈 사이로 흰색 구절초 꽃이 꿋꿋하게 추위와 맞서고 있다. 때늦은 개화이기도 하지만 때 이른 한파에 힘겨울 만한데, 꽃 색깔은 눈보다 더 하얗고 선명하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해는 서쪽으로 이울고, 눈에 젖은 낙엽은 물을 머금은 채로 푹신푹신한 길을 내어준다. 끊길 듯 말 듯 무덤 사이로 산길은 계속된다. 호젓한 능선을 사색하듯 명상하듯 걷는다. 낮은 산봉우리 하나 넘고 또 다른 봉우리와 연결되는 안부에 닿는다. 배추밭의 배추가 시푸르게 싱싱하다. 무밭의 무청도 질세라 청청하다.
 
오르면서 보니 훼손된 파묘(破墓)가 보이기 시작한다. 의아해서 살펴봤더니, '부산외곽순환고속도로' 편입으로 모두 이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영원한 영혼의 안식처 '유택(幽宅)'이, 이승의 사람들을 위해 노곤한 몸을 일으켜 이사를 한 것이다. 이렇게 또 하나의 산이 과거 속으로 사라진다. 그렇게 아득한 마음으로, 아득하게 내리막길을 내리는 것이다.
 
▲ 지라안산 품으로 하얗게 길을 낸 들머리 눈길.
길을 다 내리니 도로가 나온다. 감천마을 고갯길이다. 지라안산에 포옥 파묻혀 있는 감천마을은, '감천(甘泉)' 즉 '단 샘'이 있는 마을이다. 여름에는 차갑고 겨울에는 따뜻한 샘물이 있어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마을 이름처럼 따뜻하고도 평화로움을 가진 마을이다.
 
고갯길을 건너 지라안산 정상 봉우리 쪽으로 향한다. 언덕 위의 외딴집 뒤로 산길이 나있다. 초입부터 노송들 사이로 편안한 길은 계속되고, 어느 정도 오르자 밤나무 군락이 펼쳐진다. 밤나무 낙엽과 밤송이들이 어지러이 길 위로 뒹군다. 모든 밤나무들이 옷을 벗고 햇살을 등에 진 채 선명하다. 보는 이의 마음조차 명료해진다.
 
탱자 울타리가 길옆으로 길을 따른다. 곳곳에 탱자 열매가 나무 끝에 매달려 노랗다. 가는 걸음마다 길섶에 떨어진 노란 탱자가 발길에 차인다.
 
산을 오를수록 눈은 군데군데 쌓여 있다. 정상을 앞두고 오르막은 점점 가파르게 길을 내고 있다. 경사길 따라 잠시 오르자 봉긋한 봉분 모양의 지라안산(池羅安山 129m) 정상에 다다른다. 이름으로 짐작컨대 지라마을을 보호하는 안산(安山) 역할을 하는 듯하다.
 
둥글게 봉긋한 정상에는 소나무 몇 그루 찬바람 맞고 서 있고, 소나무 기둥에 의자 하나 편히 기댄 채 놓여 있다. 나그네들 잠시라도 쉬어가라는 배려가 따뜻하다. 전망은 소나무 숲에 가려 시원하지는 않다. 그러나 가지 사이사이로 대동벌과 금정산, 백두산 능선이 언뜻언뜻 비친다.
 
정상에서 뜨거운 커피를 한 잔 해서일까? 내리는 길이 푸근하고 느긋하다. 소나무 숲으로 이우는 햇살을 맞으며 솔가리를 푹신하게 밟는 기분이 그저 그만이다. 계속 길을 내리다 보니 말안장 같은 편안한 능선과 고갯길이 나오고, 다시 다음 봉우리의 오르막이 시작된다.
 
▲ 하산길에 만난 차나무밭. 살짝살짝 코끝을 스치는 차나무 향이 싱그럽다.
오르막 초입에서 만나는 차나무 밭. 이파리에 눈이 내려 그 푸른빛이 더욱 선명하다. 차나무 꽃이 갑작스런 서설에 된서리를 맞았다. 그래도 살짝살짝 차나무 향이 코끝을 스친다. 그 차나무 길을 그윽하게 걷는다. 오른쪽으로 백두산 능선과 정상이 보인다. 이 능선이 동신어산과 만나 낙남정맥으로 흐르는 것이다. 오르는 길 뒤로는 지라안산 정상부가 동그마니 서 있는 것을 본다.
 
곧이어 삼각점봉. 해발 100m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곳에 와서야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울음소리가 유별난 새소리를 따라 내리막이 급해진다. 군데군데 쓰러진 나무에 눈이 함박 쌓였다. 죽은 몸에 새로운 삶이 앉은 듯, 나뭇가지가 환하게 빛을 낸다.
 
잠시의 오르막 뒤에 마지막 봉우리를 거쳐 다시 급박한 내림세가 계속된다. 일몰 때 해 넘어가듯, 급한 발걸음으로 길이 쏟아진다. 깊숙하다. 한 해의 끝이 지듯이 길도 깊이깊이 내리며 진다. 멀리 대동벌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고, 경운기 소리가 시끄럽다. 어디선가 염소 한 마리 '매에~매에~' 운다.
 
산을 내리자 영동천 지류가 보이고, 제방을 건너서 농로를 따라 터벅터벅 괴정마을로 향한다. 미나리꽝에는 미나리 잎들이 파랗고, 백두산의 부드러운 능선 위로는 일몰의 구름이 빨갛게 흘러간다. 낙동강 너머 금정산 줄기가 길게 뻗어 선명하고, 멀리 백양산에는 골골마다 눈이 쌓여 하얗다.
 
중앙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은 저물녘의 길 따라 귀가를 서두르고 있다. 갈대꽃에 머물다가 가는 바람이 제 가는 길 수신호하며 길을 간다. 그렇게 모두들 이곳에서 저곳으로 떠나는 시간이다. 그 길 위에 나그네의 한 해도 기울어 가는 것이다.
 
그래, 인생은 괴정교 굴다리를 건너가는 일이다. 산에서 내려와, 다시 사람 사는 마을에서 새로이 시작하는 일, 사람과 살 부비고, 꿈을 좇아 열심히 살아가는 일, 매번 새로운 희망을 가지는 일… 그렇게 인생은 다시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굴다리 같은 길목이리라.
 
사람 마을로 돌아오는 길, 눈발이 흩날린다. 모든 것 화해하고 용서하라고, 슬픔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 놓으라고 눈이 내린다. 펄펄~ 안타까운 것, 미련이 남는 것들, 모두 덮어두라고, 나그네의 어깨 위를 다독이며 다독이며 눈이 내린다. 그렇게 세상은 눈과 더불어 순결해지고 있는 것이리라.






최원준 시인/ 문화공간 '守怡齊수이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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