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산(盆山)에서 내려다 본 김해시 전경. 멀리 굽이굽이 700리를 달려온 낙동강이 보이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다대포 바다를 향해, 그 보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한 줄기는 서쪽으로 녹산, 가덕도를 향해 가만히 흐르고 있다. 다시, 그 보다 앞쪽으로 보이는 초록의 들판은 저 옛날 가락국 시대에는 바다였다고 하니, 참으로 경이로우면서 한편으로는 김해가 가락국 시대에 왜 '해상 왕국'이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사진제공=김해시

김해는 낙동강이 주는 넉넉함과 바다가 열어주는 국제 지향적 역동성의 바탕 위에 자리 잡았다. 이 자리에서 가야 시대를 열고 강력한 맹주로 위용을 떨치던 가락국(駕洛國)은 김해의 상징이 되었다. 김해와 가락국의 관계는 김해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외지인들에게 있어서도 1:1의 공식처럼 받아들여졌다. 이는 경주(慶州)가 신라와, 공주(公州)가 백제와, 평양(平壤)이 고구려와 1:1로 성립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조에는 "본디 가락국인데, 가야(伽倻)라고도 한다.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시조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이며, 구형왕(仇衡王, 仇亥王, 仇充王, 仇衝王:521∼532)까지 무릇 10대 491년이다. 구형왕이 신라 법흥왕(法興王:514∼540)에게 항복하자 법흥왕은 손님을 맞이하는 예로써 대우하였다. 그 나라를 읍(邑)으로 삼고 금관군이라 하였는데, 문무왕(文武王:661∼681)이 금관 소경(小京)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742∼765)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작은 서울(小京)로 삼았다"고 기록돼 있다. 김해는 500년의 긴 세월 가락국의 중심이었으며, 이후 신라 때까지도 작은 서울로서 자리매김하였다. 이러한 역사와 함께 김해의 강과 바다, 산이 이루어내는 조화는 어느 도시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
 
고려 후기의 민사평(閔思平:1295∼1359)은 김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신령스러운 왕 첫 자취는 흘간산 같았고
하늘은 영험한 짝에게 새 관리 모으게 했지
한 무제가 요대에서 만남과 거의 한가지
무협에서 겪은 초 양왕의 기쁨과 달랐으랴
천 년의 외로운 성 가락이라 하는구나
한바탕 성대하였던 일 괴안과 같아라
쓸쓸히 남은 일곱 점 산 늘어선 비취빛
노니는 이들과 함께 머물러 가리켜 본다 
肇跡神王類紇干 (조적신왕류흘간) 
天敎靈匹會新官 (천교령필회신관)
頗同漢武瑤臺遇 (파동한무요대우)
何異楚襄巫峽歡 (하이초양무협환)
千載孤城稱駕洛 (천재고성칭가락)
一番盛事似槐安 (일번성사사괴안)
空餘七點山橫翠 (공여칠점산횡취)
留與游人指點看 (류여유인지점간)
   
<민사평, 金海(김해)>  


중국 고사를 인용한 한시로, 첫 구절의 흘간(紇干)은 흘진산(紇眞山)이라고도 하는데, 이 산은 여름에도 늘 눈이 쌓여 있다고 한다. 당(唐)나라 때 "흘진산 꼭대기에 참새 한 마리 죽었네. 어찌 날아가서 즐겁게 살지 못했나(紇眞山頭凍死雀 何不飛去生處樂)"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당시의 황제로 망국의 군주였던 소종(昭宗)이 이 노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소종은 환관들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후량(後梁)의 건국자 주전충(朱全忠)에게 시해된 황제다. 이 고사는 어려운 시기를 겪는 고통과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세 번째 구절의 요대(瑤臺)는 옥으로 장식한 누대로 신선이 거처하는 곳이다. 한무내전(漢武內傳)에 의하면 한 무제(武帝:B.C 141~87)가 신선 서왕모(西王母)를 만나려고 빌었더니, 칠월 칠석에 대단히 아름다운 모습의 서왕모가 아홉 빛깔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이곳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네 번째 구절의 무협(巫峽)은 호북성(湖北省)에 있는 골짜기다. 초(楚) 양왕(襄王)이 고당(高唐)에서 놀다가 낮잠을 잤다. 꿈에 한 부인이 와서 '저는 무산(巫山)의 여자로서 고당을 돌아다니다가 왕께서 이곳에 계신다는 말을 듣고 왔으니 잠자리를 같이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하룻밤을 같이 자고 나서 아침에 떠나며 그 부인은 '저는 무산의 양지 쪽 높은 언덕에 사는데, 매일 아침이면 구름이 되었다가 저녁에는 비가 됩니다' 라고 하였는데, 그 말처럼 되기에 사당을 지어 조운(朝雲)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여섯 번째 구절의 괴안(槐安)은 수향(睡鄕) 가운데 하나다. 수향은 정신이 혼미하고 황홀해져서 온갖 생각들을 전부 잊어버리는 곳이다. 동쪽에는 화서(華胥), 남쪽에는 괴안(槐安), 서쪽에는 나부(羅浮)가 있고, 북쪽에는 황제(黃帝)가 있다고 한다.
 
시인은 김수로왕이 혼란하고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많은 백성들을 고통에서 구해내었던 사실을 흘간산의 고사에, 왕비인 허황옥과의 만남과 사랑을 요대와 무협의 고사에 비기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환상 같은 일이 일어났던 가락을 괴안과 같은 이상향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곱 번째 구절의 칠점산(七點山)은 현재는 김해공항 안에 흔적만 남은 일곱 개 봉우리로서 동국여지승람 등의 지리지에도 반드시 소개되며, 시인들이 가장 극찬한 김해의 대표적 경관이다. 칠점산과 그것을 읊은 시는 뒤에 소개한다.
 
민사평은 김해의 상징인 가락국을 열고 허왕후와 함께 새로운 시대를 이루어낸 김수로왕의 역사와 김해의 대표적 풍광 칠점산을 보여주어 김해의 역사와 풍광을 한 수의 시 속에서 모두 표현하고 있다.
 
조선조 전기 시인인 김안국(金安國:1478∼1543)은 김해의 옛 일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천고의 가야국
흥망의 일은 증명할 수 있지
구름에 가렸구나 파사탑 놓인 곳
봄이 늦었구나 수로왕의 능은
바다제비는 어찌 빨리 오는가
산의 꽃은 물어도 대답하지 않네
지금 옛 곡조를 듣자하니
처절하여라 더해지는 나그네 수심
千古伽倻國 (천고가야국)
興亡事可憑 (흥망사가빙)
雲閑婆塔占 (운한파탑점)
春老首王陵 (춘로수왕릉)
海燕來何早 (해연래하조)
山花問不噟 (산화문불응)
祗今聞舊曲 (지금문구곡)
凄切客愁增 (처절객수증)
   
<김안국, 金海懷古(김해회고)>  


바다제비는 우리나라에 4월 말이나 5월에 온다. 시인이 김해에서 본 바다제비는 너무 일찍 왔다. 그리고 산의 꽃은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다. 아직은 오지 말아야 할 바다제비가 오듯 세월은 너무 빨리 흐르고, 봄은 늦어져 꽃 또한 생기가 사그라지듯 무심한 자연의 시간 속에 가야는 사라져 버렸다. 시인은 김해에서 옛 가야를 보고 사라져간 그 세월을 아쉬워하고 있다.
 
조선조 중기 이식(李植:1584~1647)은 1620년을 전후하여 관직에서 떠나 자신의 집인 경기도에서 출발하여 전라도와 경상도를 거쳐 여행을 한 적이 있다. 다음 시는 당시의 김해를 읊은 것이다.


수로왕 세운 옛 나라
가련하여라 상처투성이로구나
살고 있는 백성에는 쫓겨온 객 많고
농사짓는 땅은 둔전이로구나
자개무늬 비단은 세금으로 다 바치고
광주리 엮어 해산물을 줍는구나
포대기 두른 사람 길에서 만났더니
새 해 올 때까지 부역 피해 다닌다 하네
首露古邦域 (수로고방역)
瘡痍今可憐 (창이금가련)
居民多逐客 (거민다축객)
耕地是屯田 (경지시둔전)
織貝輸官稅 (직패수관세)
編筐拾海鮮 (편광습해선)
路逢襁負者 (노봉강부자)
逋役趁新年 (포역진신년)
   
<이식, 古駕洛 金海 昌原 等地 皆是
(고가락 김해 창원 등지 개시)>
 


이때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20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을 뿐이다. 영광스러운 옛 가락의 자취는 전쟁의 상처로 엉망이 되었고,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고향과 논밭을 잃은 당시의 김해 주민들은 모든 것을 세금으로 바치고 고작 해산물이나 주워 배고픔을 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길에서 만난 아기 업은 어떤 방랑객은 한 해 한 해 부역을 피해보려고 도망을 다니고 있었다. 시인 이식은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착취에 시달리던 당시 김해의 상황을 이렇게 생생히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김해 또한 영광스러운 역사가 있었던 만큼 고통의 세월 또한 피해갈 수 없었음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시다.
 
이제 조선조 말의 시인이 읊은 김해를 보자. 송병선(宋秉璿:1836∼1905)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그윽한 도읍 옛 가락국
왕업을 열었으니 신라와 같은 때
물이 휘돌아 강은 바다와 통하고
산이 에워싸 땅은 오랑캐와 이어졌네
진풍이라 남아있는 옛 탑
숭선이라 우러러보는 옛 사당
해지는 분성 아래에서
서성이며 서리지탄을 노래한다
幽都舊駕洛 (유도구가락)
開業同羅時 (개업동라시)
水轉江通海 (수전강통해)
山圍壤接夷 (산위양접이)
鎭風留古㙮 (진풍류고탑)
崇善瞻遺祠 (숭선첨유사)
落日盆城下 (낙일분성하)
徘徊歌黍離 (배회가서리)
   
<송병선, 金海述懷(김해술회)>  


송병선은 1905년 11월 17일에 일본과 체결한 을사조약(乙巳條約)의 파기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다가 그해 12월 30일 독약을 세 번이나 마시고 자결하였다. 네 번째 구절의 오랑캐는 일본이다. 바다와 통하고 일본과 땅을 이은 김해는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제 1방어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 옛날 바람을 잠재우던 허왕후의 파사탑(婆娑塔)과 어진 마음을 숭상하던 김수로왕의 숭선전(崇善殿)을 바탕으로 한 김해의 정신이야말로 일본을 막을 수 있는 힘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서리지탄(黍離之歎:나라가 망하고 그곳에 기장을 비롯한 식물만 자라있는 데 대한 탄식)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현실. 너무나 한탄스러운 시인은 눈물지을 수밖에 없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