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례저수지와 노현산.
사람은 홀로이 길을 떠나는 존재다. 모롱이 모롱이 외로운 길을 휘돌아 가다보면, 거친 산봉우리 몇 개 넘을 때도 있고, 눈물 글썽이는 윤슬의 강물을 만나기도 한다. 이 땅과 저 땅의 경계, 생성과 소멸의 고갯길에서 주저하는 삼라만상을 만날 수도 있다.
 
산을 홀로이 걷다보면 특히 이런 상념들이 길동무 하듯 따라다닌다. 인생의 고갯길과 벅찬 삶의 비탈을 만나듯, 사람으로 하여금 산은 그 질곡의 인생길을 짧게나마 길 안내를 하는 것이다. 이번 산은, 코스는 짧지만 인생의 노정처럼 짭짤한 진례의 노현산을 오른다.
 
시례리 상촌마을 부근 산행 이정표를 들머리로 하여 임도 삼거리, 노티재, 노현산 정상에서 하촌마을 갈림길 이정표, 평지·시례마을 갈림길 이정표로 길을 내려, 다시 임도삼거리로 해서 상촌마을로 하산하는 코스이다.
 
상촌마을에서 차를 주차하고 클레이아크 방면 농로를 걷다보면, 노현산 들머리 팻말이 나온다. 임도 삼거리까지 0.7㎞, 노티재까지는 1.2㎞를 가리킨다. 들머리 나뭇가지에 '함박자연길'을 표시하는 노란리본이 걸려있다. 김해를 사랑하는 전·현직 공무원들이 개척한 '김해의 둘레길'이다.
 
▲ 들머리 임도와 그 뒤로 보이는 노현산.
임도 따라 삼라만상이 모두 잠이 들었다. 강아지풀도, 졸참나무도 푸른 기억은 땅 속에 묻어두고 무채색 겨울옷으로 갈아입었다. 길 따라 겨울풍경이 군데군데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데, 찔레꽃 빨간 열매만이 빨간 방점을 찍듯 붉디붉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나자 시례저수지가 제 몸을 드러낸다. 수량은 줄었어도 하늘을 담고 있기에 푸른 물결이 찰랑인다. 물 위로 가창오리 몇 마리 물속으로 자맥질 하느라 분주하다. 그 옆으로 미루나무 한 그루 노현산을 바라보며 빈 바람을 맞고 섰다. 저수지 가장자리에는 밤새 얼음이 얼어 물밑 속을 거울처럼 환하게 비추고 있다.
 
소나무 군락은 윤슬 반짝이는 저수지 쪽으로 고개를 빼고 앉았다. 바람은 에이듯 불어와 온몸이 움츠러드는데, 그나마 하늘은 맑고 푸르다. 서정주 시인의 '동천(冬天)'이 생각나는 겨울날이다.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나르는(나는) 매서운 새가/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임도 삼거리에 닿는다. 이정표는 진례 평지마을과 노티재를 가리키고 있다. '노티재 0.5㎞'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산을 깎아 임도를 만들었는지 길이 폭 파묻혀 산 쪽으로 향하고 있다.
 
노현산을 배경으로 억새군락이 동그마니 자리잡았다. 모두들 제 홀씨 다 날려 버린 채 허허롭다. 자식을 슬하에서 떠나보낸 어미의 심정이 이러할까? 온기 하나 남아있지 않은 품이, 노년의 부모 같아 괜히 미안하고 미안해서 눈물겹다.
 
억새군락 뒤에는 금강송 한 그루 하늘이 높다하고 뻗어있다. 가지 하나가 노현산을 다 가릴 위세다. 그 거침없음이 새삼 부러울 뿐이다.
 
사거리가 나오고, 그 초입에 미루나무 서너 그루 하늘 향해 빗금 긋듯 제 가지 뻗고 있다. 이파리 하나 남기지 않고 모든 것 털어냈다. 그 무욕의 마음을 나그네 가슴에 담고 산을 오른다.
 
낙엽이 오솔길 따라 더욱 유난히 바스락댄다. 물기 하나 남기지 않았음이다. 낙엽소리를 동무삼아 그렇게 홀로이 산길을 내며 간다. 길을 오른쪽으로 길게 휘돌아 든다. 곧 양지 바른 길이 나오고, 이곳 길 양쪽으로만 푸른 풀밭이 남아 파릇파릇하다.
 
그 길 따라 휘적휘적 오르다 보니 제법 넓은 임도와 합류를 한다. 노티재를 오르는 본길인 것 같다. 슬슬 오르막이 시작되고, 길섶 양지 바른 곳으로 고사리 군락이 새파랗게 눈을 시리게 한다.
 
좀 급하다 싶은 경사를 몇 분간 오른다. 눈앞에 노티재 갈림길 이정표가 보인다. 여래고개 5.4㎞, 진례산성 3.9㎞. 이 고개를 넘으면 창원이다. 노티재는 예부터 김해와 서부경남을 잇는 고갯길이다. 이 땅의 사람과 저 땅의 사람이 산의 잘록한 고갯길을 통해 사람과 물자를 교류했던 길이다.
 
노현산 정상을 향해 본격적으로 산을 탄다. 갑자기 바람이 거세진다. 소나무 가지 사이마다 바람이 지나며, '웅~웅~' 황소울음 소리를 낸다. 발자국 딛을 때마다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모든 산의 것들은 소멸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래, 생성의 시간 뒤에는 반드시 소멸의 시간이 무덤자리처럼 뒤따르는 법. 그곳에서 잠시 몸을 뉘어 쉬고 있으면, 또 다른 삶의 길, 생성의 길이 다가오는 것이다.
계속되는 된비알. 그만큼 산의 고도는 쑥쑥 올라간다. 죽어 쓰러진 나무들이 계단을 만들고, 꽝꽝 얼어붙은 땅은 나그네의 발길을 매번 허방에 빠뜨린다. 경사가 엄청나다. 땅이 얼어붙지 않았으면 산행이 힘들 정도로 힘든 난코스의 오르막이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산길을 그렇게 빈손으로 오른다. 거친 비탈을 부여잡고 있는 참나무 밑둥치에도 겨울은 예외가 없어, 밀생하고 있던 이끼들이 시커멓게 얼어붙었다. 모든 산이 말 그대로 무주공산이다. 오로지 겨울만이 산을 차지한 채 호령호령 할 뿐이다.
 
볼을 에는 맞바람은 나그네의 길을 계속 막아서고, 비탈길은 더욱 비탈져 정상의 모습을 좀체 보여주지 않는다. 뽀드득 뽀드득 급한 비알을 하염없이 오른다. 숨은 턱에 차고, 거친 숨결 따라 하얀 김은 연신 입에서 뿜어져 나온다.
 
한참을 그렇게 힘겹게 오르다 보니 얼핏 산 위로 햇살 한 줄기 비추이고 있다. 저만큼 봉우리 능선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봉우리로 오를수록 산 아래 전망도 트이기 시작한다. 진례의 넓은 벌판이 나무숲 사이로 펼쳐지고, 남해고속도로 위로 차들이 바쁘게 달려가는 모습도 보인다. 정상에 다가와 잠시 뒤돌아보니 한림벌과 봉화산 전체가 환히 조망된다.
 
▲ 노현산 정상.
마지막 급경사. 바짝 약 오른 고개 비탈을 깔딱대며 다 오른 후 노현산 정상에 선다. 정상에는 삼각점이 있는데 해발 279m를 가리키고 있다. 멀리 태숭산, 응봉산이 보이고, 황새봉의 긴 능선도 보인다. 멀리 낙남정맥의 마루금도 길게 걸쳐져 있다. 발아래로는 시례저수지 물빛이 푸르게 어른거린다.
 
능선을 따라 길을 내린다. 편안한 능선이 눈앞으로 굽이굽이 지며 길을 내고 있다. 능선을 끼고 양 옆 급경사로는 김해의 진례벌판과 창원의 정병산이 각각 길을 따르고 있다. 잠시의 오르막 뒤로 봉우리가 보인다. 낙엽 속 돌부리에 걸려 발길이 무뎌진다. 조심조심 발걸음을 뗀다.
 
다시 봉우리. 낙남정맥 마루금이 일렬로 선명하게 하늘과 맞닿아 있다. 멀리 매봉산이 오뚝하니 서 있고, 산 아래 도강저수지가 산그늘을 길게 담고 앉았다.
 
▲ 시례저수지와 낙남정맥 마루금.
길이 급박해진다. 내리는 길의 땅이 녹아 푹신푹신하다. 조심스레 길을 내린다. 발목까지 오는 낙엽을 헤치니, 낙엽에서 파도소리가 철썩인다. 그렇게 바람이 낙엽과 살 부비며, 이 산 속까지 바다를 데려와 파도소리를 내는 것이다.
 
이러구러 길을 내리니 삼각봉우리 하나 떡 버티고 섰다. 봉우리 위로 참나무 숲이 도열해 섰는데, 마치 가지런한 머리숱처럼 잘 자라있다. 곧 삼거리 갈림길 이정표 앞에 선다. 하촌마을 방향으로 길을 내린다. 참나무 빈 나뭇가지 사이로 진례지역이 환하다. 저수지의 물빛도 선명하게 푸르다.
 
하산길이 그야말로 쏟아질 듯하다. 바스락 바스락 급한 잰걸음에 낙엽소리도 급박해지고, 사람 마음도 조급해져 몇 번을 엉덩방아를 찧는다. 한참을 그렇게 급하게 길을 내리다 잠시 숨을 돌릴 때쯤 되자, 주위의 소나무 숲이 역광에 빗금 긋듯 잘 뻗어있음을 본다. 재잘대는 새소리도 들리고, 멀리 나무 부러지는 소리도 아련하게 들린다.
 
솔숲 아래로 양지 바른 곳에는 넓게 터를 잡은 유택들이 따뜻하게 앉아들 있다. 이미 가묘까지 준비를 해놓은 가족묘지도 있다. 이 산의 무덤들은 산을 닮아 소멸의 준비마저 달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소멸은 준비하는 것. 이 한 해도 그럴 것이다. 해거름의 산행을 하며 계절의 소멸과 인간의 소멸, 임진년의 소멸을 함께 본다. 그래, 잘 가라. 이 모든 길 떠남이여. 행복하게 잘 살다가는 삼라만상들이여~ 오리나무 가지의 잎사귀가 바람에 파르르 떨린다.
 
유택을 일별하며 내리다 보니 어느새 날머리. 평지마을과 시례마을의 갈림길 이정표를 만난다. 다시 '함박자연길' 리본 따라 임도를 걷는다. 왼쪽으로 노현산이 손에 잡힐 듯하고 멀리 산 오른쪽으로는 노티재의 잘록한 허리가 선명하다. 따뜻한 곳으로는 물길이 녹아 물소리가 명랑하다. 그렇게 임도를 걷다 원래 왔던 임도삼거리를 다시 만난다.
 
해가 산으로 이운다. 그렇게 한 해의 끄트머리가 이운다. 하산하는 길 대숲 뒤로 처연한 노을이 번진다. 노을 곱게 따뜻한 한 해가 그렇게 그렇게 저무는 것이다. 잘 가라~ 잘 가라~ 붉은 하늘에는 기러기 떼가 임진년을 향해 이별의 나래짓을 하고 있다.






최원준 시인/ 문화공간 '守怡齊수이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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