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어산.
김해를 대표하는 주산(主山)으로 치자면, 단연코 신어산(神魚山)을 첫 손 꼽아야 할 일이다. 가락국 전설을 고스란히 품고 있으면서도 김해 시가지 중심에 자리해, 시민들의 몸과 마음의 안식처 역할을 하고 있기에 그렇다. 신어산. 말 그대로 신어(神魚), 신령스러운 물고기가 머무는 산이다. 그것도 가락국을 상징하는 아유타국의 쌍어(雙魚), 즉 신어 두 마리가 깃들어 있는 산이다. 북동쪽으로는 유장한 물줄기의 낙동강이 감돌아 흐르고 남쪽으로는 광활한 김해평야를 바라보고 있어, 그 넉넉한 산세가 찬란했던 고대국가를 품고도 남음이 있다. 따라서 이번 산행은 가락국의 신어(神魚) 두 마리를 찾으러 떠나는 마음 속 수행산행이다. 은하사 입구에서 삼림욕장 시비동산을 거쳐, 영구암을 거슬러 오르다 정상에 이르는 고즈넉한
오후 산행이다. 하산을 해서 은하사에 이를 때쯤이면 일몰이 그윽할 터이다.

은하사 초입. 오른쪽 길로 '영구암' 이정표가 있고, 곧이어 삼림욕장 임도가 시작된다. 곳곳의 소나무들이 제 살아온 삶의 궤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듯, 제각각 휘어지고 틀어진 채 찬바람 맞고 섰다.
 
임도 오른쪽으로 시비동산이 자리하고 있다. 김해 출신 시인들의 시를 하나하나 각을 해서 세워놓았다. '신어산 정상 1.3㎞' 이정표도 길옆으로 자리하고 있다. 편한 길을 자박자박 10여 분 걸어 오른다.
 삼림욕장이 끝나는 부분에 작은 주차장이 있고, 산길 입구에 신어산, 영구암 방면 이정표가 서 있다. 산길로 접어든다. 나무계단과 돌계단이 적절하게 섞인 산길이다. 사방은 제멋대로 휘어진 소나무들로 가득하다. 그 사이로 세찬 바람이 윙윙거리며 나그네를 맞고 있다.
 
산길 주위로는 온통 바위와 암벽, 너덜이다. 소나무는 꿈틀대며 하늘로 오를 기세고, 바위는 제 몸에 사리 만들 듯 제 마음 안으로 들며 더욱 단단해진다. 산을 오를수록 가파른 산길이 계속된다. 묵언수행 하듯 묵묵히 산을 오를 뿐이다.
 

▲ 돌탑과 암벽.
돌무지 하나 힘겹게 오른 후 잠시 쉬자니, 바위 위에 법구경을 새겨 놓은 빗돌이 서 있다. 산을 오르다 잠시 쉬며 마음의 글귀를 새겨 보라는 뜻일 게다.
 
'법을 즐기면 언제나 편안하다. 그 마음은 기쁘고, 그 뜻은 깨끗하다. 이런 어진 사람은 성인의 법을 들어, 그것을 항상 즐겁게 행한다.'
 
한참을 소나무와 벗하며 오르다 보니 영구암이 아련하게 잡힌다. 거대한 암벽이 산길 양 옆으로 병풍처럼 에둘러 서 있고, 바위 절벽 위에는 낙락장송 한 그루, 독야청청하게 김해벌을 내려다보고 있다.
 
돌탑을 지나고 돌계단을 하나씩 오르며, 언뜻 계단에 쌓인 눈이 고기비늘처럼 반짝인다. 오호라~ 돌계단이 마치 수미산을 오르는 물고기떼 같다. 후드득거리며 일도창해(一到滄海)로 나아가는 은빛 물고기떼….
 
그래, 물고기들이 만다라의 세계로 거슬러 오른다. 부처가 거처하는 장소, 우주의 힘이 집중된 곳으로 찰박찰박 모여든다. 그곳은 빛의 세계가 펼쳐져 있고, 궁극에는 몸과 마음이 한데 합일하는 곳. 그곳을 향해 중생(衆生)의 물고기들이 물질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니 계곡 쪽의 너덜겅도 산을 향해 헤엄치는 물고기 형상이다. 온 산이 물고기 형상으로 힘찬 꼬리 짓을 치고 있다. 물고기는 생명력의 결정체로, 수천 수만 개의 알을 낳아 부화시킴으로써 생명을 재생시키는 존재다.
 
때문에 동서고금의 물고기는 길상의 상징이요, 구원의 상징이다. 가락국의 쌍어(雙魚)나 불교의 범어(梵魚)도 '신령스런 물고기(神魚)'로 불리며, 부처를 대신하고 부처의 심장을 보호하는 수호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소끔 숨을 들이내쉬며 영구암(靈龜庵)에 오른다. 가락국 김수로왕의 원찰(願刹)로 전해지는 암자다. 멀리서 보면 거북 머리 위에 절이 자리하고 있는 형국이라 '영구암'이라 지었다고들 한다.
 
계단을 다 오르니 바로 대웅전. 신라 흥덕왕 때 축조했다는 단단한 석벽 위에 대웅전이 서 있다. 처마 끝으로 연등이 달려 있는데, 그 색감이 나그네 심사를 안온하게 한다. 일순 풍경이 '딸랑' 울린다. 언뜻 죽비를 맞는 느낌이다. 그 작은 풍경소리가 온 신어산을 다 깨우는 것이다. 잠시 합장했던 대웅전 삼존불의 미소가 그윽하다.
 
▲ 염구암의 삼층석탑.
대웅전 앞 너른 암반 절벽 위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473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서 있다. 탑의 모습이 소박하고 넉넉하여 사람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탑 뒤로 보이는 김해 시가지 전경도, 아울러 편안하고 호젓하다.
 
눈 속의 영구암을 뒤로 하고 신어산 정상으로 오른다. 바위 암벽 사이로 계단이 끝없이 이어졌다. 곳곳에 조릿대가 바람에 철썩이고, 빈 나뭇가지 사이로 짧은 겨울 햇빛이 잠깐씩 스쳐 지난다.
 
백팔번뇌의 계단을 오른다. 한 계단마다 하나씩 번민이 쌓이고 또 풀린다. 절벽으로 치닫던 큰 바람이, 산을 오르는 나그네의 발길을 호되게 꾸짖는다. '이놈! 뭐 하러 산엔 오르는 게냐?' 호령 호령이다.
 
나그네의 마음 흔들릴까 저어해서인지, 절벽 밑 동굴에는 부처를 모셔놓았다. 갖은 색색의 조화(造花)로 수미단(須彌壇)을 꾸미고, 흔들리는 마음 다잡으려는 듯 촛불도 정성을 다해 올렸다. 그러나 중생의 마음마냥 촛불은 하염없이 흔들리고, 또 흔들리는 것이다.
 
얼마를 올랐을까? 가파른 계단을 다 오르자 신어산 능선 합류지점에 닿는다. 정상까지 150m 남았다는 안내도가 보인다. 정상으로 향한다. 산길 군데군데 눈이 쌓여 하얗다.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는 촉감이 참으로 좋다. 그렇게 눈길을 걷다보니 넓은 공터가 보이고, 멀리 팔각정자의 '신어정(神魚亭)'이 찬바람을 맞고 섰다.
 
▲ 신어산 정상부의 적설. 수행정진의 마음으로 산에 오른 듯 많은 속세의 물결들이 발자국으로 남았다.
정상부에는 겨울 칼바람이, 오가는 사람들의 살을 한창 에고 있다. 몸을 웅크린 채 신어정에서 나무계단을 타고 오른다. 곧 신어산 정상(631.1m)이 모습을 드러낸다. 정상 중앙에는 사람들의 갖가지 염원을 담은 큰 돌탑이 보이고, 돌탑 뒤로는 삼각점과 정상석이 다소곳이 서 있다. 김해 시가지 쪽으로는 쉼터를 겸한 전망대가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산 아래 조망을 일별한다. 멀리 부산의 금정산, 백양산 능선이 보이고, 그 앞으로 까치산과 백두산 능선이 신어산 밑으로 도열해 섰다. 신어산 뒤쪽으로는 장척산과 도봉산, 멀리 석룡산 등이 자리하고 있다.
 
김해 시가지는 늦은 햇빛에 고즈넉하다. 김해벌은 맨몸으로 다음 계절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다. 그 사이로 서낙동강이 물결 글썽이며 느릿느릿 평야를 가로지르며 흐른다. 이렇듯 김해의 모든 풍경이 이곳 신어산 정상에서 다 펼쳐지는 것이다. 과연 정상에 오르니 신어산이 가락국의 주산(主山)임을 비로소 알겠다.
 
산을 내린다. 이우는 태양을 향해 길을 걷는 등산객의 어깨가 적조하다. 혼자서 가는 인생길이어서 더욱 그러하리라. 그이의 어깨로 내리는 햇살이 서늘하다. 영구암 너머로 해가 제법 이울었다. 서서히 서녘 하늘에 붉은 기운이 돈다. 계단 길을 따라 계속 길을 내린다.
 
▲ 영구암의 해질 무렵 풍광. 저녁놀에 붉게 물든 암자 저멀리 낙동강과 김해평야가 남해바다로 쏟아진다.
금강송 사이로 어스름이 내린다. 나무들도 덩달아 어두워진다. 마치 신묘한 검은 뱀 무리 같다. 꿈틀꿈틀 하늘로 오르려는 듯, '날름날름' 저물 무렵 남은 햇빛을 핥아먹고 있다. 승천하기 전의 이무기처럼, 붉게 퍼지는 저녁놀을 향해 힘차게 날아오를 태세다. 그 위로 까마귀들이 떼를 지어 날아오른다. 수 십여 마리가 한꺼번에 검은 숲 위를 선회하며 울어댄다. '까옥까옥' 신어산 소나무를 호위하듯, 그렇게 오래도록 저무는 하늘을 하릴없이 날아오르는 것이다.
 
한참을 내려 신어산 양대 사찰 중 하나인 은하사로 젖어든다. '부처의 집'으로 오르는 돌계단의 크기가 엄청나다. 어지간한 불력이 아니면 어림도 없겠다. 대웅전 앞. 절 뒤로 신어산이 서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절간의 빈 나뭇가지들은 저녁 공양을 잊은 채 허허롭다.
 
은하사 요사채에 걸린 저녁놀이 그윽하다. 저녁 예불을 드리는지 아련하게 독경소리가 들려온다. 어둠 속에 깃들어 있는 산의 것들이 조용히 독경소리에 귀기울인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비워내고 다시 채우는 것이다. 삿된 마음이 그러하고, 열락의 마음이 그러하다.
 
은하사 대웅전 수미단의 쌍어가 후드득 댄다. 대웅전을 떠돌다 급기야 나그네를 향해 다가온다. 세상의 혼탁함에 휩쓸리지 않는 정결한 삶의 상징. 밤낮 눈을 감지 않고 깨어 있기에, 수행정진의 상징으로도 표현되는 신어(神魚)가 살아 오른다.
 
신어산(神魚山)의 신어(神魚) 두 마리가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깜깜한 속세의 길을 내리는 나그네 뒤를 찰박찰박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사위는 어둠에 묻혀 적멸(寂滅) 속이다.






최원준 시인/ 문화공간 '守怡齊수이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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