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 불구, 저 이불 덮고 한 시간쯤 낮잠이나 푹 잤으면….
천염염색가 전지윤(51) 씨의 염색공방이자 작품 전시공간인 '풍뎅이'에 들어서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감물염색이 된 부드러운 면에 솜을 두둑하게 넣은 이불은 달콤하고, 은은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이불 아래의 온기는 더 강한 유혹이었다. 결국 이불을 덮고 앉아버렸다. 취재를 하려는 게 아니라, 시골 사는 마음 따뜻한 언니네 집에 놀러온 기분이었다. 그 '따뜻함'은 천연염색가 전지윤 씨가 시린 아픔을 딛고 만들어낸 '자연의 빛깔'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 감물을 들인 면에 솜을 두둑하게 넣어 만든 이불을 덮고 있는 전지윤 씨. 염색을 하고 소금을 흩뿌려 말리고 털어내는 과정에서 마치 눈이 내린 것 같은 자연스러운 무늬가 만들어진다.  김병찬 기자 kbc@

전지윤의 '풍뎅이'는 진례면 시례리 신기마을 뒷산 진례로 311에 있다. 신기마을 회관을 뒤로 두고 소나무 숲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는데, 좁은 오솔길에는 아직 눈이 녹지 않은 채였다.

갑자기 찾아온 삶의 벼랑 끝에서
그가 운명처럼 맞이하게 된 건
하얀 천 위에 붉게 번져가는
곱디 고운 황토염색이었다

새삶의 터전을 허락받는 데도
스승으로부터 염색을 배우는 데도
약속한 듯 '사흘'의 시간이 걸렸다

황토·대나무·숯·감 물들여 만든
옷과 이불들 속에서 행복한 그
또다시 봄이 오면 너른 마당엔
자연이 스민 천들이 휘날릴 것이다

전지윤은 부산에서 태어났고, 40세까지 부산에서 살았다. 부산의 큰 의류회사 재봉공장에서 현장관리직으로 15년 정도 근무했다. 그가 관리한 직원만 150여 명을 헤아렸을 정도로 맡은 업무는 중요했다. 그렇게 평탄한 삶을 살던 어느 날,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그는 물론 가족까지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너무 큰 사건이어서 하루 종일을 울었고, 급기야 하반신을 못 쓸만큼 실의에 젖었다. 그는 그때 지인의 소개로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한 비구니 스님과 함께 경북 영천·의성, 서울 등지의 절집에서 공부도 하고 몸도 추스르며 몇 달을 지냈다. 어느 날 비구니 스님이 말했다. "우리, 따뜻한 남쪽나라에 가서 살자." 컨테이너 두 동으로 만든 집에서 살던 두 사람은, 집을 얹어놓을 땅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러다가 시례리까지 발길이 닿았던 것이다.
 
"올라오는 길이 예쁘죠? 10여 년 전에는 더 좁은 오솔길이었어요. 그 길이 너무 좋아 머물기로 했답니다." 전지윤은 오솔길을 따라 산길을 오르다 대숲 속에서 오래된 기왓집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걸음을 멈춘 곳이, 지금의 이곳이다.
 
그 기왓집은 광주 안씨 문중의 젊은 인재들이 과거를 준비하던 곳이었다. 전지윤이 찾았을 때는 신기마을 아래 상촌마을에 사는 집 주인 안봉환 씨가 집 수리를 막 끝낸 직후였다. 전지윤은 안 씨에게 큰 절을 올리고, 그 터에 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다. 안 씨는 전지윤의 사정을 듣고는 "3일만 기다려보라"고 했다. 그리고 3일 후, 살아도 좋다는 결정이 떨어졌다. 전지윤은 대숲을 개간하고 터를 잡았다. 2003년 2월 26일이었다.
 
마트에서 김밥 마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삶을 이어가던 그가 염색과 인연을 맺은 것도 안 씨 문중 덕분이었다. 당시 안 씨의 장녀가 부산대 평생교육원에서 염색을 배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전지윤에게 쑥물 염색을 할 수 있도록 쑥을 베어 삶아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밑 준비를 해놓고 나니 평생교육원 염색과정 수강생들이 찾아왔다. 쑥물염색 과정을 지켜보고 있자니 신기하기도 했고 궁금하기도 했다. 호기심을 보였더니 그 중 한 명이 "염색은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든다. 천 만원도 넘게 든다"고 말했다. 수중에 돈 한 푼 없던 그는 놀라 입을 다물었는데, 안봉환 씨의 첫째 사위가 이렇게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 들 중에 오뉴월 땡볕 아래서 직접 쑥 베고, 삶아 염색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일순 일행들은 숙연해졌지만, 전지윤은 막연한 희망을 가졌다. 몸으로 때우면 되겠구나….
 

▲ 천연염색 이야기를 하며 활짝 웃는 전지윤 씨 곁에는 변함없는 미소로 지켜봐 주는 남편 신현준(왼쪽) 씨가 있다.
전지윤은 당장 서점에 가서 책을 3권 사서 읽었다. 그러나 답답했다. 어려운 전문용어도 문제였지만, 어느 정도 분량을 어떻게 하라는 즉, 계량에 관한 내용이 없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천염염색으로 유명한 창원의 공방 '동트는빛'을 운영하고 있던 이남주 작가를 찾아갔다. 염색을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이남주 작가도 3일을 기다려 보라고 했다.
 
"가진 돈이 없어 수업비를 낼 수 없었어요. 혈액순환이 안 좋아 제가 먹으려고 심었던 어성초의 즙을 짜서 선생님께 갖다드리며 부탁을 드렸죠. 3일 후 염색을 가르쳐주겠다는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안봉환 어르신도, 이남주 선생님도… 지금 생각해 보니 저한테는 '3일'이 중요했네요."
 
그는 이남주 작가에게서 황토염색을 배우고, 숯염색과 쪽염색의 이론을 익혔다. 어느정도 이론과 실기를 익히고 난 후에는 황토염색을 '죽어라고' 했다. "누군가가 천을 가져다 주면서 황토염색을 해달라고 했어요. 그때만 해도 여기에는 수도가 없었어요. 수도와 전기가 들어온 지는 1년밖에 안 됩니다. 그 전에는 오토바이로 마을까지 내려가 물을 길어다 나르며 황토염색을 했는데, 천 한 조각 살 돈이 없었던 저로선 그때 원없이 황토염색 실습을 한 셈이죠. 그래서 황토염색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습니다."
 
그렇게 5년 여의 세월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어느 날 한 지인이 황토이불 한 채를 주문했고, 아토피로 고생하는 아이가 황토이불을 덮고 잔 이후 몸이 좋아졌다는 말이 나돌면서 고객이 한 둘 찾아왔다. '천연염색가'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염색에 익숙해지면서 그의 건강도 조금씩 나아졌다. "제 몸이 아프다 보니, 염색을 할 때도 인체에 유해하거나 환경에 안 좋은 건 절대 사용하지 않아요. 말 그대로 천연염색만 하는 거죠."
 
그의 또 다른 이름 '풍뎅이'는 자연친화적이다 못해 조금 투박하기까지 한데, 왜 좀 더 예쁜 이름을 택하지 않았을까. '풍뎅이'는 그가 아픈 몸을 치료하기 위해 불교에 의지하고 있을 때 붙여진 이름이다. 경북 의성의 한 산골에서 비구니 스님과 지내던 시절, 그는 자신에게 닥친 기막힌 상황과 아픈 몸에 지쳐 미소 한 번 짓는 순간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비구니 스님이 "한겨울인데, 풍뎅이가 나왔네"라며 말을 건넸다. 무슨 말인가 하며 살펴보니, 공양간 철판 씽크대 위에 얹어둔 그의 휴대폰이 진동상태에서 신호를 받느라, 철판 위를 맴돌며 정말 풍뎅이 우는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몇 년동안 그의 가슴을 짓눌렀던 답답함을 뚫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빚보증 사건으로 인한 충격과, 아파서 쓰러진 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웃었어요. 마치 기적처럼요. 스님도 지인들도 그때부터 저를 '풍뎅이'라 불렀어요. '풍뎅이'가 제 이름이 되어버린 거죠. 지금은 염색공방 상호로도 사용되고 있네요."
 
전지윤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천연염색을 알리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제가 처음 염색을 배울 때 많이 힘들었거든요. 염색 관련 책들은 내용이 너무 어려웠어요. 전 누구나 볼 수 있고, 쉽게 해볼 수 있는 염색이야기를 담은 책을 만들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과 염색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제가 염색한 천으로 만든 옷도, 일상생활에서 편하게 입을 수 있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가까이에 있고, 몸에도 좋은 그런 색을 만들어 내고, 그런 물건을 만들고 싶어요."
 
방안에는 그가 황토·대나무·숯·감으로 물들이고, 디자인해서 만든 옷이며 이불이 잘 정리돼 있었는데, 기자가 처음 공방을 방문했을 때 퍼뜩 눈길을 주었던 이불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런 그의 곁에는 변함없는 존경과 사랑으로 함께 하는 남편 신현준(45) 씨가 있다. 봄이 오면 전지윤, 신현준 두 사람은 황토염색을 한 천들을 마당 가득 늘어 말릴 것이다. 매일 매일 색이 변하는 천, 그 천이 봄바람에 휘날리는 아름다운 날, 기자는 신 씨의 나머지 사연을 들으러 한 번 더 공방을 찾아갈 생각이다.

>> 전지윤
2009년 미타갤러리 개인전, 2011년 부산디자인센터 흑색전, 2012년 중국 상하이 주재
한국문화원 전시, 부산여성문화회관·범어사 개산대제·금어문화축제·삽량문화제 등 전시회
다수. 2010년 신라대 전통연구소 초·중급 과정 이수. 2012년부터 신라대 첨연염색
전통연구소 전문가 과정 이수 중. 염색공방·체험장 '풍뎅이'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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