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고대부터 사용해온 귀금속은 금과 은이다. 그래서 중요한 귀금속과 보석 등을 '금은보화'라 부른다. 은은 금 다음으로 귀한 대접을 받아왔다. 은은 빛을 잘 반사해서 반짝거리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또 물러서 가는 실이나 얇은 종이처럼 펼 수도 있다. 그런 은의 특성을 살려 인류는 고대부터 은을 이용해 화폐·장식품·장신구·거울·고급 식기 등을 만들어왔다. 우리나라에도 전통 은공예가 이어져오고 있다. 허건태(49) 씨는 은을 이용한 작품에 가야의 문양을 접목한다. 전통방식의 금속공예는 힘이 들어서 그 일에 뛰어드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그는 가야 역사를 간직한 땅 김해에서 가야의 문양을 새긴 금속공예품을 만드는 것을 자신의 숙명으로 알고 있다.

▲ 2011년 제 8회 김해시 공예대전에서 금상을 수상한 은제 다도구 '가야 이천년 향기를 담아'.

대학 대신 등록금으로 귀금속 일 배워
전문과정·각종 자격증 공부에 빠진 그를 목공예가 양제 류제열이 눈여겨 보다
전통금속공예 도전 권유한 것이 출발점
재료연구·작업기법·도구제작 모두 독학
2005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공예 특선
국제쥬얼리 공모전 입선 시작으로 매년 수상 …"내 작업은 가야와 함께"

허건태는 칠산에서 태어났다. 김해농고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뒤. 대학을 가라는 부모를 설득해 대학 등록금으로 귀금속 관련 일을 배웠다. 일찌감치 귀금속 업계에 뛰어들어 일을 배운 그는 1994년 개업을 했다. 개업 후에도 그는 귀금속과 관련한 전문과정들을 수료하고, 보석감정사·보석판매사 등의 자격도 취득하며 공부를 계속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면서 귀금속상을 하고 있는 그를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다. 그의 가게 옆에서 목공예방을 하고 있던 양제 류제열이었다.
 
▲ 허건태의 작업대 주위에는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다양한 작업도구들이 놓여 있다. 김병찬 기자 kbc@
"젊은 사람이 꼼꼼하게 작업하고 열심히 공부하고…그냥 두기엔 아까운 실력이었지. 그래서 아무도 만들지 않는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 보라고, 금속을 잘 아니 전통금속공예를 해보라고 권했어." 류제열이 그 시절을 회고했다.
 
당시 허건태는 부산 경성대 사회교육원에서 보석디자인을 배우고 있던 중이었다. 귀금속 상품을 다루는 그가 전통금속공예 중에서도 은공예로 방향 전환을 한 데는, 류제열의 권유가 한 몫 했다.
 
귀금속을 다루는 허건태의 사업장은 수로왕릉 옆 서상동 330에 있는 '다이아나'이고, 전통 금속공예 작품을 만드는 그의 공방은 사업장 길 건너 골목 안의 '이석 전통귀금속 공예연구소'이다. 공방에 들어서면 그가 각종 주요 공예품 대회에 출품해 우수한 예술성을 인정받았던 작품들이 진열돼 있다. 은으로 만들고 금으로 도금한, 술병과 술잔으로 구성된 작품 '가야인의 풍류'는 류제열이 특별히 만든 상 위에 놓여 있었다. 저 술잔에 술 한 잔 채워 마시는 기분은 어떨까. 은으로 만든 차도구 작품인 '가야 이천년 향기를 담아'의 찻잔에 향기로운 차 한 잔 따라 마시는 기분은 또 어떨까. 정말 가야인의 멋과 풍류가 이천년 세월을 넘어 느껴질 것 같았다. 허건태가 만든 작품에는 파형동기의 문양을 비롯해, 고사리문, 구름문, 파도문 등 다양한 가야 문양이 응용되어 새겨져 있다.
 
그의 작품들 사이로 크고 작은 작업도구가 즐비했다. 작업대 책상 서랍마다 다양한 도구와 재료가 빼곡하게 정리돼 있었다. 기자로서는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고?'이지만, 그 모두가 그의 작업 과정마다 소용되는 물건들이다.
 
허건태가 처음 전통금속공예를 시작했을 때는, 이 힘든 작업을 하는 사람이 드물어서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재료 연구도, 작업기법도 모두 독학해야 했고, 작업도구도 직접 연구해서 만들어야 했다.
 
"외로운 과정이었지요. 어떤 작품을 만들어야 할지를 생각하고, 이미지가 떠오르면 책을 찾아보면서 구체화하고…. 그 모든 걸 혼자서 해야 하니까요. 남들이 하지 않는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양제 선생님의 말씀이 힘이 되고 채찍이 되어 주었습니다."
 
▲ 혼자 자료 찾고 연구해서 만든 '품 안의 은장도.'
허건태는 봉황대나 만장대로 오르는 아침 운동길에서 주변의 자연물을 늘 유심히 본다. 나뭇가지가 뻗친 모양, 꽃잎 한 장 한 장의 모습까지 놓치지 않고 바라보는 게 오래된 습관이다. 계속 바라보는 동안 그 자연의 형상들이 겹쳐지면서 한 순간 어떤 디자인이 떠오른다. '이 모양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럴 때면 가슴이 마구 뛴다. 그 순간의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해 그는 늘 수첩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 수첩을 꺼내 떠오른 이미지를 재빨리 메모해 놓기 위해서이다. 메모가 쌓이고, 머리 속의 수많은 이미지와 아이디어가 제자리를 찾아 정리가 되면 작품의 주제가 정해진다.
 
허건태는 사람들이 색이 변해 내다파는 은수저를 매입해 둔다. 은은 박테리아, 바이러스, 조류, 곰팡이 등의 일부 생물체에 대해서는 독성을 나타내지만, 인체에는 독성이 거의 없다. 이러한 항균 및 항생 작용 때문에 은은 인류문명사에서 고급 식기로 사용돼 왔다. 사극 드라마 등에서 음식에 들어간 독성을 알아보는 도구로 은수저를 사용하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오래 사용한 은수저는 은공예의 주 재료가 된다.
 
은수저를 녹이면 원래의 빛깔과 광택을 되찾는다. 이것을 압연기에 넣고 두께를 조절해 은판을 만드는 것이 작업의 시작이다. 다음은 작품 이미지에 맞게 은판을 잘라 성형한다. 작은 망치로 은판을 수 만 번 쳐서 작품을 구성할 부분들을 각각 성형하는데, 이 작업은 말할 수 없이 고되다.
 
"원하는 형태를 만들기 위해 망치질을 하는데, 몇 번이나 하는지는 저도 몰라요. 하루 종일 망치질을 하면 몇 번이나 될까요? 작품 하나 만들어내는 데 많은 시일이 걸리는 건 그 때문이에요. 팔이 아파서 하루종일 망치질을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힘이 드니 배우는 사람도 없죠."
 
이 망치질이 얼마나 힘든지, 그는 작업을 시작할 때면 아예 파스를 20봉지 사다 놓는다. 어깨에 부황도 뜨고, 침도 맞아가면서 하는 작업이다. 성형작업이 끝나면 만들어진 부분 조각들을 붙이는 땜작업을 한다. 은이 녹기 직전의 온도인 960℃의 온도에서 각각의 판을 붙이는 작업이다. 그는 이 순간을 가리켜 "피가 마른다"고 표현했다. 긴 시일 동안의 성형작업이 한 순간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작은서랍들에도 도구가 가득하다.

무사히 땜 작업이 마무리되면 사포작업으로 들어간다. 무광택의 은은한 은의 질감을 최대한 살려내기 위해 매끈하게 문지르는 과정이다. 그러고 난 뒤에야 조각 작업을 할 수 있다. 이때 가야문양을 응용한 그의 디자인이 새겨진다. 작은 소품에 조각을 하고 나면 눈도 많이 아프다. 그래도 그는 기꺼이 작업에 매달린다.
 
"내가 작업을 하는 동안만큼은 반드시 가야문양을 새길 겁니다. 내가 늘 보아 왔던 문양들이니까요." 그는 가야문양이 자신이 가야인으로 살았던 전생에서도 보았고, 자신의 조상들이 사용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작품으로 만들어 조상님들께 보답하는 것이 제가 할 일입니다. 가야문양을 응용해 만든 작품이 관광상품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그렇게 많이 팔리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제가 가진 재능으로 김해와 가야를 알리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기쁜 일이죠. 그런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2005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공예부문 특선과 국제쥬얼리 공모전에 입선한 이후 지금까지 매년 수상을 해왔다.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작품을 만들어 출품했고,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수상을 했다.
 
"작품을 출품하는 건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기 때문이에요. 이름난 큰 대회에 대한 욕심을 내지 않고 김해부터 먼저, 그 다음에는 경남, 이런 식으로 조금씩 큰 대회로 눈길을 돌려왔어요. 내가 발을 딛고 사는 가야의 땅에서 먼저 인정을 받고 그 다음 전국무대로 가는 거지요."
 
허건태는 자신이 가야의 후손이며, 자신이 만든 작품 속에 가야의 혼을 담을 것임을 여러 번 다짐했다. 아마도 그 자신과 하는 약속일 것이다. "공예를 하는 동안, 저는 가야와 함께 합니다. 제가 작업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 허건태의 주요 수상 경력
2006년 국제쥬얼리 우수디자이너상. 2007년 김해시 공예대전 동상. 김해시 전국관광상품공모전 은상. 2008년 김해시 공예대전 은상. 창원 주남저수지 관광상품 전국공모대전 대상. 2009년 김해시 전국관광상품공모전 은상. 2010년 경상남도 전국관광상품공모전대상. 2011년 김해시 공예대전 금상. 2012년 KDB산업은행 제1회 전통공예산업대전 입선. 현재 '다이아나' 경영 및 부부보석감정원, 이석 전통귀금속공예연구소 운영. 보석감정사 협회 회원, 김해시 공예협회 회원, 한국미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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