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철 낙동강이 넘치면 강으로 변했던 곳이 농지가 됐다. 종이 있는 언덕에서 내려다 본 마을의 모습이다. 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

대동공업이 둑 쌓기 전엔 낙동강 습지
여름이면 들판이 물에 잠겨 온통 강물
1965년께부터 개간해 삶의 터전 변모

광복 후엔 마을 일부 귀환동포거주지
뒷산엔 지금도 '바상소집 종' 유물처럼


"큰물 들면 배가 마을까지 들어왔죠. 큰 배를 대는 포구였기에 '대항'이라 불렀습니다."
 
한림면 장방리 대항마을은 자암산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장방들과 시산들에서 농사를 짓는 게 일인데, 배를 댈 수 있었다니 예전 모습은 어떠했을까. 낙동강이 바로 옆이라 여름이면 들판이 물에 잠겨 강이 되었다고 한다.
 
"대동공업이라는 회사가 둑을 쌓고 수리시설을 하고, 낙동강과 들판을 분리하면서 비로소 습지와 허허벌판이 농지가 됐어." 신상호(76) 노인회 회장이 마을의 옛 역사를 들려주었다. "예부터 우리 마을 흙이 좋기로 소문이 났다고 그래. 도자기를 만들기에 좋은 흙이었나 봐. 조선시대 때는 평소에 흙을 파두었다가, 한여름 큰물 들면 마을까지 배가 들어와 그 흙을 싣고 창원으로 어디로 싣고 갔다고 해."
 
흙이 좋은 대항마을에는 광복 즈음까지 일본인이 운영한 옹기요가 두 개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작고한 윗대 마을 어른들은 이 용기요에서 일을 했다.
 
이 요가 있던 자리에 '대동공업'이 들어와 1965년께부터 대대적인 둑 공사와 수리시설을 한 덕분에 오늘날의 마을 모습을 갖추었다. 그래서 마을 어르신들은 '대동공업의 이용범'이라는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며, 지역에 큰 기여를 한 인물로 고마워 했다. 그리고 힘들게 만들어진 농지를 '농장'이라 불렀다.
 
"50여년 전만 해도 논이 아니라 '새밭' '갈대밭'이라 불렀던 풀밭이었지. 갈대, 억새, 잡초들이 자라는 습지도 있었고. 바닷물이 역류해 낙동강 하고 합쳐져서 짠물도 함께 들었을 거야." 마을 어르신들은 벌판을 개간할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65만㎡(50만 평)도 넘을 걸? 소 두 마리가 함께 쟁기를 끌며 땅을 갈아엎었지. 길고, 서로 얽힌 갈대뿌리가 드러나면, 다시 두 번 세 번 갈았어. 그래야 뿌리가 끊어지니까. 그렇게 사람도 소도 힘들게 일해서 몇 년씩 개간한 땅이야."
 
처음 개간하고 난 뒤 1970년 즈음 벼농사를 시작했을 때는 모심기도 일반 논과는 달리 힘이 들었다. 흙이 너무 단단해서 꼬챙이로 모 심을 자리를 먼저 찔러 놓고 모를 심어야 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첫해에 대항마을은 1천980㎡(600 평)의 땅에서 7섬의 쌀을 수확했다. "아이고, 그것도 먹을 만한 게 그 정도였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을 할머니가 저 옛날 고생한 일을 끄집어 냈다. "쌀이고 보리고 배불리 먹은 기억이 없어. 여기서 자라 다른데 시집 갈 때까지 쌀 서 말을 못 먹고 시집갔거마는." 10년이 지나서야 농지가 제 구실을 해 1980년대에는 제대로 수확을 할 수 있었다. 신상호 노인회장은 "그렇게 힘들게 농사를 지어온 농민과 귀한 쌀을 나라가 푸대접한다"며 "세계 곡물시장의 움직임과 우리나라의 농촌 사정을 제대로 살펴보아야 한다"고 걱정했다.
 
지금 대항마을에는 120가구 약 360여 명이 산다. 절반 정도는 농사를 짓고, 절반은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들이다. 이 마을에는 '귀환동포마을'이라는 좀 특별한 지역이 있다. 마을에는 8개 반이 있는데, 그 중 7반이 귀환동포마을이다. 광복 직후 조국에 돌아온 동포들을 위해 만든 집단 주거지역이다. "방 하나 정지(부엌) 하나로 만들어진 집이었는데, 한 때는 50가구가 살았던 적도 있었어. 이제는 그 사람들도 다 떠났어. 그 곳에는 뒤에 들어온 일반 주민들이 지금 15가구 정도 살고 있어." 마을 할머니들은 이야기 거리가 하나씩 나올 때마다 추억을 되살렸다.
 

▲ 대항마을에서는 다급한 일, 중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종을 울렸다. 그 종이 그대로 남아있다. 여전히 맑은 소리를 낸다.
김이진(57) 이장은 환경이 오염되지 않았을 때는 마을의 도랑 어디서든 낚시를 했다고 들려주었다. "대작대기에 지렁이 한 마리 매달면 메기, 뱀장어가 올라왔어요. 너무 많아 다 못 먹고 버릴 정도였지. 도랑에 친구들이 죽 서서 목욕하고, 고기를 건지면서 자랐어요. 환경이 많이 오염됐지만, 최근 화포천을 다시 살리고 있어 다행이에요."
 
김 이장은 기자를 마을 뒷산 종각으로 안내했다. "요즘은 스피커를 사용하지만 예전에는 마을에 급한 일이 있으면 이 종을 쳤다. 주로 큰물이 들어올 때 이 종을 쳐서 위험을 알렸던 것 같다"며 주먹으로 종을 가볍게 쳤다.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종을 세게 치면 마을사람들이 '비상소집'할까 봐 크게 울려보진 못했지만, 오랫동안 마을을 지키고, 사람들을 모으며 묵묵히 제 역할을 수행한 이 종은 대항마을의 문화재라 불러도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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