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자 사무국장(왼쪽 세번째)과 카쿠분켄 회원들.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 키타큐슈 카쿠우치 문화 연구회(카쿠분켄)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한국인 여성 김성자 씨는 '카쿠우치'의 가장 큰 매력을 이렇게 꼽았다. 하긴 카쿠우치에서는 부자이건 노동자이건 동전 몇 푼이면 충분했다. 술 한 잔 하자는데 지위고하나 연령이나 출신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게 술의 매력이고, 그런 게 진정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닌가.

'다찌집'이라는 아주 독특한 방식의 술집이 있다. 소주나 맥주 몇 병을 주문하면 통영 인근 바다에서 잡힌 해산물을 중심으로 푸짐한 술상이 차려진다. 폼나는 일품요리는 없지만, 하나같이 신선하고 경상도 해안가 특유의 카랑카랑한 손맛이 느껴지는 안주들이다. 술을 추가하면 안주도 덩달아 늘어나기 때문에 술꾼들의 술병은 하릴없이 비워지기 마련이다. 지금은 통영의 명물이 되어 관광객들의 발길도 꾸준히 이어진다.
 
다찌집은 서서 마시는 술집이라는 뜻을 가진 일본어 '다찌노미'에서 비롯되었다. 일제 강점기 통영은 남해안 수산업의 중심 도시로서 일본인이 많이 살았다. 자연스레 일본 용어가 일반화됐을 것이고, 그 과정에 다찌노미는 곧 '술집'을 뜻하는 단어로 정착되었다. 한때 일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실비집'이란 명칭이 유행하기도 했고, 다찌가 '다 있지'라는 우리말에서 비롯되었다는 기발한 해석이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찌'라는 상호를 가진 술집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이제 '다찌집'은 통영에서 만날 수 있는 독특한 술집을 일컫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일본의 다찌노미는 조선시대의 주막처럼 에도시대부터 있던 간이술집이다. 엽전 한 두푼을 내고 간단하게 목을 축일 수 있는 곳이었다. 특히 1960~1970년대 고도성장기에 접어든 일본에서 다찌노미는 노동자·서민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안식처였다. 덕분에 장기불황에 빠진 최근 몇 년 사이 다찌노미는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희망도 사그러들고 주머니도 얇아진 일본인들에게 직장이나 역 근처에서 만나는 다찌노미는 40~50년 전 그때처럼 안식처 역할을 한다. 요즘에는 맥주나 와인 등을 전문으로 하는 특화된 다찌노미까지 등장하고 있다.
 

▲ 요즘 일본에서는 서서 마시는 술집 '다찌노미'가 유행이다.
후쿠오카현 키타큐슈 시에는 술을 서서 마신다는 형태는 같지만,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카쿠우치(角打ち)'가 지역의 명물로 정착되어 있다. 다찌노미는 술을 서서 마실 뿐 엄연히 주점 허가를 받아야 하는 업종인데 반해, 카쿠우치는 주류판매점 한 켠에 선반이나 맥주상자를 쌓은 간이테이블을 만들어 잔술이나 병맥주 따위를 팔던 곳이다. 조리시설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안주라고 해봐야 캔, 어육소시지, 땅콩 등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일본 어디에나 있던 이런 공간이 왜 유독 키타큐슈에서만 활성화되고 '카쿠우치'라는 독자적인 이름까지 갖게 되었을까? 이는 지역의 특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일본의 5대 공업지대의 하나인 키타큐슈는 이미 1901년에 국영 제철소가 세워지면서 중화학공업지대로 전략적으로 개발됐다. 키타큐슈에는 노동자가 몰려들었고, 공장은 24시간 3교대로 풀가동 되었다. 고된 노동에 지친 노동자들에게는 술집에 느긋하게 앉아 술을 즐길 여유도 돈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잠을 청하자니 삶이 너무 각박했을 터. 때문에 집 근처 주류판매점에 마련된 카쿠우치는 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한편, 제철과 중화학공업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연료 공급이 관건이었다. 키타큐슈 인근에 있는 치쿠호지역은 일본의 대표적인 탄전으로 19세기 후반부터 본격 개발되었다. 키타큐슈가 중화학공업지대로 발전한 배경에는 치쿠호의 석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39년에서 1944년까지 치쿠오탄광에는 약 10만여 명의 조선인이 강제 징용되었다.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작업장에서 1만여 명이 넘는 조선인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이들 가운데 다행히 조국 땅을 밟은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수가 그대로 일본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키타큐슈공업지대의 노동자가 되었다.
 
▲ 카쿠우치는 단순히 술을 마시는 공간이기 보다는 지역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이다.
카쿠우치가 기자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키타큐슈의 카쿠우치는 비단 일본인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강제징용을 당해 이국 땅에서 생을 보낸 조선인들의 고단한 삶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던 곳이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생활의 여유가 생기고, 산업구조의 변화로 중화학공업이 쇠퇴함에 따라 키타큐슈의 위상 또한 예전같지 않다. 이에 따라 카쿠우치의 숫자 또한 많이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키타큐슈 시에는 아직도 200여 곳의 카쿠우치가 남아 있다. 카쿠우치가 가진 지역적·역사적 가치에 주목한 시민들 가운데 몇몇은 이를 지역을 대표할만한 문화 아이콘으로 키우기 위해 '키타큐슈 카쿠우치 문화 연구회(카쿠분켄)'을 만들었다.
 
카쿠분켄은 지역 내 카쿠우치의 현황과 특징 등을 조사하고, 카쿠우치의 가치를 알리기 위한 출판·홍보 활동을 벌이고 있다. 2005년 8명이 의기투합해 시작한 것이 지금은 회원수 250여 명을 헤아린다. 회원들의 성별·연령·직업 등은 딱히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회비도 회칙도 없이 오로지 이메일을 통해서만 정보를 교류하는 자발적이고 느슨한 모임을 지향하지만, 회원들의 참여 열기는 의외로 뜨겁다. 이들의 활동 덕분에 이제 카쿠우치는 키타큐슈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정착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카쿠분켄의 사무국장이 한국인 여성이라는 점이다. 대학 졸업 후 일본에서 20여 년 넘게 살고 있는 김성자 씨는 현재 키타큐슈의 로컬매거진을 발행하며 카쿠분켄의 사무국장으로서도 할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 카쿠우치의 안주는 대부분 소박하고 간단한 것들로 구성돼 있다.
김 사무국장의 안내로 키타큐슈시의 카쿠우치 몇 곳을 취재했다. 어디든 일단 술값이 저렴했다. 주점 가격이 아닌 소매가격이기 때문이다. 안주 역시 몇 백 엔 수준에 불과했다. 예전에는 캔에 든 안주가 대부분이었지만, 요즘은 조리사면허를 획득해 간단한 안주를 조리해 주는 곳도 더러 생겼다. 정형화되고 그럴듯한 요리라기보다는 집에서 간단히 해먹을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소박함이 오히려 정겹게 느껴졌다. 500엔 짜리 동전 하나면 어떻게든 술 한 잔은 할 수 있다. 취할 때까지 마시는 공간이 아니기에 서서 마시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카쿠우치는 주인장의 성격에 따라 혹은 동네 분위기에 따라 각양각색이었다. 이 또한 카쿠우치만의 매력이다. 카쿠분켄이 왜 카쿠우치를 지역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생각했는지 그제서야 이해가 됐다. 이곳은 지역민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공간임에 분명했다. 때문에 카쿠우치는 일종의 지역민들의 사랑방과 같은 역할을 한다. 동네 소식과 주민들의 근황이 교류되고 전파되는 전통적 커뮤니티였다. 이방인의 방문에 처음에는 약간 신경을 쓰는 듯한 눈치였지만 이내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경계심이 허물어지니 오히려 살가운 태도를 보였다. 스스럼없이 술 한 잔을 권하다 기분이 내키면 부담없이 한 잔 내는 소소한 재미와 인정도 느낄 수 있었다. 여기나 거기나 사람 사는 모습은 매한가지였다.

▶카쿠분켄 홈페이지 http://www.kakubunken.jp





박상현 객원기자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