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서상동(西上洞)으로 임진왜란 때 순절한 송빈(宋賓)을 기리기 위해 '송공순절암(宋公殉節岩)'이라 새기고 비석을 세워둔 바위, 사실은 고인돌이 있다. 이 지역은 지금은 많이 파괴되고 사라졌지만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가 상당히 많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보면 이 지역은 가야시대 이전부터도 많은 귀족들이 생활하고, 생을 마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 바로 수로왕릉이 있으니 김수로왕의 삶과 정치 또한 이전의 세력들이 그러했듯 이 주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이 갑자기 아이를 배어 달이 차서 알을 낳았는데, 사람으로 변하자 이름을 탈해라고 하였다. 그는 바다를 건너 가락국으로 가더니 거리낌 없이 대궐로 들어가 왕에게 '내가 왕 자리를 뺏으려고 왔다'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왕위에 오르게 하여 나라와 백성을 편안히 하라고 하였으니, 천명을 어기고 왕위를 주거나 우리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는 없다'고 하였다. 탈해는 기술로 겨루어 승부를 가리자고 하였다. 탈해가 매로 변하니 왕은 독수리가 되었고, 탈해가 다시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변하였는데, 그 사이에 조그마한 틈도 없이 변화무쌍하였다. 조금 있다가 탈해가 본 모습으로 돌아오자 왕도 제 모양으로 돌아왔다. 탈해가 항복하면서 '내가 술법을 다투면서도 죽음을 면한 것은 성인(聖人)이 죽이는 것을 싫어하는 인덕(仁德)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왕위를 다투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고는 절을 하고 물러났다. 부근 교외의 나루터로 가더니 중국 배가 와서 정박하는 물길을 차지하려고 하였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다가 난을 일으킬까봐 급히 배 500 척을 보내어 쫓아내었더니 탈해는 서라벌 근방으로 달아났다.
이 이야기를 보면 앞에서 보았던 이학규의 '啓金盒(계금합)'이라는 시 가운데 이런 부분이 생각난다.
많은 사람 깔깔깔 비웃는 소리 | 羣笑赥赥(군소혁혁) |
이후 인도 아유타국(阿踰 國)에서 왔다고 알려진 허황옥을 왕비로 맞이하여 왕국의 기틀을 마련한 김수로왕은 왕비가 157세로 승하하고 난 10년 뒤 158세로 뒤를 따랐다. 나라 사람들은 몹시 슬퍼하다가 대궐의 동북쪽에 왕릉을 마련하였으니, 높이가 한 길이고 둘레가 300보였다고 한다. 지금의 왕릉이 당시의 것이라고 한다면, 왕릉의 서남쪽 봉황대를 중심으로 한 대궐의 위치와 왕릉의 위치는 정확히 설명된 것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상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다른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현재의 우리가 김수로왕이 구지봉에서 나타나고 왕위에 오르고 외부 세력과 연합하거나 견제하면서 나라를 완성하는 과정을 상상하여 그려내기에 충분하도록 한다.
이제 김수로왕의 위대함과 그가 영원히 가락국을 지키며 잠들어 있는 능을 읊은 시를 보자.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조선조 최초로 예문관과 홍문관의 양관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대문장가로 1481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편찬을 완료하기도 하였다. 그가 김해를 방문한 것은 아마도 <동국여지승람>의 편찬 이전인 듯하다. 그는 수로왕릉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김해의 지난 일 누구와 이야기할까 | 金陵往事與誰論(금릉왕사여수론) |
<서거정·首露王陵(수로왕릉)> |
옛 금관가야를 다스리던 수로왕과 구간, 백성들은 모두 사라지고, 그때 함께 미친 듯 춤추며 소리치며 불렀던 구지가도 들리지 않는다. 이젠 수로왕의 외로운 무덤과 우륵(于勒)의 영혼인 듯 가야금의 오묘한 곡조만 남았다. 가야금은 대가야(大伽倻)의 가실왕(嘉實王:500년대)이 중국 악기를 보고 만들었다고 한다. 551년(진흥왕 12) 가야국이 어지러워지자 악사 우륵은 가야금을 들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진흥왕은 그를 국원(國原:충주)에 살게 하고, 대내마(大奈麻) 법지(法知)와 계고(階古), 대사(大舍) 만덕(萬德)을 제자로 삼게 하였다. 비록 가야금은 김해지역 금관가야가 아닌 경북 고령지역 대가야에서 나온 것이지만 가야 문화의 대표가 되었고, 김수로왕은 가야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지금 우리가 그러하듯 시인 서거정 또한 이 둘에서 그 옛날 가야를 느꼈다.
다섯 번째 구절의 동타(銅駝)는 중국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 때, 구리로 만들어 장안(長安) 궁성의 서액문(西掖門) 밖에 세워두었던 낙타인데, 위(魏)나라 명제(明帝)가 이것을 낙양(洛陽)으로 옮겨 궁궐 문 앞에 두었으니, 이후 멸망한 나라의 상징이 되었다. 극(戟)은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 창으로 김해를 두르고 있는 산의 모양을 묘사한 것이다. 여섯 번째 구절의 옹중(翁仲)은 돌로 만들어 무덤 앞에 세워둔 거친 수염과 건장한 체구의 석인(石人)이다.
구지봉에서 수많은 백성들의 환호 속에 나타나 160년 동안 가야를 다스린 김수로왕. 그와 그가 다스린 나라의 위용은 크나큰 창처럼 두르고 있는 산자락과 쓸쓸히 이울어지는 석양 속 짙은 나무 그늘에 가려진 쓸쓸한 무덤으로만 남았음을 시인은 가련해하고 있다.
다음은 서거정보다 몇 십 년 뒤에 읊은 정희량(鄭希良:1469∼?)의 시다. 그는 1498(연산군 4)년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의주(義州)에 유배되었다가, 1500년 5월에 김해로 옮겨졌고 이듬해 풀려났다. 이 당시 그는 김해에서 많은 시를 읊었다. 다음은 그가 수로왕릉에 들러 읊은 시다.
시대가 달라지니 공이 어찌 남으랴 | 代異功何在(대이공하재) |
<정희량, 首露王陵(수로왕릉)> |
인간이 이룬 공과 자취는 세월이 흐르면 사라지고, 잊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연은 김수로가 나라를 다스리던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사라진 왕의 자취를 슬퍼하며 두견새가 수심의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아직껏 김해에는 그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남아 있는 듯하고, 사람들의 모습에는 당시의 자취가 끼쳐 있다. 김수로왕의 영향은 풍속과 사람들의 마음속에만 남아 있으나, 자연은 가야 시대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눈앞에 뚜렷이 남아 있으니 인생의 영욕이 그 얼마나 허무한가!
정희량은 이듬해(1501) 봄에 모친 상을 당하였는데, 갈 수가 없어 늘 애닯고 울적함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하늘에 호소할 길이 없더니, 수로왕릉이 아주 신령스럽다는 소문을 듣고 슬픔의 글을 지어 호소하였다. 그날 밤 꿈에 신령스러운 사람이 나타났는데, 대단히 건장하고 눈에는 겹눈동자가 있었다. 소리쳐 말하기를 '너는 풀려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어 그것을 기억하였더니 그해 가을에 풀려났다. 이는 참으로 수로왕의 덕이 그의 능에 가득해 영험한 것인가! 시를 지어 그의 유풍을 노래한 덕인가!
김수로왕은 가야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옛 사람들은 그의 능에서 옛 가야의 흥망을 생각하였으며, 이를 노래한 시도 그 수가 적지 않다. 따라서 한 번에 많은 시와 시인들을 모두 소개하기가 어렵다. 다음 회에 계속 소개하기로 한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