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탄다. 피죽(통나무의 표면에서 잘라낸 널조각)을 몇 개 집어넣으니 기다렸다는 듯 불꽃이 확 일었다.
짙은 주홍빛의 불길, 아름다웠다. 진례면 담안리 72 '미교다물요'. 도예가 정민호 씨의 작업공간이다.
지난 19일 오전 9시. 미교다물요의 장작가마에 올들어 첫 불이 들어갔다. 첫 불의 온기가 겨울 추위를 잊게 했다.
다섯 개로 연결된 터널식 장작가마 안에 차곡차곡 쟁여진 도자기들은 약 40시간 동안 불꽃의 마술 속에서 다시 태어날 참이었다.
그 장작가마 앞에는 좋은 작품이 나오기를 고대하는 도예가의 마음을 담은 막걸리 한 병이 놓여 있었다.

▲ 도예가 정민호가 불이 한창 타오르는 장작가마에 피죽을 넣고 있다. 장작가마 앞에서 불을 때는 작업은 40여 시간 계속된다.  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

정민호의 작업공간인 '미교다물요'의 입구에는 예쁜 벽돌로 지은 살림 공간이 있고, 마당으로 들어서면 작품들이 전시된 집이 따로 한 채 그리고 마당 끝에 장작가마가 자리잡고 있다. 정민호는 3일 전부터 아내와 함께 가마 안에 도자기들을 쟁여두었는데, 이날 마침내 불을 넣은 것이다.
 
"저는 가마 안에서 도자기를 쌓고, 아내는 나르고…. 사실 이것도 무척 힘든 일이에요. 지금부터는 약 40시간 가까이 장작가마 앞을 지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 있습니다."
 
얼마 전 인근으로 귀촌한 친구가 불을 넣는 사이, 잠시라도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쉬어야 하는 그를 붙들고, 미안한 마음은 접어둔 채 인터뷰를 진행했다.
 
정민호는 1957년 경북 경주시 건천읍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 바로 옆에 박목월 시인의 생가가 있었어요." 그는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이주했지만, 고향인 건천읍의 풍경을 좋아한다며 옛 일을 잠시 더듬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를 곧잘 했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가정 형편을 생각해 부산공예학교에 1기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부산공예학교는 장학금 지급, 기숙사 무료, 대학 연계 프로그램 같은 좋은 조건으로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했던 터였다.
 
"중학교 때까지는 제가 미술을 잘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공예학교 시절에도 큰 재미를 못 느꼈지요. 학교를 졸업한 뒤, 도자기 그릇을 생산하는 회사에 취직했는데, 그 곳에서도 별다른 매력을 못 느꼈어요. 군대를 제대한 뒤 스스로를 가만히 돌아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쭙잖은 사람이 되어 있더군요.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를 생각한 끝에 결국 이 길을 택했습니다. 그래도 배운 게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요."
 
그는 그러다 1985년 진례면 초전리에 '미교다물요'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분청도자기를 굽기 시작했다. 담안리로 옮겨 온 것은 1999년이다. 그런 저런 세월이 어느덧 40년을 바라보고 있다.

도자기는 손이 아니라 머리로 만드는 것
여기까지, 이쯤이면 됐다 하고 멈출 줄 아는 '감'이 가장 중요하죠

제 작품들은 거창하지 않고 투박해요 그래서 오히려 정겹고 익숙한 듯 하죠

전통과 현대 넘나들 수 있는 분청작업
형태와 모양·질감 다양한 표현이 매력


그는 공예학교 시절, '김해요업'에 실습을 여러 번 온 덕에 김해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진례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엔 장작가마와 가스가마를 같이 했는데, 장작가마만 본격적으로 한 것은 10년 정도 된다. 정민호는 분청도자기 그릇과 작품에 관한 한, 마니아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누리고 있는 작가이다. "제가 만든 그릇을 보러 오고, 사기도 하는 분들이 고마워서, 또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열심히 만들고 또 만들고 하다 보니 이름이 좀 알려졌나 봅니다."
 

▲ 정민호의 작품들은 아내가 고른 목가구 안에 진열돼 있다.
그는 오전 6시면 작업장으로 출근하는데, 오후 11시까지 작업을 계속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그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주는 건 역시 아내이다. 자신이 만든 도자기 그릇의 샘플을 들고 전통찻집 등을 방문하며 판매 경로를 알아보러 다녔을 적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그를 가장 잘 이해해 주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존재가 되어 주었다. 전시공간에는 아내의 안목으로 사 모은 찬장과 약장 등의 목가구가 있는데, 정민호는 이 목가구에 작품들을 진열해 두고 있다.
 
장작가마에 불을 넣는 것은 일 년에 평균 다섯 번 정도다. 이번이 딱 50번째 불이 들어가는 날이었다. "성형작업에 두 달, 가마작업에 한 달이 걸려요. 가마에 불을 넣기 전에 초벌구이를 하고, 무늬를 넣고, 유약을 바르고…기본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제법 많습니다. 그렇게 치면 도자기 가마작업 기간이 한 달 정도 걸리는 거죠. 장작가마에 불을 넣을 때는 늘 처음처럼 두렵고 떨려요. 유약이 불에 어떤 반응을 보여 어떤 작품으로 나올지는 미리 알 수 없습니다. 어떨 때는 가마가 식고 난 다음, 겁이 나 가마를 열지 못할 때도 있어요. 가마를 열어 살짝 들여다봤을 때, 이번에는 망쳤구나 했는데 좋은 작품이 나올 때도 있고, 이번에는 잘 나왔구나 했는데 안에서는 무너져 있는 경우도 있어요. 장작가마 안에 불이 들어가는 순간부터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움직여 도자기를 탄생시키는 겁니다. 지금부터 제가 할 일은 장작가마 안에 불이 천천히 잘 들도록 밤새도록 지키고 앉아 불을 때는 것입니다."
 
정민호가 분청작업에 매달리는 이유는 여러가지 형태의 작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분청작업은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며 형태, 질감, 문양을 다양하게 표현해낼 수 있다는 게 매력이죠."
 
그는 공예학교 시절, 스승들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고 말했다. "당시의 스승님들은 실력이 뛰어났고, 의욕이 넘쳤습니다. 그런 고수들의 손짓 하나를 보기만 해도 공부가 됐지요." 그는 무엇보다 그런 스승들에게서 '감'을 배웠다. "잘 만들어 보겠다는 욕심에 끝까지 붙들고 있다가는 오히려 작품을 망치는 경우가 있어요. 여기까지, 이쯤이면 됐다, 하면서 멈출 줄을 아는 것, 그런 감을 갖는 게 중요하지요."
 
그는 그러면서 '도자기는 손이 아니라 머리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눈이 곧 머리죠.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하면서 만드는 거예요. 손이 머리의 지시를 받는 거지요. 손이 잘 만들고 싶다고 해서 잘 만들어지나요? 머리가 '이만큼 했으면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결정하면 손을 떼는 거지요. 전 별로 거창하게 만들고 싶지 않고, 그래서 제 작품은 조금은 투박해 보일 지도 몰라요." 사실 그렇다. 그의 작품은 언뜻 투박해 보인다. 작품도 두껍고 무겁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 오래 두고, 오래 쓴 물건처럼 정겹고 낯익다.
 
이쯤 해서 두 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민호의 작업장을 이르는 '미교다물요'는 그의 딸 사랑을 담은 이름이다. '미교다물요'에서 '다물'은 옛 땅을 되찾는다는 뜻의 고구려 말인데, '미교'는 두 딸의 이름 '은미'와 '은교'에서 한 자씩 따 온 것이다. 이토록 사랑하는 두 딸의 짝, 그러니까 정민호의 사윗감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정민호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장작가마에 불 잘 때는 사람이면 됩니다." 그렇게 말해 놓고 그는 한참 웃었다. 도예가에게 있어 장작가마에 불을 땐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고, 같이 불을 때는 사람과는 그만큼 마음이 잘 맞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미교다물요'의 사위 되는 법, 쉽고도 참 어렵겠다.

>> 정민호의 주요경력
1985년 '미교다물요' 설립. 1996년 대한민국 도예대전 특선 수상, 1997~1998년 공예품 경진대회 특선, 장려. 2000년 공예품 경진대회 동상. 2001~2002년 공예품 경진대회 장려, 특선. 2001년 세계 도자기 엑스포 조직위 선정(한국의 100대 요장) 2001년 세계 도자기 엑스포 타임캡슐(1천년) 매장. 2003년 부산롯데화랑 개인전, 2008년 대백갤러리 개인전, 2004년 일본 후쿠오카전·2008년 오사카전 외 단체전과 소그룹전 수십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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