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나라가 여기저기 남아 있구나 | 故國周遭在(고국주조재) |
<홍위, 過金海首露王陵口占(과김해수로왕릉구점)> |
김해의 유물과 유적에, 산천에, 김해인들의 모습과 언행에 가락국의 자취는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시대를 열었던 영웅 김수로왕은 시든 가을 풀에 덮힌 무덤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가락국의 찬란함을 온 천하에 드리웠던 그는 사라지고, 이제 천하를 비추는 것은 그의 위광인 듯 변함없는 달빛이다. 홍위가 이 시를 읊던 당시의 김해평야는 칠점산을 등대 삼아 띄운 바다였다. 바다를 무대로 해상왕국의 위용을 떨쳤던 김수로왕과 가락국은 사라지고 드넓은 바다를 비추는 달빛만 남아 오랜 세월 사람을 안타깝게 한다.
선조께서 그 해에 나라를 여셨지 | 鼻祖當年開大邑(비조당년개대읍) | |
<허적, 謁首露王陵三首(알수로왕릉삼수) 是余始祖 又(시여시조 우)> |
이 시의 작자 허적(1563∼1641)은 수로왕릉에서 세 수의 시를 남겼는데, 제목에서 '바로 나의 시조다(是余始祖)'라고 하였다. 그는 양천(陽川) 허씨로, 시조 허선문(許宣文)이 허왕후의 30세손이다. 허선문은 고려때 대광공(大匡公)으로 봉해졌으며, 대대로 공암촌(孔巖村·지금의 경기도 김포군 양촌면 일대)에 살면서 농사에 힘써 거부가 되었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군량을 보급해준 공으로 공암촌주가 되었고, 후손들이 양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허적은 1613년(광해군 5) 양산(梁山) 군수로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 그의 조상인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유적을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지봉 붉은 기운 이미 천년이 흘러도 | 龜峯紫氣已千秋(구봉자기이천추) | |
다음은 허적보다 약 100년 후 수로왕릉을 찾은 최천익(崔天翼:1710~1779)의 시를 보자. 그는 대대로 흥해군(興海郡)의 아전이었지만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며, 그 후 10여 년 동안 군의 아전으로 생활한 것을 제외하고는 사방으로 배우러 다니며 학문에 힘썼다.
가락국에 가을바람 불어오니 | 秋風駕洛國(추풍가락국) | |
<최천익:수로왕릉> |
수로왕릉이 언제 조성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661∼681) 당시 한 번 정비했던 것은 사실이다. 문무왕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문명왕후(文明王后)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문명왕후는 김유신(金庾信·595~673)의 누이인 문희(文姬)다. 김유신은 김수로왕의 12대 손이다. 이로 볼 때 문무왕이 김수로왕의 능을 정비하도록 한 것은 외손으로서 당연한 것이라고 하겠다.
김수로왕의 후손인 김유신과 외손인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했다. 석탈해와의 경쟁에서 이겼다가 이후 신라에 복속당한 김수로왕의 가락국은 이때 와서 김유신과 문무왕에 의해 부활한 것인가?
수로왕릉은 고려 문종 때에 부분적으로 수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 세종 때 본격적인 정비를 하였다. 이때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기 위한 돌을 세우고, 후에 다시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혔다. 선조 때(1580)는 영남관찰사(嶺南觀察使)이자 후손인 허엽(許曄)에 의해 상석·석단·능묘 등이 갖추어졌다. 인조 때(1647)에는 왕이 후손 허적(許積)에게 묘비문을 짓게 하고 <가락국수로왕릉(駕洛國首露王陵)>이라 새긴 비를 세웠다. 고종 때(1865)는 숭선전(崇善殿)을 중수하는 등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후손들은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 두 차례 제사를 지내고 있다.
아무리 화려한 수의로 몸을 감싼들 죽음은 모든 것을 과거로 남긴다. 가락국을 열어 해상왕국의 위용을 온 천하에 떨쳤던 김수로왕. 그는 이제 황량하게 바람 불고 낙엽지는 무덤에 누워있을 뿐이다. 꼴꾼이나 나무꾼은 왕릉에서 꼴이나 땔나무의 채취를 금하는 법 때문에 접근할 수 없고, 지나가는 어떤 사람도 이곳에 관심을 갖거나 참배를 하지 않아 섬돌에는 이끼가 끼어 있다. 그래도 왕릉이기 때문에 수시로 새로 정비되었고, 후손들이 있어 제사가 옛 법식을 잊지 않고 이루어지니 다행이라고 하겠다.
왕릉은 옛 성의 서쪽 | 王陵古城西(왕릉고성서) | |
<이학규, 金州府城古迹十二首贈李躍沼, 首露王陵 (금주부성고적십이수증리약소, 수로왕릉)> |
이학규(1770∼1835)가 수로왕릉을 찾은 인조 때(1647)는 후손 허적에 의해 정비가 이루어진 지 150년 이상 흐른 뒤라 많이 황폐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이러한 왕릉의 황폐를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들에 의해 이루어진 도굴과, 수시로 이어지는 무당들의 굿과 관련지어 읊고 있다.
두 번째 구절의 당부(堂斧)는 도끼 모양인 사마귀의 앞발이라는 뜻의 당랑지부(螳螂之斧)로서, 모양만 그럴듯하지 힘은 없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 구절의 현화(玄和)는 중국 당(唐)나라 때의 현인(賢人)이었던 이필(李泌)이다. 이는 힘이 있는 듯하지만 빈 껍질이었던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과 당시 활약하였던 현인들을 비유한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수로왕릉에 보물이 많이 묻혀 있다는 소문이 나자 도둑들이 늘 노리고 있다가 도굴을 하기 위해 왔었는데, 갑옷과 활을 든 장수가 나와 화살을 비오듯 쏘아 7∼8명을 죽였고, 뒤에 다시 오자 30자나 되는 큰 뱀이 사당에서 나와 눈을 번쩍거리며 8∼9명을 물어 죽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수로왕릉을 둘러싼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이러한 이야기는 이후 수로왕릉의 도굴을 불러왔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험을 비는 장소로 생각하도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