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로왕릉 경내에 조성되어 있는 연못. 김해 시민들을 비롯한 많은 관람객들에게 휴식을 제공한다. 김해뉴스 DB
전 회에서 소개한 정희량 보다 약 100년 후 김해를 찾은 홍위(洪瑋:1559~1624)의 시를 보자. 시의 제목은 '김해 수로왕릉을 지나면서 짓는다(過金海首露王陵口占)'이다. 제목에서의 '구점(口占)'은 '구호(口號)'와 함께 시간을 두고 짓고 다듬는 것이 아닌 즉흥시를 말한다. 따라서 이 시는 그가 김해를 지나는 길에 잠시 머물러 즉흥적으로 지은 것이라고 하겠다.
 

옛 나라가 여기저기 남아 있구나
시든 풀 해질녘 가을의 거칠어진 왕릉
번화함은 바다에 뜬 달에 남아 있나니
얼마나 많은 이들 그 빛에 마음 아파했을까

故國周遭在(고국주조재)
荒陵暮草秋(황릉모초추)
繁華餘海月(번화여해월)
曾照幾人愁(증조기인수)

   
 <홍위, 過金海首露王陵口占(과김해수로왕릉구점)>  


김해의 유물과 유적에, 산천에, 김해인들의 모습과 언행에 가락국의 자취는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시대를 열었던 영웅 김수로왕은 시든 가을 풀에 덮힌 무덤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가락국의 찬란함을 온 천하에 드리웠던 그는 사라지고, 이제 천하를 비추는 것은 그의 위광인 듯 변함없는 달빛이다. 홍위가 이 시를 읊던 당시의 김해평야는 칠점산을 등대 삼아 띄운 바다였다. 바다를 무대로 해상왕국의 위용을 떨쳤던 김수로왕과 가락국은 사라지고 드넓은 바다를 비추는 달빛만 남아 오랜 세월 사람을 안타깝게 한다.


선조께서 그 해에 나라를 여셨지
후손이 오늘 황폐한 무덤에 제사 올린다
쓸쓸한 연기 어둑어둑 시든 풀숲을 헤매고
오랜 나무는 푸릇푸릇 조각구름에 들었네
의젓하고 빛나는 의식 보기 어렵고
신령스런 자취는 떠도는 소문뿐이라네
온 몸으로 조아려 절하고 오래 섰더니
푸른 바다 아득히 가을 해 기울어지네

鼻祖當年開大邑(비조당년개대읍)
耳孫今日奠荒墳(이손금일전황분)
寒煙漠漠迷衰草(한연막막미쇠초)
古木蒼蒼入斷雲(고목창창입단운)
咺赫威儀難可覩(훤혁위의난가도)
神明事績但空聞(신명사적단공문)
披搸稽拜還延佇(피진계배환연저)
碧海蒼茫秋日曛(벽해창망추일훈)

   
 <허적, 謁首露王陵三首(알수로왕릉삼수) 是余始祖 又(시여시조 우)>  

 
이 시의 작자 허적(1563∼1641)은 수로왕릉에서 세 수의 시를 남겼는데, 제목에서 '바로 나의 시조다(是余始祖)'라고 하였다. 그는 양천(陽川) 허씨로, 시조 허선문(許宣文)이 허왕후의 30세손이다. 허선문은 고려때 대광공(大匡公)으로 봉해졌으며, 대대로 공암촌(孔巖村·지금의 경기도 김포군 양촌면 일대)에 살면서 농사에 힘써 거부가 되었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군량을 보급해준 공으로 공암촌주가 되었고, 후손들이 양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허적은 1613년(광해군 5) 양산(梁山) 군수로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 그의 조상인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유적을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 구지봉으로 내려온 여섯 개의 알 모양을 상상해 만든 조형물. 원래는 구지봉 꼭대기에 있던 것을 수로왕릉 경내의 연못가로 옮겨두었다.
위대한 가락국을 열고, 김해 김씨와 허씨의 뿌리가 된 김수로왕. 그의 기운인 듯 쓸쓸한 연기와 서늘한 기운이 숲으로 둘러싸인 능을 감싸고 있다. 그 옛날 김수로왕과 가락국의 영광은 어디로 갔는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하고 선 후손의 마음은 아득히 바다에 비치는 가을 햇빛처럼 스산하기 짝이 없다.
 

구지봉 붉은 기운 이미 천년이 흘러도
민속은 남아 있어 성스런 은택 흐르네
조정과 저자 황폐해져 차가운 낙엽 모이고
산하는 적막하여 어두운 연기 떠도네
어지러운 봉우리 석양은 성가퀴에 기대었고
깊숙한 포구 밀려오는 조수는 뱃마루에 기댄다
이제 알겠네 신의 적선에 기쁜 일 영원하여
지금 후예들이 이 나라에 가득한 줄을

龜峯紫氣已千秋(구봉자기이천추)
民俗猶看聖澤流(민속유간성택류)
朝市荒蕪寒葉聚(조시황무한엽취)
山河寂寞暝煙浮(산하적막명연부)
亂岑斜照憑城堞(란잠사조빙성첩)
深浦歸潮倚舵樓(심포귀조의타루)
始覺神休餘慶遠(시각신휴여경원)
至今遺裔滿靑丘(지금유예만청구)

   
   
이 시 또한 허적의 것이다. 시인은 위대한 가락국의 왕이었던 김수로를 추억하는 한편, 후손으로서 자신의 조상 김수로왕을 기리고 있다. 김수로왕이 이루었던 가락국은 이미 사라졌어도 구지봉에서 시작된 가락국의 기운은 천년토록 김해 사람들의 삶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김해를 둘러 지켜선 산봉우리와 성벽, 수로왕릉 저 앞 포구에 정박한 배에 철썩이는 바다 물결. 평화롭고 아름다운 이 나라에 후손인 김씨와 허씨가 가득한 것은 조상 김수로왕의 적선(積善) 때문임을 시인은 확신하고 있다. 지금도 많은 김해 시민들에게 넉넉한 이야기를 제공하는 역사 유적으로서, 휴식을 위한 공원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 김수로왕은 아직도 적선을 멈추지 않고 있다 하겠다.
 
다음은 허적보다 약 100년 후 수로왕릉을 찾은 최천익(崔天翼:1710~1779)의 시를 보자. 그는 대대로 흥해군(興海郡)의 아전이었지만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며, 그 후 10여 년 동안 군의 아전으로 생활한 것을 제외하고는 사방으로 배우러 다니며 학문에 힘썼다.
 

가락국에 가을바람 불어오니
낙엽이 지는구나 옛 왕릉
어느 해에 장사 지냈던가
나그네가 이끼 낀 섬돌에 오른다
꼴꾼과 나무꾼들 옛 금기를 지키고
향불은 지금도 옛 법식 따른다
무덤 앞길은 적막도 하여라
흥망 느끼며 가만히 읊조려 본다
 

秋風駕洛國(추풍가락국)
黃葉古王陵(황엽고왕릉)
玉匣何年葬(옥갑하년장)
苔階過客登(태계과객등)
蒭蕘存舊禁(추요존구금)
香火至今仍(향화지금잉)
寂寞楸前路(적막추전로)
沈吟感廢興(침음감폐흥)

   
 <최천익:수로왕릉>  

 
수로왕릉이 언제 조성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661∼681) 당시 한 번 정비했던 것은 사실이다. 문무왕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문명왕후(文明王后)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문명왕후는 김유신(金庾信·595~673)의 누이인 문희(文姬)다. 김유신은 김수로왕의 12대 손이다. 이로 볼 때 문무왕이 김수로왕의 능을 정비하도록 한 것은 외손으로서 당연한 것이라고 하겠다.
 
김수로왕의 후손인 김유신과 외손인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했다. 석탈해와의 경쟁에서 이겼다가 이후 신라에 복속당한 김수로왕의 가락국은 이때 와서 김유신과 문무왕에 의해 부활한 것인가?
 
수로왕릉은 고려 문종 때에 부분적으로 수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 세종 때 본격적인 정비를 하였다. 이때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기 위한 돌을 세우고, 후에 다시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혔다. 선조 때(1580)는 영남관찰사(嶺南觀察使)이자 후손인 허엽(許曄)에 의해 상석·석단·능묘 등이 갖추어졌다. 인조 때(1647)에는 왕이 후손 허적(許積)에게 묘비문을 짓게 하고 <가락국수로왕릉(駕洛國首露王陵)>이라 새긴 비를 세웠다. 고종 때(1865)는 숭선전(崇善殿)을 중수하는 등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후손들은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 두 차례 제사를 지내고 있다.
 

▲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위패를 모셔둔 숭선전(崇善殿). 봄·가을 이곳에서 두 분을 기리는 제사를 올린다.
시 세 번째 구절의 옥갑(玉匣)은 옥으로 만든 옷이라는 뜻의 옥의(玉衣)로, 금루옥의(金縷玉衣)의 줄인 말이다. 이는 중국 한(漢)나라 때 왕이나 제후가 죽으면 시신에 입혔던 수의(壽衣)로서, 직사각형의 작은 옥판을 금실(金縷)이나 은실(銀縷)로 꿰매어 만들었던 대단히 화려한 수의다.
 
아무리 화려한 수의로 몸을 감싼들 죽음은 모든 것을 과거로 남긴다. 가락국을 열어 해상왕국의 위용을 온 천하에 떨쳤던 김수로왕. 그는 이제 황량하게 바람 불고 낙엽지는 무덤에 누워있을 뿐이다. 꼴꾼이나 나무꾼은 왕릉에서 꼴이나 땔나무의 채취를 금하는 법 때문에 접근할 수 없고, 지나가는 어떤 사람도 이곳에 관심을 갖거나 참배를 하지 않아 섬돌에는 이끼가 끼어 있다. 그래도 왕릉이기 때문에 수시로 새로 정비되었고, 후손들이 있어 제사가 옛 법식을 잊지 않고 이루어지니 다행이라고 하겠다.
 

왕릉은 옛 성의 서쪽
안타까워라 미약한 힘 보여
오랑캐가 현화를 일으켰구나
옹중이 비바람에 누웠고
해마다 고을의 무당이
숲 속에서 방자하게 가무 한다

王陵古城西(왕릉고성서)
依依見堂斧(의의견당부)
卉寇發玄和(훼구발현화)
翁仲臥凮雨(옹중와풍우)
秊秊里中巫(년년리중무)
林間恣歌舞(임간자가무)

   
 <이학규, 金州府城古迹十二首贈李躍沼, 首露王陵
  (금주부성고적십이수증리약소, 수로왕릉)>
 


 이학규(1770∼1835)가 수로왕릉을 찾은 인조 때(1647)는 후손 허적에 의해 정비가 이루어진 지 150년 이상 흐른 뒤라 많이 황폐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이러한 왕릉의 황폐를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들에 의해 이루어진 도굴과, 수시로 이어지는 무당들의 굿과 관련지어 읊고 있다.
 
두 번째 구절의 당부(堂斧)는 도끼 모양인 사마귀의 앞발이라는 뜻의 당랑지부(螳螂之斧)로서, 모양만 그럴듯하지 힘은 없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 구절의 현화(玄和)는 중국 당(唐)나라 때의 현인(賢人)이었던 이필(李泌)이다. 이는 힘이 있는 듯하지만 빈 껍질이었던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과 당시 활약하였던 현인들을 비유한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수로왕릉에 보물이 많이 묻혀 있다는 소문이 나자 도둑들이 늘 노리고 있다가 도굴을 하기 위해 왔었는데, 갑옷과 활을 든 장수가 나와 화살을 비오듯 쏘아 7∼8명을 죽였고, 뒤에 다시 오자 30자나 되는 큰 뱀이 사당에서 나와 눈을 번쩍거리며 8∼9명을 물어 죽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수로왕릉을 둘러싼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이러한 이야기는 이후 수로왕릉의 도굴을 불러왔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험을 비는 장소로 생각하도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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