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차(67) 전 태광실업 회장. 1980년대 중반, 그는 김해지역 최고의 기업인이었다. 패기 있고 야심만만한 그는 자수성가한 김해 기업인의 대명사였다.
 
기자의 부모는 당시 김해군청(지금의 세무서) 주변 골목에서 음식을 팔았다. 메뉴는 꿩, 토끼, 멧돼지 등. 요즘 같으면 웰빙 음식점이었지만 당시에는 허름한 C급 '야생동물 식당'에 불과했다. 부모님은 그를 '회장님'으로, 때로는 '동생'으로 불렀다.
 
그는 우리 식당에 가끔 들렀다. 갓 잡은 싱싱한 산토끼 등 야생동물을 즐겨 먹었고, 어떤 때는 '야생동물의 피'가 몸에 좋다며 마시기도 했다. 동물의 피는 비린내가 많이 났다. 기자는 그가 피를 마실 때면 생마늘을 까서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니, 우리 집 자식 또래인데 참 착하네!'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부친은 기자에게 그를 '삼촌'으로 부르라고 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그가 삼촌이라니, '월남 스키 부대'만큼이나 터무니 없는 일이었지만, 기자는 하릴없이 부친의 명을 받들었다.
 
그 삼촌은 통이 컸다. 한 번은 그가 '마늘을 너무 열심히 잘 깐다'며 기자의 소원을 물었다. 숫기가 없었던 기자는 '미키마우스 시계요!'라고 말했다. 그 삼촌은 시계를 사라며 지갑에서 만 원짜리 석 장을 꺼냈다. 당시 김해~부산 남포동 구간의 버스비가 200원이 채 안 될 때였으니, 만 원짜리 석 장이면 세뱃돈에 목을 매지 않아도 1년을 거뜬히 버틸 수 있는 거금이었다. 그날부터 기자는 삼촌을 '회장님'으로 불렀다. 회장님은 기자의 롤모델이었으며 우상이었다.
 
세월은 흘렀다. 기자는 2008년 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낙향하면서, 부산일보의 김해 담당 사회부 기자로 파견됐다. 김해에 와서 들은 회장님의 근황은 참담했다. 지역 언론계에서는 '박 회장은 (촌지를 마구 주는데)친한 사람을 만나면 왼쪽 안 주머니로, 안면만 있는 사람한테는 오른쪽 주머니로 손이 간다'는 말이 설화처럼 떠돌았다. 소년의 영웅이었던 회장님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설화는 얼마 뒤 '게이트'로 비화했고, 회장님은 감옥으로 갔다.
 
올 초부터 회장님의 특별사면설이 나돌았다. 기자는 특사설에 대한 지역 여론을 취재했다. 여론조사 결과(본보 지난달 30일자 1면 보도)에서는 찬성이 근소하게 앞섰다. 하지만 현장의 여론은 대체로 특사에 부정적이었다. 상당수 인사들은 "박 회장이 지역경제에 대한 공헌보다는 태광실업과 회장 개인의 이익 실현에 매진했고, 각종 문화사업도 비즈니스 차원에서 접근했다"고 꼬집었다.
 
우여곡절 끝에 특사는 불발됐다. <김해뉴스>는 지역 여론을 가감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보도했다. 태광실업 측은 "회장님이 지역경제와 문화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큰데 기사는 부정적으로 나왔다"며 섭섭해 했다. 회사 측은 '국익과 지역경제' 차원에서 특사에 대한 찬성 여론을 부각시켜 주길 바란 듯했다. 기자는 태광실업 측에게 말했다. "취재해 보니 박 회장이 이번 기회에 좀 더 성찰을 하고, 진정으로 김해의 큰 기업인으로 거듭나길 바라는 목소리가 많았습니다."
 
태광실업 경영진과 실무진들은 옥중의 박 회장을 수시로 만나 세상 밖의 일을 보고한다고 한다. 다음 번 면회 때는 <김해뉴스> 신문 한 부를 들고가 지역여론을 가감없이 전달하면 좋겠다.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니, 진정성 있는 여론은 달게 마음에 새기시라는 뜻이다.
 
개인적으로는 박 회장을 다시 삼촌으로 부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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