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정봉 정상 부근의 돌탑군락.
겨울을 지나며 오래도록 겨울비가 내린다. 메마른 산과 강이 젖고, 허허로운 벌판도 촉촉하게 비에 젖는다. 오랜만에 사람들의 가슴에도 비가 내리는데, 몇몇 그리운 이들과 따뜻한 술자리라도 차리면 참으로
기껍겠다. 큰 비가 온 다음날, 진례 평지마을을 찾는다. 산 속에 묻혀 있듯이 고즈넉하다. 김해의 대표적인 닭백숙마을로 늘 사람들이 북적이던 곳인데, 겨울이 깊고 비까지 온 마당이라 적요하기만 하다. 간혹 개 짖는 소리 들리고, 전날 내린 겨울비로 계곡 물소리만 크고 웅숭깊다. 빈 나뭇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이
선명하다. 햇살도 고와 따뜻한 양지에는 동네 강아지 두어 마리 꼬박꼬박 졸고 있다.


이번 산행은 김해의 생태하천, 화포천의 물줄기를 품고 있는 대암산 능선 군(群) 중에서 신정봉(707m) 쪽 자락을 오른다. 평지마을에서 대암산 방향 임도를 따라 걷다가 신정봉 능선을 타고 683m봉을 지나 정상에 오른 후, 돌탑군락을 지나 대암산 안부 갈림길 이정표, 평지마을로 하산하는 코스이다. 이번 코스는 길게 이어진 임도를 따라 호젓하게 걸으며, 계곡 물소리에 귀를 씻어내는 여유로운 산행이 될 것이다.
 
마을을 지나 임도를 따른다. 임도 갓길로 물기 머금은 낙엽들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고, 낙엽 사이사이로 고개를 내민 새싹들이 파릇파릇 싱그럽다. 물방울을 달고 있는 모습이 함초롬하면서도 영롱하다.
 
길을 오를 수록 다양하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왁자하다가 또 잦아들기를 반복한다. 새소리와 함께 임도를 몇 번 휘돌아 들다보니, '송정'과 '신월, 대청' 방면 갈림길을 만난다. '신월, 대청' 쪽으로 길을 잡는다.
 

▲ 아직 잠이 덜 깬 겨울산이지만 큰비 내린 뒤 계곡 곳곳에서는 제법 세찬 물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아직 깊은 잠의 산. 그 산 속에 거처를 정한 모든 것들은 숙면 중이다. 그래서 산으로 오르는 길은 텅 비어 있다. 모든 번뇌 털어버린 나무숲과 그 가지 끝에 걸려 있는 명징한 햇살이 역광에 걸려 반짝일 뿐이다. 멀리 계곡 물소리와 짐승 발자국 소리만 가끔 들려온다.
 
햇볕은 다사롭고 바람 또한 부드럽다. 홀로이 산으로 스며드는 나그네의 마음은 차라리 새로운 생명을 찾으러 가는 길이다. 삼라(森羅)가 잠들어 있는 산에는 이미 물길이 열리고, 빈 가지 끝의 물소리만으로도 세상은 촉촉하게 물이 오르니 말이다. 그래서 외줄기 산길은 세상을 만나러 가는 길이고, 사람의 일생을 반추하러 가는 길이다.
 
임도 위로는 대암산 능선이 편안하게 길을 따른다. 길을 한 번 크게 돌아드니 물소리가 갑작스레 크게 들린다. 임도와 계곡이 만나는 지점, 빠른 물길이 계곡 사이로 급박하게 흐르고 있다. 채 녹지 않은 얼음을 뚫고 쏟아지는 물줄기가 온 산을 깨울 기세다.
 
이후부터 물소리는 나그네와 함께 산을 오른다. 산모롱이도 지나고, 언덕배기도 오른다. 그러다 또 다른 계곡을 만나 물소리와 물소리가 화음을 맞추며 서로 어우러진다. 오롯한 음색으로 명랑하고 힘차게 물길을 연주하는 것이다.
 
계곡 옆으로는 신정봉과 대암산 안부로 오르는 이정표가 보인다. 계속 임도를 따른다. 큰 바위 하나, 임도에 버티고 서 있다가 애꿎게 정을 맞았다. 반쪽의 바위는 어디로 갔을까? 깨지지 않은 부분에 피어있는 돌이끼가 바위의 오랜 세월의 풍상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 대암산에서 바라본 신정봉.
계곡과 임도의 두 번째 만남. 두 물줄기가 만나 한 계곡으로 합쳐지는 합수지점에서, 물소리는 귀가 멀 정도로 주변의 것들을 압도한다. 그러나 그 큰 물소리로도 산으로 더욱 깊어지는 나그네의 고요한 마음까지는 깨우지 못함이다.
 
부드러운 임도는 끝도 없이 이어지고, 그 길은 이리 구불 저리 구불 하며 나그네를 산으로 인도하고 있다. 잠시 뒤돌아보니 대암산 능선이 햇살에 묻혀 포근하게 펼쳐져 있다. 숨바꼭질 하듯 모롱이마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세 번째 계곡을 만나고, 그 물소리에 잠시 몸을 기대어 쉬다가 다시 길을 따른다. 산이 깊어지자 물소리도 점점 아득해지고 바람은 사나워진다. 잠시 후 임도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오른쪽 산길로 방향을 잡는다. 이 길이 신정봉 능선과 합류하는 곳이다.
 
길 따라 홀씨를 다 털어낸 억새들이 줄지어 서 있고, 산길 뒤로는 멀리 남산재가 어렴풋이 잡힌다. 비음산과 대암산을 가르는 경계이자, 김해사람과 창원사람을 이어주던 고개이다. 임도 따라 잠시 고갯길에 오르자 신정봉으로 향하는 이정표가 보인다. '707 신정봉 1.5㎞'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신정봉으로 오르는 길은 밤송이가 뒹구는 밤나무 낙엽길이다. 낙엽 아래로는 얼어있던 땅이 녹으며 발목까지 푹푹 발이 빠진다. 발자국이 찍힌 자리마다 윤기 도는 검은 부엽토가 반질반질하다.
 
본격적인 비탈길을 오르면서 나무에 기대앉은 바위들이 돌무지를 이루고 있다. 참나무와 바윗돌들이 서로 사이좋게 기대어 진례 벌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돌무지 옆으로 길을 내며 바위를 살펴보니, 파릇파릇한 이끼들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있다.
 
작은 전망대에 오르자 진례 지역이 보이기 시작하고, 골짜기에서는 연신 찬바람이 치고 올라와 사람 몸을 움츠리게 한다. 참나무 숲 사이로 길이 왼쪽으로 크게 꺾어지는데, 오른쪽으로 삿갓모양의 신정봉이 우뚝 솟아 있다. 남성적인 힘이 느껴지는 산세이다.
 
돌무지는 계속되고 길은 적당한 오름세를 유지한다. 다시 전망대. 이곳에서는 진례벌판이 처음으로 제 모습을 다 보여준다. 탁 트인 벌판이 사람 속마음마저 다 드러내게끔 한다. 매봉산~황새봉~금음산 능선들이 길게 이어져 있고, 낙동강과 양산의 제산들이 멀리 잡힌다. 전망대 뒤로는 신정봉이 눈앞에 보이듯 가까이에 다가와 있다.
 
작은 오솔길을 만나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람이 자고, 따뜻한 햇살 속에 능선만 졸음 겨워하고 있다. 그 길 따라 진달래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나그네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놓아주지를 않는다.
 
산줄기 따라 급한 경사가 시작된다. 길은 물기를 머금어 질척거리고, 발길을 옮겨놓을 때마다 허방에 빠지는 느낌이다. 이 비탈을 제법 오르고 나서, 숨을 잠시 몰아쉴 때쯤에야 683m봉에 도착한다.
 
봉우리에는 조그마한 공터가 자리하고 있고, 길 양 옆으로는 깊은 낭떠러지가 서있다. 이 봉우리에 서면 신정봉이 바로 정면에서 조망이 된다. 길섶으로는 참나무와 진달래나무가 이리저리 휘어진 채 큰 바람을 맞고 있는 것을 본다.
 
신정봉을 앞에 두고 잠시 길은 내리막을 걷는다. 능선 밑으로 낭떠러지의 칼바람이 푸른 하늘 위로 날카로운 울음을 운다. 그 울음 따라 길은 내리고, 다시 또 그 길은 오르막을 탈 것이다. 세상의 이치가 다 이러할진대, 나그네의 마음이야 더 할 요량이 있겠는가?
 
신정봉 안부에서 창원 쪽으로 바라본다. 멀리 불모산 능선과 창원 앞바다가 아스라하다. 정상을 향해 마지막 급박한 경사를 오른다. 급한 비탈에 자리 잡은 벤치 하나, 진례 쪽으로 전망이 시원하다. 급한 경사를 오르니 시야의 전망도 급격히 트인다.
 
깔딱고개를 지나고 돌무지를 잠시 타고 오르니 곧이어 신정봉(707m) 정상이다. 정상에는 '대암산', '용지봉'의 이정표와 큰 규모의 돌탑이 우뚝 서 있다. 용지봉 가는 능선으로 낙남정맥의 산줄기가 환하고, 불모산과 젖꼭지처럼 생긴 웅천의 시루봉도 펼쳐진다.
 
창원 앞바다의 윤슬은 누부시게 글썽이고, 대암산 쪽으로는 완만한 능선이 소잔등처럼 편안하게 누워있다. 진례벌과 더불어 멀리 김해 시가지도 조망이 되고, 신어산 군의 능선들도 길게 펼쳐져 있다.
 
모든 것이 다 조망되는 산, 신정봉. 정상의 돌탑에서 돌탑의 의미를 새긴다. '부처의 어미'가 깃든 '불모산'을 마주하며 돌 하나 얹는 것이다. 나그네가 오르는 이 길들이 올바른 자들이 걸어간 길이었으면, 나그네가 지나간 이 길들을 슬기로운 자들이 뒤따라 걸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돌 하나 또 얹어 염원을 쌓는다.
 
▲ 신정봉 정상 부근의 칼바위.
길을 내린다. 편안한 마음으로 길을 내리다 돌탑 군락지를 만난다. 수많은 돌탑들이 쌓아올린 사람의 정성과 염원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서 있다. 그냥 돌을 던지듯 무더기로 쌓아올린 돌탑이 아니라, 석탑의 형식을 빌려 옥개석(屋蓋石)까지 갖춘 돌탑이다.
 
돌탑 뒤로 병풍처럼 둘러싼 칼바위 능선에 조심스레 오른다. 대암산 능선과 비음산 능선, 남산재와 정병산, 노현산과 노티재 등 김해의 서쪽 산줄기들이 열을 지어 일제히 달려가는 품새다. 그 산들을 일별하다보니 가슴이 시원하게 뚫린다.
 
내리는 능선으로 햇살이 온화하다. 진달래 군락에서도 곧 움이 틀 것 같은 포근함이 다가온다. 진달래 꽃길을 걷듯 푹신한 낙엽길을 걷는다. 길을 내릴수록 앞에 보이는 대암산이 점점 크게 다가온다.
 
큰바람에 오른쪽으로 누운 소나무 숲 벤치에서 잠시 목을 축인다. 바람은 시원하고 햇볕은 따뜻하다. 오래도록 이들과 노닐다 보니 노곤한 졸음이 몰려온다. 이제 평지마을로 내려가면 산행은 끝이 난다. 그래, 해도 남았는데 빨리 내려가서 무엇 하리. 양지바른 이곳에서 잠시나마 남가일몽(南柯一夢)을 꿈꾼들 무에 대수란 말인가? 꿈은 꿈일 뿐, 속세를 떠나 이곳에 가부좌 틀고 잠을 청하는 것조차,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는 터인데….






최원준 시인 /문화공간 '守怡齊수이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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