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을 볼 때, 한 칸 만화 형식의 '시사만평'을 보면서 무슨 의미인지 고개를 끄덕거렸다면 당신은 그 신문의 가장 중요한 기사를 이해한 것이다. 시사만평은 기사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촘촘하게 박혀 있는 글자들을 보느라 피로한 눈을 잠시나마 시원하게 하고, 때로는 무릎을 칠만큼 감탄하는 촌철살인의 묘미도 느낄 수 있다. <김해뉴스>에도 시사만평이 있다. 강길수(47) 화백의 만평이 이번 호로 100회를 맞았다. 100번째 만평을 기념하며, 어떤 사람이 만평을 그리는지 궁금해 하는 독자들을 위해 강길수의 작업공간을 찾아가 보았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그는 컴퓨터로 작업을 하는데다 친구의 화실에 얹혀 작업을 하는지라 특별한 공간이 없다. 외동 서광아파트 상가 2층에 있는 '김기영 수채화 화실' 한편에 강길수의 책상이 있다. 비록 책상 하나이지만, 그림으로 만나 의기투합한 친구가 내준 책상에 앉아 강길수가 털어놓은 지난 여정이 더 큰 공간을 연상하게 한다.

▲ '김기영 수채화 화실'의 왼편에 수채화 화가 김기영의 작업공간이 있고, 오른편에 강길수가 만화를 그리는 책상이 놓여 있다.

외동 아파트상가 2층 수채화 화실 좁은 오렌지색 칸막이 공간 안에서
아이디어를 짜고 스케치를 하며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보며 그려낸다

강길수는 경남 하동군 청암면 명호리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하동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군대를 다녀왔다. 제대 후에는 부산의 둘째 형 집에서 살며 유명제화업체 판매장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셋째 형과 함께 신발장사를 했다. 고등학교 때 만난 첫사랑과 결혼했는데, 간호사로 병원 잘 다니고 있는 아내를 설득해 옷장수로도 나섰다. 장사는 그런대로 잘 됐다. 그는 아내와 함께 1996년 김해로 와서, 서상동시장 안에 '세일타임'을 열었다. 아내 박국선(45) 씨가 김해의 가게를 맡고 있고, 그는 부산 진시장에서 의류소·도매상을 운영하고 있다. 의류판매상인 강길수 이야기는 이쯤하고, 만평을 그리는 강길수 이야기로 넘어가자.

강길수의 고백 하나.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앞에서 선생님은 열심히 수업을 하고 있는데, 꼬마 강길수는 공책에 만화를 그리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공책 두 페이지에 걸쳐 '6·25'를 배경으로 칸 만화를 빼곡하게 그려 넣었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선생님이 눈앞에 와 있었다. '들켰구나, 난, 이제 죽었다'라고 생각한 순간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은 공책을 들고 가면서 "수업 마치면 교무실로 와"라고 말했다. 교무실에서 선생님은 만화를 자세히 보더니 "이거 정말 니가 그렸나?"하고 물어왔다. 선생님 눈빛이 '이 놈 봐라, 잘 그렸네' 하는 듯 했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조금 마음이 놓였다. 선생님은 공책을 선선히 내어주며 "가지고 가"라는 말을 했을 뿐, 야단은 치지 않았다. 꼬마 강길수는 선생님이 자신의 만화 실력을 인정해주는 것 같아 은근히 기뻤다. 그 이후로 그림을 그릴만큼 넉넉한 여건이 안돼서 만화는 못 그렸지만, 이 일은 그의 가슴에 '만화'를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됐다.

고백 둘.
어떻게 해서든 만화를 그리고 싶었다. 그는 허영만의 만화 <오! 한강>을 보고 난 뒤, 그 문하에서 만화를 그리겠다는 포부를 안고 서울로 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였다. 권투선수를 꿈꾸던 친구와 함께 서울로 가 일단 가방공장에 취직했다. 서울 생활을 위한 경비마련을 위해서였다.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하고 첫 월급을 받던 날, 두 친구는 공장 앞에서 헤어졌다. 친구는 권투 도장을 찾아, 강길수는 주소 하나 들고 허영만 화백의 집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그냥 찾아가면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지하상가에서 옷도 한 벌 사 입었다. 그리고 보무도 당당하게 계단을 따라 지상으로 올라 선 순간, 그의 눈 앞에 재미있는 풍경이 나타났다. 야바위꾼을 둘러 싼 사람들이었다. 그게 뭔가 궁금해서 들여다 본 순간, 야바위꾼의 덫에 걸려 든 그는 한 달치 월급을 다 날려버렸다. 사정 사정 해 겨우 1만원을 되돌려 받아 허영만 화백의 집에 도착했는데, 아뿔싸 꿈에도 그리던 허영만 화백은 취재여행을 떠나고 없었다. 문하생 서넛이 있었는데, 만화 배우러 왔다니까 한 번 그려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다방에 앉아 볼펜으로 만화를 그려 가져갔더니, 한 3일 있으면 허 화백이 돌아올테니 기다려 보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서울에서 3일을 지낼 돈이 없었다. 강길수는 하는 수 없이 다시 고향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 허영만 화백을 만났더라면 제 운명이 어떻게 됐을까요?" -어떻게 되긴요. <김해뉴스>에서 강길수 화백의 만평을 못 봤겠지요!-

▲ <김해뉴스>에 시사만평을 그리고 있는 강길수 화백이 만화가를 꿈꾸어 온 삶의 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컴퓨터에는 지금까지 그린 만화가 저장돼 있다. 김병찬 기자 kbc@

만화 그리기를 좋아했던 시골 소년은 결혼 후 늦깎이 대학생으로 졸업한 뒤
본격 시사만화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고백 셋.
늘 만화가 그리고 싶었다. 군대에서는 훈련 마치고 침상에 누워 상상으로 만화를 마음껏 그렸다. "직접 그려본다고 실력이 느는 게 아니에요. 제 경우는 계속 생각하는 동안 아이디어가 자꾸 떠오르고, 상상력이 총동원되면서 그림 실력이 늘어났어요." 제대 후 장사를 하면서도 틈틈이 그림을 그리던 그에게 2002년, 우연찮게 기회가 왔다. 알고 지내던 부산의 모 경제지 편집장이 신문에 만화를 그려달라는 연락을 해온 것이다. 신문 전면 크기의 컬러 코믹만화였다. 그는 일주일에 석 장씩 만화를 수작업으로 그렸다. 어느 날 편집장이 "요즘은 컴퓨터로도 만화를 그린다. 포토샵을 배우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강길수는 "학교를 가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장사하느라 바쁘고 힘든 아내에게 마음을 털어놓았는데, 만화에 대한 열정을 알고 있었던 아내는 흔쾌히 동의했다. '바빠서 길게 학교 다닐 상황이 안되니까, 짧게 다니자'고 결정하고 부산예술대학교 만화과에 입학했다. 37세에 2003학번 늦깎이 대학생이 된 그는 공부 열심히 하고, 열심히 만화를 그리는 생활을 계속했다. 장사를 맡겨둔 아내에게 미안해 공부를 파고 든 덕분에 2년 내내 장학금으로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고백 넷.
2005년 2월 대학을 졸업한 뒤, 교수로 모셨던 안기태 화백이 회장을 맡고 있던 '부산카툰클럽'에 가입했다. 1년에 두 번씩 전시회도 하면서 시사만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시사만화에 마음이 끌렸어요. 재미있다,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는 당시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지면이 있다면 최대한 열심히 하겠다'는 결심을 다졌다고 한다. 지면을 찾기 위해 전국의 주간지 편집장들에게 무조건 메일을 보냈다. 그때 연락이 온 신문이 통영의 <한산신문>이다. 2006년부터 한산신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강길수 시사만화'의 시작이었다.

"정말 그리고 싶은 것이 뭐냐구요?
 짧지만 감동이 있는 에세이 만화죠"


고백 다섯.

▲ 그는 종이와 붓 대신 태블릿과 태블릿펜으로 그림을 그린다.
김해에 살고 있는 그에게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김해뉴스>의 창간이었다. "이 신문에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그는 2011년 1월 5일, '먹물중독'이라는 아이디로 <김해뉴스> 인터넷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에세이만화를 올렸다. 며칠 후 <김해뉴스>에서 연락이 왔고, 강길수는 <김해뉴스>의 시사만평 코너를 맡았다. 그의 첫 만평은 2011년 2월 23일자에 실렸다. 이번 111호에 실리는 만평이 꼭 100번째다.
 
"지역 주간신문에 만평을 그리는 일은 중앙 일간지에 그리는 것보다 더 힘든 것 같아요. 중앙지의 경우, 국가적 이슈라서 독자들이 만평의 내용을 금방 알아채지만, 지역의 경우 그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아는 일이 허다하니까요."
 
그는 주말에 <김해뉴스>가 다음 주에 실을 기사 내용을 전달하면, 아이디어를 짜고, 자료 수집을 한 후 스케치를 한다. 지역 소식에다 공감을 이끌어낼 나라 소식을 양념으로 끼워넣어 내용을 정하고, 구도를 잡고, 내용을 수정 보완한 다음, 펜 터치를 한 후 색 작업을 한다. 컴퓨터 작업보다 손으로 작업하는 게 훨씬 빠르지만, 그러자면 재료비가 많이 들어간다고 한다. 시간으로 계산하자면 5시간이지만, 사실은 하루를 꼬박 걸려 작업한다. 그렇게 해서 완성한 만평을 월요일 오전 3시쯤 <김해뉴스> 웹하드에 올린 뒤 비로소 잠자리에 든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가는 작고한 고우영(1938~2005)이다. 고우영의 그림체를 좋아하는데, 고우영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일지매>를 특히 감명 깊게 봤다. "고우영 선생님 작품은 스케일이 큽니다.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보는 그 생각의 깊이가 좋았습니다."
 
한편, 그가 정말 그리고 싶어 하는 것은 에세이 만화이다. 짧지만 감동이 있는 에세이 한 편을 간결하게 표현한 만화이다. 그가 그린 에세이 만화가 궁금한 독자들을 위해 이번 호 <김해뉴스> 인터넷판에서는 강길수가 2011년 1월 5일 <김해뉴스>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올렸던 에세이 만화 한 편을 함께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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