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황옥이 배를 타고 와서 매어두었다는 전설을 기리기 위해 설치한 유주정(維舟亭). 건물 사이 저 멀리 공장 앞쪽에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 배를 매었다는 유주암(維舟巖)이다.
지금까지 가락국의 상징이자 김해의 상징인 김수로왕의 영원한 안식처인 능을 둘러보았다. 이제는 그의 왕비이자 김해 허(許)씨의 선조인 허왕후의 능으로 가본다.
 
<삼국유사>에는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이라는 제목으로 현재 허왕후릉 앞에 있는 파사탑 또는 진풍탑(鎭風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김해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가야일 때 세조(世祖) 수로왕의 왕비이신 허왕후께서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갑신(甲申:48)에 서역(西域:인도) 아유타국(阿踰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 공주께서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에 배를 띄우고 동쪽으로 가려는데 물결 신의 노여움에 막혀 어쩔 수 없이 돌아가서 부왕(父王)께 여쭸다. 부왕이 이 탑을 싣도록 하자 쉽게 항해할 수 있어 남쪽 바닷가에 배를 대었다. 붉은 돛, 붉은 깃발에다 구슬로 장식한 아름다운 배가 나타났으니 지금 그곳을 주포(主浦)라고 한다. 허왕후가 처음 언덕 위에 비단 바지를 벗어 놓은 곳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깃발이 처음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한다. 수로왕은 예의를 갖추어 맞이하고 함께 150여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 찬양하고 있다.
 

붉은 돛배에 가득 실은 붉은 깃발 가벼워라
항해하기 쉬운 건 그렇다 쳐도 파도가 놀란다
어찌 바닷가에 닿아 허황옥을 도왔을 뿐이랴
천고의 남쪽 왜놈들 성난 고래같은 물결 막았네

載厭緋帆茜旆輕(재염비범천패경)
乞靈遮莫海濤驚(걸령차막해도경)
豈徒到岸扶黃玉(개도도안부황옥)
千古南倭遏怒鯨(천고남왜알노경)

   
   
파사석탑을 실은 허왕후의 배는 바람을 잠재웠다. 석탑의 도움으로 그녀는 김수로왕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 이뿐이겠는가? 이후 이 탑은 김해를 공격하는 왜구들조차 막아내었으니 진정한 김해의 수호탑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김수로왕이 허황옥을 맞이하기 위해 신하를 보내 기다리게 했다는 망산도(望山島).
허왕후가 처음 들어왔다는 용원 바닷가는 부산 신항(新港)과 주변의 공장 건물들로 둘러싸여 그 옛날 바다의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아직도 신하들이 허왕후를 기다렸다는 망산도(望山島)와 배를 매었다는 유주암(維舟巖)이 남아 있고, 근래에는 유주정(維舟亭)을 세워 그 옛날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신비로운 만남을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이광사(李匡師:1705∼1777)는 '붉은 깃발을 맞이하다[迎旗(영천기)]'라는 제목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무려 60구로 이루어져 있어 한꺼번에 보기에 거북하다.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나누어서 감상하도록 하자.
 

김해의 수로왕
알에서 태어나 덕의 빛 넉넉하였지
덕 넉넉하여도 배필 삼기 어려웠네
나이 들어도 왕비가 없었지

金海首露王(금해수로왕)
卵生多德輝(난생다덕휘)
德多難爲配(덕다난위배)
年大無后妣(년대무후비)

   
   
김수로왕은 신비로운 탄생이 증언하듯 보통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에 맞는 배필을 구하는 것은 쉬울 리가 없었다.
 

동쪽 바다로 비단 치장 배 오는데
붉은 돛에 붉은 깃발 날렸지
아유타국의 공주
하늘이 보내어 대궐 맡게 하였지
배를 매고 높은 언덕에 오르더니
바지 벗어 산신령께 예물로 올렸지

東海綵船來(동해채선래)
緋㠶颺茜旗(비범양천기)
阿陀國王女(아타국왕녀)
天遣主閫闈(천견주곤위)
維舟陟高嶠(유주척고교)
解袴贄山靈(해고지산령)

   
   
그러나 하늘의 도움으로 멀리 인도 아유타국에서 허왕후가 비단으로 치장하고 붉은 돛에 붉은 깃발을 단 배를 타고 김수로왕에게로 와 대궐의 안살림을 맡았다. 이에 허왕후는 신의 은혜에 감사의 표시로 비단 바지를 벗어 예물로 올린다.


천을성은 앞에서 길을 이끌어주고
태을성이 제단 이루길 도왔네
화개성은 비취빛 깃을 올리고
동황이 땅을 쓸어 평평하게 하였네
형혹성은 비단 깔개를 펼치고
아명은 금빛 병풍 펼쳐놓았지
사명은 마중을 나오고
장경은 신령스러운 이 맞았네
태호는 깔개를 정중히 하고
빈랑이 신이한 향기를 올렸지
푸른 구름은 명령을 전하고
밝은 달은 등불걸이를 들어올렸네

天一前導引(천일전도인)
太一胥壇形(태일서단형)
華蓋撟翠羽(화개교취우)
東皇掃地平(동황소지평)
熒惑攡錦茵(형혹리금인)
阿明㩹金屛(아명첩금병)
司命出伺候(사명출사후)
長庚爲邀靈(장경위요령)
泰顥敬薦藉(태호경천자)
貧狼獻異馨(빈랑헌이형)
靑雲傳敎令(청운전교령)
明月擎燈檠(명월경등경)

   
   
▲ 원래 파사석탑을 두었다고 알려진 호계사(虎溪寺)로 알려진 연화사(蓮華寺) 전경. 정문으로 들어서 왼쪽 편에 가락국의 궁 가운데 하나였다는 가락고도궁허(駕洛古都宮墟)라는 비석이 서 있다.
사람의 길흉을 판단하는 천을성(天乙星:天一)은 허왕후의 앞길을 인도한다. 하느님의 별인 태을성(太乙星:太一)은 하늘에 올릴 제사를 주관하고, 북두칠성을 둘러싼 별로 제왕의 수레 덮개를 상징하는 화개성(華蓋星)은 비취빛 깃을 둘러 장막을 이루어주며, 봄의 신인 동황(東皇)은 신성한 장소를 마련한다. 화성(火星)인 형혹성(熒惑星)은 반짝이는 비단 깔개를 깔고, 동해의 용인 아명(阿明)은 금빛 병풍을 펼친다. 사람의 생명을 맡은 별인 사명(司命)이 찾아와 안부를 묻고, 저녁에 서쪽 하늘에 보이는 큰 별로 태백성(太白星), 금성(金星)인 장경성(長庚星)이 왕과 왕비를 맞이한다. 서쪽 하늘로 호천(顥天)이라고도 하는 태호(泰顥)는 왕과 왕비가 함께 할 깔개를 정중히 마련한다. 제석천왕(帝釋天王)을 모시는 네 동자(童子) 가운데 하나인 빈랑성군(貧狼星君:목성)은 좋은 향기를 드리우고, 푸른 구름은 하늘의 명을 전하고, 밝은 달이 등불걸이를 들어올린다.
 
배에서 내려 김수로왕과의 만남을 위해 낮부터 밤까지 이동하는 허왕후의 행차를 묘사한 것으로, 시인은 온 우주가 그녀를 김수로왕에게 인도하고 둘이 만나는 자리를 만들어가는 것으로 표현하여 둘의 만남이 천지자연의 당연한 뜻임을 강조하고 있다.


태극은 다음 잔을 올리고
혼돈이 푸른 빛 좋은 술을 따뤘지
봉래산에선 기린의 육포를 내리고
영주에선 엄청난 산해진미 누린다
관음은 떡 궤를 보내어주고
구진이 죽 그릇을 올렸네
저공이 개암과 밤을 받들어 올리니
보는 것마다 눈과 귀 놀라게 했지
개암 크기가 귤과 유자만하고
밤 크기는 솥과 냄비만 하였네
왕께서 이에 축문 읽으니
해마다 24달이로다
일 마치자 왕궁으로 나아가
육례에 맞춰 혼인이 이루어졌지
용모와 자태 온 나라 밝게 비추고
은덕과 혜택은 따뜻한 봄 같았지
진수성찬이 산과 바다 같았으며
훌륭한 의례 모두 말하기 어려웠지
밤 깊어져 잠자리 함께 하니
따뜻한 사랑이 비할 데가 없었네
이듬해 비로소 사내아이 낳더니
드디어는 아홉을 낳게 되었지
좋은 밭엔 나쁜 열매 나지 않는 법
한명 한명이 기린 가운데 왕이었지

太極奠亞獻(태극전아헌)
混沌斟綠醽(혼돈짐록령)
蓬壼贛麟脡(봉곤공린정)
瀛洲享侯鯖(영주향후청)
觀音羞鑨簋(관음수롱궤)
鉤陳進鬻鉶(구진진죽형)
狙公捧榛栗(저공봉진률)
所見駭瞻聆(소견해첨령)
榛大如橘榴(진대여귤류)
栗大如鼎鐺(률대여정당)
太上乃讀祝(태상내독축)
連歲廿四齡(련세입사령)
事畢卽王宮(사필즉왕궁)
六禮婚姻成(륙례혼인성)
容姿燿一國(용자요일국)
德澤似陽春(덕택사양춘)
珍羞如山海(진수여산해)
威儀難具陳(위의난구진)
夜闌同枕席(야란동침석)
情愛無比倫(정애무비륜)
明歲始生男(명세시생남)
遂至生九人(수지생구인)
良田無惡實(량전무악실)
箇箇王麒麟(개개왕기린) 

   
   
둘의 만남을 축하하는 자리에 산해진미가 빠질 수 없다. 이 또한 천지자연이 마련하고 있다. 온갖 산해진미가 차려진 가운데 축제는 이어진다. 아름다운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고, 이후 가락국을 이끌어가는 아홉의 아들로 결실을 맺는다. 아홉 아들 가운데 허왕후의 성을 따르게 한 아들이 있어 김해 허씨의 선조가 되었으니, 시인은 이 사실을 읊으며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허왕후께선 마음이 좋지 않아
속마음을 왕께 말씀 올렸지
아들을 낳는데 아버지 중요하지만
어머니 또한 천륜입니다
아들 모두 아버지 성 따르게 되면
저를 이을 사람 하나 없게 되지요
저의 마음 한 편이 슬퍼집니다
예를 말하자면 고르지 못합니다
왕께서 그 말을 가련히 여겨
막내아들은 어머니 성 따랐지
이제까지 이천년 흐르도록
두 성이 얼마나 번성 했던가
서로 만날 때마다 기뻐하나니
우리는 같은 성의 친척이라네

許后心不樂(허후심불악)
懷抱向王伸(회포향왕신)
生子父是重(생자부시중)
母亦爲天倫(모역위천륜)
子皆承父姓(자개승부성)
無人繼妾身(무인계첩신)
女心偏惆悵(녀심편추창)
舌禮大不均(설례대불균)
君王憐其言(군왕련기언)
末子母姓遵(말자모성준)
至今二千年(지금이천년)
二姓何振振(이성하진진)
相逢輒懽然(상봉첩환연)
我是同姓親(아시동성친)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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