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암산 능선.사방이 훤하게 조망되기 시작하고, 능선 끝자락에 제단을 쌓아놓은 것 같은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진례 신정봉에서 하산하는 길. 봄바람이 그윽하다. 산의 안부까지 내려와 소나무 숲에서, 잠시 가는 길을 접는다. 햇볕 다사로운 곳, 한 토막의 잠으로 남가일몽을 꿈꾸는 중이다. 그러나 그 꿈 또한 헛되고도 헛될 뿐이다. 늘 자연과 벗하고픈 사람의 일생조차도 욕심일 터. 곁에 두고 있는 산봉우리에게도 마음 한편 주지 못하고 만다.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진다. 봄 햇살 따뜻한 산 고개에서 산을 내리다가, 언뜻 다시는 이 아름다운 산길을 송두리째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평지마을 하산 길에서 잠시 주저한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대암산 산봉우리를 바라본다. 자꾸 나그네에게 올라오라 손짓하는 것 같다.
 
그래, 오르자. 대암산을 옆에 두고 내리는 것은, 가야할 길을 앞에 두고 되돌아가는 일에 다름 아니다. 대암산 안부로 다시 내쳐 되돌아 오른다. 안부 소나무 숲에서 꾼 잠시의 꿈이, 온 일생을 산에서 다 보낸 것 같은 마음이다.

갑자기 몸이 가렵다. 아니, 온 마음이 봄기운에 가려우니 몸조차 가려운 것이다. 봄바람이 그렇고 봄볕이 그렇다. 다가오는 봄이 사람 마음을 온통 가렵게 하는 것이다. 아직도 평지마을로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귀에 쟁쟁한데, 봄볕을 등에 진 나그네는 다시 산을 오르는 것이다.
 
다시 시작한 산행은 안부에서 대암산 정상으로 올랐다가, 편안한 능선 따라 장군바위, 608봉, 내대암봉, 남산재를 거쳐 평지마을로 하산하는 코스다. 곳곳에 암릉구간이 있어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산행이 되겠다.
 
다시 오르기 시작한 산의 고도는 한 발자국에 한 뼘씩 시야를 확보하기 시작한다. 산을 오를수록 낙남정맥의 기점인 용지봉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급한 오름세로 오르다 보니 주위의 산들도 따라서 쑥쑥 몸집이 커진다. 오르는 내도록 부드럽게 솔가리가 밟혀 마음 또한 편안하다.
 
▲ 대암산(왼쪽)과 신정봉.
대방 나들목에 선다. 창원으로 오르내리는 대암산 동쪽 등산로이다. 이곳에서부터 서서히 돌무지와 너덜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물결을 타고 오르내리듯 지나왔던 길을 되돌아 본다. 멀리 신정봉 정상이 보인다. 그 옆으로 용지봉과 불모산이 잡힌다. 그리고 진해지역의 산들도 능선을 이루고 물 흐르듯 흐르고 있다.
 
진례벌의 전경도 환하게 펼쳐진다. 여러 산의 능선 속에 폭 파묻힌 형국이다. 진례가 분지 형태의 지역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조금 더 오르자니 너른 터가 나오고, 멀리 대암산 쉼터가 나온다. 중앙에는 우물터처럼 움푹 파진 곳이 있는데, 물이 바짝 말랐다.
 
이곳에서부터는 사방이 훤하게 트인다. 진례 쪽 조망도 그렇고 창원 조망도 역시 그렇다. 신정봉 산줄기와 대암산 능선이 함께 조망이 되는데, 이 두 산 사이로 진례 지역이 안겨 있는 지세다. 대암산 능선 끝으로 제단을 쌓아놓은 것 같은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길 주위로는 제 몸 다 비운 억새들이 덤불을 이루고 있다. 아직 겨울잠에 곤하다. 그러나 억새 사이로 꿈틀대는 봄의 기운은 인력으로 막을 수가 없겠다. 입춘지절의 버들개지가 추위 속에 눈을 틔웠다. 하얀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난 것이, 사람 마음을 마구 간질이고 있다.
 
▲ 대암산 정상석. 해발 669m라는 표시가 선명하다.
길 따라 잠시 더 걸으니 옛 봉화대 흔적의 대암산 정상이 우뚝 서 있다. 마치 천신에게 제를 지내던 제단처럼 신령한 기운이 느껴진다. 정상부의 계단을 오른다. 중앙에 대암산 정상석이 서 있다.
 
대암산(669m). 경상남도 창원시와 김해시 진례면의 경계에 있는 산. 동쪽으로 가락국 설화의 모태인 불모산을 시작으로 낙남정맥의 기점인 용지봉을 거쳐 신정봉으로 이어지다가, 대암산을 거쳐 서쪽 비음산, 정병산 줄기로 이어지는 물결능선의 중심에 있는 산이다. 창원 시가지와 진례면 지역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시원한 능선을 따라 암릉구간이 많아 '등반의 재미가 쏠쏠하다'는 산꾼들의 전언이다.
 
정상에 서서 사위를 바라본다. 일망무제(一望無際), 보이는 것 모두가 거침이 없고 끝이 없다. 한없이 터져오는 전망은 멀리 창원 앞바다를 건너 거제도에 이르고, 낙남정맥의 마루금은 거침없이 지리산 쪽으로 활달하게 내달리고 있다.
 
전 시가지가 펼쳐지는 창원 방면으로 규격화된 방사성 도시의 위용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암산이 창원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나름 있겠다. 대암산 정상에서 자신의 주거지를 내려다 보는 재미가 적지는 않기 때문이다. 진례벌판도 창원에 못지 않게 드넓은 넓이로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서 능선 쪽으로 길을 향한다. 곧이어 암릉구간이 펼쳐지고, 암릉 사이로 난 길을 내린다. 암릉을 거쳐 지나는 길에는 곳곳에 계단이 산재해 있다. 암벽을 만나면 암벽 옆으로 돌아드는 길로 한 발씩 내린다.
 
그렇게 암릉구간을 오르내리는데, 큰 바위 하나가 길을 막고 버티고 섰다. 안내표지판을 보니 '장군바위'란다. 그러고 보니 망루의 지휘소에서 멀리 적을 내다보고 있는 장군의 옆모습과 흡사하다. 장군의 엄중한 기상과 진중함이 바위 곳곳에 묻어있다.
 
얼마나 오래도록 비바람을 버티며 서 있었던가? 대암산이 융기하면서부터 자리 잡고 지금에 이르렀을 텐데, 멀리 지나간 시절의 사람들과 현재의 사람들을 이어주며 시공을 관통하고 있는 듯하다. 꼭 다문 단단한 바위 속에서 오히려 그 시절의 이야기를 오롯이 전해주는 것만 같다.
 
장군바위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길을 내린다. 다복솔과 호젓한 산길이 계속된다. 길가의 벤치 하나 창원 쪽으로 앉아 있다. 따뜻한 햇볕바라기에 푸근함이 잔뜩 묻었다. 편안한 길을 잠시 오르자 608m봉우리가 나오고, 계속 착한 능선을 다독이며 걷는다.
 
능선을 두어 번 오르내리다 보니 다시 552m봉. 늙은 나무 위에 딱따구리 한 마리가 나무를 쪼고 있다. 꽤나 시끄러운 소리에 봄의 생명력이 물씬 느껴진다.
 
552m봉을 지나면서 능선은 칼날처럼 좁다랗게 바위 틈새로 길을 낸다. 밧줄로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계속 암릉 사이로 길은 나 있다. 큰 암벽 사이로 두고 온 길을 돌아간다. 암벽에는 부처손이 군데군데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 사이로 암벽들이 하늘을 가린다.
 
▲ 사람 옆 모습을 닮은 바위.
계속되는 암릉구간. 그 중 한 곳에 사람의 손길이 더해진 곳을 발견한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 돌계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가만 보니 판석을 깔아 계단을 만들었다. 그 정교함이 대단하다. 돌 하나하나를 한 땀 한 땀 수놓듯 바위 사이에 올려 만든 계단이다. 만든 이의 손길이 돌계단을 오르는 사람의 가슴에 아로새겨진다.
 
곧이어 내대암봉. 정상에는 벤치가 몇 개 있고, 그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평지마을이 안온하다. 점점의 집들이 색색의 지붕을 가지고 누워 있고, 그 아래로 평행사변형의 평지저수지가 푸른 하늘을 한 가득 담고 출렁이고 있다. 햇살이 이울며 마을은 고요하다. 편히 쉬는 마을의 목가적인 풍경이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다시 길을 나선다. 곧이어 무명봉에서 급한 경사로 길이 쏟아진다. 남산재에서 내대암봉으로 오르내리는 안부. 암벽이 열을 지어 따라 오르내리는 거칠고 험한 구간이다. 곳곳에서 로프로 길을 내고 있는데, 조심조심 바위를 돌아 길을 내린다.
 
마지막 경사에서 깊이 길이 떨어지며 남산재에 도착한다. 쉼터에서 잠시 배낭을 내려놓는다. 바람이 고요하다. 마음조차 푸근하다. 해는 창원 쪽으로 뉘엿뉘엿 떨어지고 있는데, 하늘색이 그윽하니 사람 마음을 편하게 다독인다.
 
평지마을로 길을 내린다. 이미 평지 가는 길은 그늘 속이다. 그 그늘 아래로 낙엽들이 붉다. 멀리 관음정사의 저녁 예불 종소리가 '뎅~뎅~' 울린다. 사박사박 걷는 발자국마다 종소리가 쌓이며 사람 마음을 흔들어댄다.
 
곧 임도가 나오고 평지마을의 집들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한다. 동네 강아지들 몇몇 몰려다니며 '꽁꽁' 짖는다. 관음정사 저녁 종소리는 이미 그쳤다. 다시 계곡 물소리는 커지고, 산 속 마을은 저녁 어스름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나그네의 마음도 이미 어스름 속으로 깊어지고 있는 중이다.






최원준 시인 /문화공간 '守怡齊수이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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