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에 불린 녹두를 맷돌에 곱게 갈아 노릇노릇 구수하게 부쳐낸 빈대떡.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한 푼 없는 건달이
요릿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

1940년대 유행했던 가요 '빈대떡신사'의 가사 마지막 부분이다. 돈이 없어 요릿집도 기생집도 갈 형편이 못되는 위인은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으란다. 근데 이 빈대떡, 그리 만만히 볼 음식이 아니다. 녹두를 씻어 서너시간 물에 불린 다음 알맹이와 껍질을 분리하고, 알맹이만 걸러 맷돌에 곱게 갈아 돼지기름을 두른 번철에 요령껏 구워야 한다. 이러니 겉만 번지르르 하고 돈 한 푼 없는 건달이 집에 가서 손쉽게 술안주로 장만할 음식이 아니다.
 

▲ 빈대떡은 좋은 재료는 물론이고 철판의 두께, 기름의 양, 전의 두께, 불 조절 등이 조화를 이뤄야 제맛을 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대떡이 이처럼 회자된 것은 서민들의 음식이고 한국인의 일상에 깊이 들어와 있는 음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빈대떡은 그 유래나 어원에 대한 설명 또한 분분하다. 맛칼럼니스트 황교익 선생은 저서 <한국음식문화박물지>에서 빈대떡의 다양한 어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빈대(賓待)떡, 즉 귀빈을 접대하는 떡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이 되려면 한자어 구성원리상 대빈(待賓)떡이라 하여야 하니 후세에 만든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빈자(貧者)떡, 즉 가난한 자의 떡으로 빈자떡이라 하다가 빈대떡으로 바뀌었다는 말이 있다. 중국음식 이름인 병저(餠藷)가 '빙자→빈자→빈대'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빈대떡은 녹두로 부치는 떡인데, 녹두의 사투리에 푸르대가 있다. '푸른 콩'이라는 뜻이다. 이 푸르대가 '풀대→분대→빈대'로 변하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무릇 서민들의 일상 속에 널리 퍼져 전해지는 음식은 이처럼 다양한 어원이 생기기 마련이다. 한국에서 하나의 음식이 서민의 음식이냐 혹은 지배자의 음식이냐를 쉽게 확인해 보는 방법이 있다. 음식 이름에 '할매'를 붙여보면 된다. 할매한정식? 아무래도 이건 좀 어색하다. 할매국밥, 할매국수, 할매추어탕처럼 익숙한 것은 거의 대부분 서민의 음식이다. 빈대떡 역시 할매빈대떡이라고 해야 뭔가 좀 제대로 맛이 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특유의 고소함과 은근한 단맛이 일품인 빈대떡은 막걸리 한 사발의 즐거움과 찰떡궁합을 이룬다.
손옥자 할머니가 2002년 내외동에서 문을 연 '할매빈대떡' 역시 그런 맥락에서 출발했다. 서민의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빈대떡집 하나 없던 김해에서 좋은 재료에 손맛까지 더한 할매의 빈대떡은 순식간에 유명세를 탔다. 택시를 타고 "할매빈대떡 갑시다"라고 하면 모르는 기사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덕분에 돈도 좀 벌었고 여기저기서 분점을 내달라는 요청도 쇄도했다.
 
그 요구를 거절 못해 여기저기 가맹점을 내주었지만 결과는 시원찮았다. 재료를 받아다 그냥 구워내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 맛이 나지 않았다. 맛있는 빈대떡은 재료가 5할이라면 굽는 솜씨가 5할이다. 단지 재료를 익히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맛있게 굽는 요령이 따로 있다. 불 조절, 기름 조절, 뒤집는 타이밍 등등 신경쓸 일이 한 둘이 아니다. 눈대중으로 대충 배워서는 쉽게 재현할 수 없다. 그러니 경험 많은 조리사가 온종일 붙어 있어야 한다. 뜨거운 철판 앞에서 하루 종일 기름냄새 맡으며 빈대떡을 부치는 일은 의외로 중노동이다. 몇 장 부치고 나면 허리가 뻐근해져 온다. 함부로 덤빌 일도 아니고 오래할 일도 아니다. 해서 가맹점도 정리하고 할매도 현역에서 은퇴를 하셨다.
 
▲ 대를 이어 할매빈대떡을 만들고 있는 김경인(오른쪽)·김은주 씨 부부.
다행스럽게 손옥자 할매의 솜씨를 물려받은 아들 김경인 씨와 며느리 김은주 씨가 지난해 9월 삼계동에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이런 내막을 모르는 단골들이 많다보니 가게가 아직은 한산하다. 하지만 아들 부부는 유유자적이다. 녹두를 다룰 줄 알고 빈대떡 부치는 노하우가 있으니 머지않아 손님들이 알아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빈대떡 맛이 제법 구수하다. 비록 손옥자 할매가 구운 빈대떡 맛은 보지 못했지만 이 정도 솜씨라면 분명 김해 서민들의 입맛을 사로잡았을 것 같다.
 
김씨 부부는 할매로부터 배운대로 빈대떡을 만든다. 턱없이 비싼 가격 때문에 국내산 녹두를 사용할 엄두는 못내지만 수입산 중에서는 가장 좋은 품질의 녹두를 엄선해서 쓴다. 녹두의 품질이 나쁘면 빈대떡에 쓴맛이 돌고 금새 딱딱해진다. 녹두는 계절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평균 4시간 정도 물에 불린 다음 맷돌에 곱게 간다. 철판의 두께도 중요하다. 적당히 두꺼워야 속까지 은근하게 고루 익는다. 기름도 잘 둘러야 한다. 빈대떡이 기름을 너무 많이 먹으면 텁텁해지고 너무 적게 먹으면 비스킷처럼 퍼석퍼석해진다.
 
좋은 재료에 솜씨까지 더하니 맛이 좋을 수밖에 없다. 채소가 들어가건, 돼지고기가 들어가건, 해물이 들어가건 빈대떡은 녹두의 맛과 질감이 느껴져야 마땅하다. 곱게 간 녹두의 부드러운 질감 속에 기름으로 활성화된 특유의 고소함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은근한 단맛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천상 막걸리 한 사발을 곁들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맛이다. 빈대떡과 막걸리는 어쩌면 이리도 찰떡궁합일까 싶다.
 
길을 잘 들인 두꺼운 철판에 이를 다루는 솜씨가 여사롭지 않으니 빈대떡뿐만 아니라 다른 전들 또한 각별하다. 김치전, 감자전, 버섯전, 고기완자전, 호박전 등은 재료를 아낌없이 넣어 이름값을 제대로 한다. 굴전, 부추전, 미나리전 등 계절감을 느낄 수 있는 전들은 먹는 재미를 더한다.
 
▲ 박스 포장 빈대떡. 배달 또는 직접 가져갈 수 있다.
할매빈대떡은 피자박스처럼 생긴 종이상자를 별도로 제작해 인근 지역에는 배달도 해준다. 2만 원어치 정도 빈대떡과 모듬전을 박스에 담으니 같은 가격대의 피자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푸짐한 양이다. 양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이는 결코 피자에 밀릴 이유가 없는, 아니 피자 따위와 굳이 비교할 필요가 없는 음식이다.
 
너무 익숙해서 우리가 가진 가치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영국의 스타일 매거진 <모노클>의 발행인 타일러 브륄레는 해외에 수출해야 할 한국의 문화상품 10가지 가운데 하나로 빈대떡을 꼽았다. 노키아와 스위스항공 등 글로벌 기업이 브랜드 컨설턴트로 지목한 '글로벌 경영' 시대의 샛별로 주목받고 있는 그는 빈대떡을 두고 '글로벌 패스트푸드가 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했다. 종이상자에 담긴 빈대떡을 보니 타일러 브륄레의 평가가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만은 아니구나 싶다.
 
▶메뉴:빈대떡·모듬전 (1만~2만 원)
▶위치:김해시 삼계동 1464-2
▶연락처:055)313-8792





박상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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