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들을, 나이와 상관없이 '문학청년'이라 부르자. 나이 든 '문학청년'들은 비록 머리숱이 반백이어도 가슴만은 뜨거운 시심(詩心)으로 가득하다.
나이 든 '문학청년'들은 대개 '사사(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할 시인을 정해 "선생님한테서 시를 배운다"고 한다.
하지만 이병관(68) 시인은 '사사'라는 말 대신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시를 쓰고 감상한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이병관 시인은 동인들과 함께 발간한 시선집, 시 공부를 하는 이들과 합심해 펴낸 회지 등은 여러 권이지만 정작 본인 이름으로 시집을 내지는 않았다. 그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시집 한 권 내라고 성화이지만 "여러 책에 시를 발표했고, 때가 되면 동인들과 시선집을 내는데, 따로 시집을 낼 것까지야…"라고 말한다. 그는 '함께 시를 쓰고 감상하는' 사람들을 위해, 좋은 시를 찾아낸다.
그 시를 복사해 A4 용지에 꼼꼼하게 붙인다. 두 세편의 시를 붙인 용지를 다시 복사해,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읽는다. 시를 읽으며 감동받은 시어에서 또 다른 단어를 연상하고, 그 단어에서 이야기를 찾아낸다. 시는 그의 삶이다. 그래서 이병관은 천상 '시인'이다.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 좋아했던 소년, 공무원 되어서도 각종 축사 쓰기 도맡아
시민의 종·칠암도서관 취지문 등 남겨

동인들과 어울려 시 읽고 감상 즐기며 여러 책에 시 발표하고 시선집 냈지만
정작 본인 이름의 시집은 욕심내지 않아
"여럿이 함께 시 쓰고 읽으면 그만이지…"


김해시 안동 대아아파트에 사는 이병관은 작은방 하나를 서재로 사용하고 있다. 한쪽 벽을 차지한 서가에는 책이 빼곡하다. 한 두 권씩 산 시집, 시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강의록을 준비하느라 산 시론서, 그리고 또 다른 책들에 이르기까지 500여 권이 넘는다. 스크랩 한 기사나 시의 초고, 공직생활 중 받은 편지 하나 하나를 모두 보관해 둔 파일도 여러 권이다. 그 파일은 공무원으로, 또 시인으로 살아온 한 사람의 일생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보물'이다.
 

▲ 이병관 시인이 햇볕 따사로운 자택 거실에서 지난 시절의 자료 파일을 들춰보고 있다. 박나래 skfoqkr@
이병관은 삼방동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김해에서 살아온 김해 토박이다. 활천초등학교, 김해중학교, 부산 동래고를 졸업했다. 경기도 연천과 포천, 중부전선 최전방에서 군 생활을 했다. 제대 후에는 김해에서 재종형이 하던 연탄장사를 이어받아 일했다. 낮에는 연탄을 배달하고, 밤에는 책을 읽는 주경야독을 이어갔다. "연탄배달부 시절에는 인기가 좀 많았죠. 부엌에 연탄을 차곡차곡 재어놓고 나면, 할매 아지매들이 '총각 수고했다' 하면서 떡도 주고…. 그런 따뜻한 기억들이 아직까지 남아있어요." 당시 스물 두 셋쯤 되었으니, 할매들도 아지매들도 자식처럼 대해주었던 모양이다.
 
1년 정도 연탄 배달 일을 한 뒤에는 큰형의 양계장에서 일했다. 삼계동에 있던 양계장에서 3천 마리의 암탉을 돌봤다. 사료 주고, 달걀 파는 일을 3년 정도 했다. 큰형이 양계장을 팔고 난 뒤, 그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다. 두어 달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1975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3월 28일 김해군 농지계로 첫 발령을 받았다. 행정직으로 전환된 후에는, 산업행정계·문화공보실·총무국 등에서 일했다.
 
그에게는 근무 부서와 상관없이 늘 따르는 과외업무가 하나 더 있었다. 시장·군수를 비롯해 공무원들이 각종 행사에 참여할 때 읽을 축사를 쓰는 일이었다. 컴퓨터는커녕 타자기조차 없던 시절, 그의 글 솜씨와 글씨체는 동료 공무원들을 위한 아주 요긴한 재능이었다. "글씨가 반듯하고 괜찮다고 해서 한 번 두 번 썼더니, 나중에는 온갖 행사의 인사말과 취지문을 도맡다시피 하게 됐죠. 근무 중에는 글을 쓸 수가 없어서 업무가 끝난 뒤 혼자 남아 쓰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재미있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취지문이나 인사말들을 쓰느라 집에도 못들어 가고 여관에서 작업을 하던 시절의 일이었다. 밤새 여관에서 인사말을 쓰고 정서까지 한 다음 아침에 여관을 나섰는데, 그런 그를 아내의 친구가 본 것이었다. 아내의 친구는 "아침에 네 남편이 여관에서 나오더라"고 일러줬는데, 아내는 이미 상황을 알고 있던 터라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났던 것이다.
 
▲ 시집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서가의 한 칸.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보관 중인 각종 자료들을 살펴보았는데, 정말 오래된 축사 한 장이 파일에서 나왔다. '양산향우회' 행사 축사였다. "김해에 사는 양산향우회 회원들이 행사를 했는데, 회장이 축사를 부탁해서 쓴 글이에요."
 
'시민의 종'을 왜 만들어야 하는지를 알리는 취지문도, 칠암도서관의 건립 취지문도 그가 썼다. 시장과 군수의 인사말에서 향우회 축사에 이르기까지 그가 쓴 글의 종류도 다양했다. 동료 공무원들과 친구들이 부탁해 오는 각종 글들을 썼다고 하니, 김해에서는 그가 쓴 글이 있어야만 행사가 가능했던 한 시절이 있었던 셈이다. 그는 "그렇게 썼던 글이 글쓰기에 도움이 많이 됐다"고 말했다. 하긴, 그렇게 매일같이 온갖 종류의 글들을 썼으니, 더 이상의 문장 수업이 어디 따로 있었을까 싶다.
 
이병관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그리기와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다. 여러 종류의 대회에 '선수'로 뽑혀 나가기도 했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 백일장에서 상을 받은 기념으로 '경화춘'에서 자장면을 먹었던 일을, 그는 즐거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자장면이란 걸 먹어봤는데, 얼마나 맛있었던지…. 지금도 그 맛을 생각하면 입 안에 침이 고일 정도지요."
 
그는 공직생활 틈틈이 김해의 자연과 가야의 역사를 주제로 한 시를 썼다. 상동면장으로 재직 중이었던 1997년에는 <한글문학> 가을호로 등단했다. <한글문학>은 김해 출신의 안장현 시인(1928~2003. 신라대의 전신인 부산여대 국문과 교수)이 발행과 편집을 맡았던 한글전용 문학운동지이다. 안장현 시인은 이병관의 시 '성조암 길 까치'를 추천했다.
 
성조암은 삼정동쪽 분산 타고봉 아래에 있는데, 가락국 시조대왕인 김수로왕의 극락왕생을 위해 창건된 사찰이다. 그는 성조암과 까치를 연결시켜 이렇게 노래했다. "성조암 길 오며 가며 / 까치법어 한 삼 년 익혔어/ 그래도 염불은커녕 발심조차 못했지/ 오늘도 ㅈㅊㅋㅈㅊ 어제 그대로의 법문"(시 '성조암 길 까치' 중에서). 이 시를 읽고 있으면, 까치소리가 목탁소리로 변용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의 시 한 편을 더 감상해 보자. 그의 '상동 사랑'을 보여주는 시편이다. 그는 "지금은 공장이 많이 들어섰지만, 상동면의 사계절이 보여준 아름다운 풍경과 사람들의 따뜻한 인정은 김해 안에서도 최고"라고 말했다. 그런 그가 상동면을 시로 노래했는데, 제목이 아예 '상동에 오십시오'이다.
 
▲ 상동면 전통찻집에 걸린 시 '상동에 오십시오' 액자. 박정훈 객원기자

"상동에 오십시오./ 무척산 산비탈 아름드리 잡목들 연초록 새옷 곱게 갈아입고 윤회전생 한껏 뽐내는 날 오십시오./ 백운암 석강수로 달여낸 작설차 한 잔으로 이승 시름 잊어보셔요.// 상동에 오십시오./ 시원스레 쏟아지는 소낙비에 이 산 저 산 나무라는 나무 일제히 기립하여 흠뻑 몸 씻는 날 오십시오./ 사바 티끌 씻어 흘러가는 강물에 업보 훌훌 던져 버리고 번뇌 없이 사는 길 닦아보셔요.// 상동에 오십시오. / 신어산 평원 억새들 산등성이 휘돌아온 바람에 앞 다투어 하얗게 손짓하는 날 오십시오./ 새소리 바람소리에 심지 씻고 구만리 푸른 하늘에 해묵은 그리움 다시 파랗게 헹구어 보셔요.// 상동에 오십시오./ 마침내 온 세상이 흰 눈에 덮이고 토끼며 산꿩이 순한 눈 껌뻑이며 동네 마당에 내려오는 날 오십시오./ 펄펄 함박눈 맞으며 흰빛 찬란한 시, 그림, 동화나라의 임금님이 되어보셔요."(시 '상동에 오십시오' 전문)
 
상동면 묵방마을 출신의 서예가 범지 박정식은 이 시를 접한 뒤, 붓을 들어 글씨를 썼다. 이병관은 범지가 글씨를 써 표구를 해두었다는 고마운 소식을 접하고 액자를 찾으러 갔는데, 그 액자가 너무 컸다. 시 전문을 모두 옮겨놓았으니 흔한 시화 액자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디다 걸어야 할지는커녕 어떻게 운반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던 차에 그에게 제의가 하나 들어왔다. 상동면의 전통찻집 '남새밭' 안주인 박시달 씨가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 "우리 찻집에 걸어놓으면 더 많은 사람이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는 그럴 듯했다.
▲ 이병관 시인
그래서 이 액자는 '남새밭'에 걸리게 됐다. 지금도 찻집을 찾은 많은 사람들이 이 시를 읽으며 상동면의 아름다움을 마음에 담고 돌아간다. 
 
"김해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김해에서 살고 있는 것이 행복"이라는 이병관은 "내 고향을 시로 쓰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많은 시들이 김해를 노래하고 있다. 이런 그를 어찌 '김해의 시인'이라 하지 않으랴. 그런 그에게 다시 묻는다. "선생님. 시집 한 권 안내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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