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이 극장에서 개봉됐을 때, 딸과 함께 극장을 찾은 젊은 엄마들이 많았다고 한다. 캐나다의 국민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1908년에 발표한 <빨강머리 앤>은 세상에 나온 지 10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전 세계 소녀들에게 사랑받는 주인공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도 잊지 못하는 친구 같은 존재이다. 옛 친구인 앤을 만나고 싶어한 엄마들이 다시 소녀시절로 돌아가 딸과 함께 극장을 찾은 것이다.
 
나는 초등학생 때 앤을 만났다. 빨강머리는 아니었지만 주근깨 투성이 소녀였던 나도 남자애들이 놀리면 화를 내곤 했었다. 나는, 빨강머리를 홍당무라고 놀린 길버트에게 화를 내는 앤의 마음에 백번 공감했다. 풍부한 상상력과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앤, 수다스럽지만 밉지 않은 앤은 내 마음에 꼭 들었다. '빨강머리 앤' 이야기를 할 때면, 책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어린 시절의 친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프린세스 에드워드섬의 에이번리의 초록 지붕 집으로 잘못 입양되어 온 11세 소녀 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됐다는 내용에 잠깐 마음이 아프긴 했지만, 앤은 불쌍한 아이가 아니었다. 앤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상상력을 발휘해 재미난 일을 만들어 냈다. 씩씩한 앤은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조금은 엉뚱하지만 유쾌한 친구였다. 게다가 무뚝뚝하고 다른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매슈 아저씨 같은 사람의 마음도 열수 있는, 흔치 않은 매력을 소유한 귀여운 꼬마 아가씨였다.
 
책도 책이지만,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로 시작되는 TV만화 주제가는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주제가를 들을 때마다 나는 가슴이 설레었고, 매일 매일 앤이 만나고 싶어졌다.
 
앤이 벌이는 크고 작은 소동을 보면서 '어떻게 저런 상상을 할 수 있을까?'하고 늘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도 상상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사실 나 역시 앤처럼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살고 있었기에, 엉뚱하지만 씩씩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앤이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
 
무뚝뚝하고 숫기 없는 매슈 아저씨와의 따뜻한 교감, 냉정하지만 속 깊은 마릴라 아주머니와의 깊은 애정은 나를 울고 웃게 만들었다. 가장 친한 친구 다이애나와의 우정은 친구에 대한 생각을 바꿔 놓기도 했다. 학교 친구 길버트와의 경쟁과 대립 속에서 사랑을 싹 틔운 모습은 나를 설레게 했다. 스테이시 선생님과 나눈 사제 간의 아름다운 교류는 나로 하여금 좋은 선생님의 모델을 갖게 해주었고, 앨런부인과 주고 받는 친교의 시간들은 주위의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했다.
 
앤을 둘러싼 다양한 인간관계의 디테일한 묘사는 지금도 필름이 지나가듯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함께 해서 좋았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고, 어렴풋이 떠오른 그들로 인해 문득 가슴 한 켠이 싸해지는가 하면, 주변이 훈훈해지는 듯한 기분도 든다.
 
절대로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빨강머리 앤>은 지금 읽어도 여전히 설레게 한다. 또 아이들을 가르치는 나에게 소녀 같은 감성을 잃지 않게 해주며, 열심히 노력하는 삶을 살게 하는 고마운 책이다.


Who >> 김미정
1973년 전남 고흥 출생. 현 (사)SAK김해색동어머니회 회장. 첫 딸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읽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중 색동어머니회 활동을 시작했다. 동화구연, 학생상담 등의 분야에서 김해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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