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같은 삶의 무대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김해뉴스>가 '시장사람들'의 후속 시리즈로 '이웃의 발견'을 마련했다.
우리 주변에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이웃들이 있다. 삶의 바다를 치열하게 헤쳐온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유엔, 아리랑, 낙타, 비사….'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성냥 상표'라는 것이다. 한때, 성냥은 집들이 선물로 인기가 많았다. 성냥은 집안의 살림이 불처럼 활활 일어나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지난달 28일 김해에 마지막 남은 성냥공장 '경남산업공사'의 조창순 대표가 공장내부를 소개하고 있다.

1948년 세운 뒤 가업으로 물려받아
전국 납품 '신흥표' '기린표' 명성 떨쳐
선물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유명 
1980년대 후반 사양길 … 20여년 적자
"어쩌겠어요, 나라도 끝까지 지켜야지"

성냥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든 지는 이미 오래지만, '신흥표'와 '기린표' 성냥은 아직도 생산되고 있다. 진영읍 진영고등학교 인근에 자리잡은 '경남산업공사'. 1948년 고 조병철 씨가 세운 것을 1987년 딸 조창순(85) 씨가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낡은 목조건물인 이 성냥공장은 양조장이나 정미소를 제외하면 김해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공장이다. 허리가 구부정한 상태에서 뒷짐을 지고 공장 내부를 소개하던 조 씨가 과거를 회상했다.
 
"1970년대만 해도 김해지역의 공장들 중에서는 전기요금을 제일 많이 냈을 정도로 공장이 잘 돌아갔지요. 1천980㎡(600평) 규모에다 일꾼만 280명이었고, 6t 트럭 다섯 대가 성냥을 싣고 전국을 돌며 납품을 했으니까요. 예전엔 국회의원 선거 때 후보자들이 성냥을 선물로 돌리곤 했죠." 1970년대라면, 성냥과 양초를 팔러 돌아다닌 장사꾼이 있을 때다. 한국에서 공산품이라고는 특별한 게 없던 시절, 이 공장에서 생산된 성냥은 중동과 아프리카로 수출되기도 했다.
 
"그 당시엔 진영지역 가정집에 종이 성냥갑을 만드는 일감을 나눠주기도 했죠. 나이가 지긋한 진영사람들 가운데 우리 회사에서 임금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그러나 전성기는 갔고, 현재 이 공장에서는 11명의 종업원들이 일을 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300군데에 이르던 성냥공장들도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사양길로 접어들기 시작했고, 지금은 '경남산업공사'와 경북 의성에 있는 '성광성냥' 단 두 곳을 제외하곤 모두 문을 닫았다.
 
"지난 1월, 한 신문에 '성광성냥'이 전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냥 공장으로 소개됐더군요. 이웃 사람들이 그 기사를 가져와서 제게 보여줬죠. 더 역사가 오래된 성냥공장이 김해에 있는데, 하면서 안타까워하더군요."
 
▲ "이 성냥이 김해에서 만들어지는 거였어?" '신흥표' 성냥은 '경남산업공사'의 대표 제품이다.
공장 한 켠, 어른 키 높이만큼 쌓여 있는 성냥통을 살펴보았다, 눈에 익은 제품이었다. 성냥개비 550개가 들어가는 사각통에 '신흥'이라는 글자 사이로 화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불조심 하여 내 생명 내 재산 보호하자, 화재신고는 119'라는 문구도 보였다. 붉은 글씨로 박혀 있는 '반공방첩'이라는 글귀는 지난 시간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동그란 성냥통에는 '기린'이란 상표와 기린이 달려가는 그림이 있었다. '기린표'는 수도권, '신흥표'는 영남권과 전국 해안도시와 전국 사찰에 납품해 왔다.
 
'경남산업공사'는 현재 음식점이나 다방의 개업 선물용 성냥도 주문을 받아 만들고 있다. 작은 갑성냥은 기계화 공정으로 생산하지만, 통성냥은 직원들이 아직도 일일이 손으로 담고 있다. 그래도 숙련공은 한 번에 개수를 다 채워 넣을 정도로 손이 빠르다,
 
수익은 한 달에 1천400여만 원. 인건비에도 훨씬 못 미치는 액수다. 수익을 따졌다면 1980년대 후반에 공장 문을 닫았어야 했다는 것이 조 사장의 설명이다.
 
"매달 적자를 보면서 운영한 세월이 20년이 넘습니다. 하지만 어려움이 있더라도 가업을 반드시 지켜내고 싶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은 직원들도 눈에 밟혔지요. 이날까지 공장을 버리지 못한 이유입니다."
 
한 개비 확 타버리듯 짧은 전성기를 누렸던 성냥은 조 씨의 손에서 마지막 불씨를 유지하고 있다. 이 공장이 문을 닫으면 이곳에 성냥박물관을 짓는 게 어떻겠냐는 이웃 주민들의 제안도 조 씨에겐 속이 상하는 소리일 뿐이다.
 
"성냥통의 빨간 마찰 면이 닳아 몇 번이나 그어도 불이 붙지 않을 정도까지 사용했던 가난한 시절이 있었지요. 하지만 그때가 인심이 좋았어요. 그 시절이 참 그립네요." 조 씨가 성냥통을 만지작거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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