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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길 덮었던 낙엽들 위로 봄을 기다린 봄 것들 사뿐사뿐(38) 장유 태정산(台亭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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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재 2013.03.12 15:38
  • 호수 114
  • 12면
  • 최원준 시인 /문화공간 '守怡齊수이재' 대표(report@gimhaenews.co.kr)

   
▲ 편백나무 숲길. 경주최씨 유택을 지나 본격 산행을 시작하는 곳으로 북국의 야산을 걷는 듯 정신이 맑고 그윽해진다.
봄볕이다. 봄바람이다. 가장 부드러운 것들도 몸에 닿으면 간지럽다. 보들보들 솜털 같다. 세월은 놀랍다.
생명의 움을 어쩌면 이렇게 빨리도 들불 번지듯 틔우는 것일까? 여기저기 노오란 개나리꽃 제 꽃잎 여는 소리 들리고, 오리나무도 가지마다 싱그러운 이파리 파랗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굼뜬 사람의 몸마저도 이 봄날에게 무장해제 당하고 마는데, 봄을 기다린 봄 것들은 오죽 했을까? 겨우내 차가운 언 땅을 뚫고 싹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죽을 힘을 다했을까 말이다. 그래서 이 봄날은 자지러진다. 온 산과 들은 봄의 축제가 한창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산행은 가락국의 전설이 묻혀 있는 장유 태정산(台亭山)을 오른다. 가락국 왕의 태(胎)를 묻었다 하여 태봉(胎峯)으로 불리던 산이다. 이 산 줄기에는 허왕후와 수로왕이 합환한 것을 기리는 왕후사가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태정마을을 들머리로 하여 경주최씨 유택에서 산길로 접어들어, 옥녀봉~태정산 능선, 태정산 정상을 오른 뒤 남해고속도로 응달육교 쪽으로 내려오는 코스이다.
 
봄이 넘실거린다. 김해의 벌판에도 이미 봄물이 오르고 있다. 봄을 알리는 큰개불알꽃 군락이 온통 남색꽃을 소복소복하게 피워 놓았다. 일명 봄까치꽃. 까치가 저만치 오는 봄을 보고 까작까작 짖어대듯, 온 들판이 봄 손님 알리는 봄까치꽃 피우는 소리로 요란하다.
 
장유로 접어들면서 보니 여기저기 공사가 분주하다. 김해의 역동적인 발전상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곳곳의 산을 절개하고 벌판이 훼손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가락방면의 좁은 국도를 덜컹덜컹 달려 응달리 태정마을 입구에 닿는다.
 
오래된 충혼탑이 서 있고, 금병재(錦屛齋) 비석이 서 있다. 이 태정마을은 가락국의 설화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태정마을을 품고 있는 마을 뒷산은, 옛날 가락국 왕의 태(胎)를 묻었다는 태봉(胎峯)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 마을을 태장리(胎葬里, 台長里)라고 부르다가 지금의 태정(台亭)마을로 고쳐 부르고 있다. 그래서 산 이름도 태정산(台亭山)이 되었다.
 
마을의 기운은 왕의 태를 묻은 곳이라 그런지 안온하다. 마을 앞으로 덤프트럭이 쉴 새 없이 지나지만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따뜻한 햇볕 속에 태정산이 병아리를 품듯 마을을 포근하게 품고 있는 형국이다.
 
마을을 따라 산으로 오른다. 알록달록한 지붕들 사이로 텃밭들이 올망졸망하고 겨울초, 시금치 등속의 소채들이 푸들푸들하다. 마을을 지나자 산기슭이 온통 밭이다. 거의 산 중턱까지 밭과 과수원을 경작하고 있다. 가락국의 기운이 성한 곳이라 그런가? 산의 풍성한 지기를 받아 농사가 잘 되는 모양이다.
 

   
▲ 붉은 홍매화도 봄을 알리고 있다.
밭에는 몇몇 사람들이 본격적인 농사에 앞서 밭을 갈고, 퇴비를 섞는다고 바쁘다. 밭둑가로는 아낙네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한창 봄나물을 캐고 있다. 그들의 높은 웃음소리가 따뜻한 봄날을 간질이고 있다.
 
이미 몸은 본격적인 산을 오르기도 전에 나른하다. 기분 좋게 게을러진 마음 때문에 산행은 더뎌진다. 이곳저곳 눈길을 주고, 만나는 봄 것마다 인사하며 오르려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음이다.
 
산중턱에서 마냥 게으름을 한껏 부린다. 산수유나무에는 노란 꽃들이, 홍매화나무에는 진분홍 꽃들이 나그네를 반기느라 제 꽃잎 흔들고, 과수원의 유실수들은 푸른 움을 틔우며 한껏 기지개를 켜고 있다.
 
   
▲ 임도에서 바라본 장유벌. 경전선 철교가 보인다.
경주최씨 유택까지 오르자 장유벌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벌써 황사가 시작되는지 시계는 좋지 않지만, 산에서의 조망은 늘 넉넉하고 호활하다. 경전선 철교가 진영 쪽으로 향하고 있고, 그 아래로 남해고속도로가 가로로 지나친다.
 
유택 옆으로 산길이 나면서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능선까지는 급한 오름세다. 경사가 점점 가팔라지는 시점이다. 산등성이와 달리 바람도 차고 거세다. 아직 산 속까지 봄소식이 당도하기에는 이른가 보다.
 
그래도 산길은 편하게 산을 향하고 있다.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푹신푹신하다. 길가로는 편백나무들이 울창하다. 나뭇잎마다 향긋한 향이 나는 것 같다. 편백나무 숲은 한동안 계속된다. 어느 북국(北國)의 야산을 걷는 듯 정신이 맑고 그윽해진다.
 
때죽나무들도 제법 많이 보인다. 참 잘 컸다. 밑둥치가 한아름이다. 나무의 검은 피부는 윤기가 올라 반들반들하다. 흑인 여인의 부드러운 살결 같다. 마른 계곡을 곁에 두고 산은 계속 깊어진다. 어느새 진달래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성급한 놈은 벌써 꽃봉오리 속에서 분홍꽃잎을 밀어내느라 안간힘이다.
 
온산이 밤나무 낙엽으로 지천을 이룬다. 그러나 그 낙엽 속 생명의 푸른 기운은 무럭무럭 솟아오르고 있을 터이다. 밤나무 썩은 둥치에 동그마니 자라고 있는 운지버섯도 겨우내 묵은 때깔을 벗어버리고 밝은 빛을 띠고 있다.
 
   
▲ 고려가요 쌍화점에 나오는 이슬람 상인 '회회아비'를 닮은 돌무지 비탈 바위. 큰 코가 두드러진다.
경사는 더욱 비탈지고 거칠어진다. 군데군데 돌무지들이 비탈에 위태하게 서 있다. 그 중 한 바위는 고려가요 '쌍화점'의 이슬람 상인 '회회(回回)아비'를 닮았다. 큰 코에 덥수룩한 턱수염이 영락없이 회회아비다.
 
숨이 가빠올 즈음 드디어 능선이 보이기 시작하고 하늘이 서서히 열린다. 마지막 비탈을 오른 후에야 태정산~옥녀봉 능선에 도착한다. 능선은 부드럽다. 큰 경사도 없고 길도 편안하다. 그러나 바람은 양 옆 산줄기를 통해 드세게 치고 올라온다. 그래도 차지는 않다.
 
한참을 편안한 능선을 탄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장유벌도 바라보고, 돌무지 전망대에서 잠시 쉬며 길을 가다보니 어느새 태정산(361m) 정상이다. 정상에는 작은 공터만 있고, 전망은 없다. 정상석도 없어 신경을 쓰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다.
 
아무리 그래도 이곳은 가락국 왕의 태가 묻힌 태봉이 아닌가? 가락국 전설을 복원하고 스토리텔링 하기 위해서라도, 관련되는 지명이나 장소 등을 알리고 표시하는 일들이 필요하겠다. 태정산 정상에도 '정상석'과 '태봉 유래비' 등을 세우면 어떨까 하는 바람이다.
 
정상에서 내려와 응달마을 쪽 능선으로 길을 내린다. 진달래나무 군락이 길을 안내하고 바람이 살짝 등을 떠민다. 그렇게 능선은 가는 길을 생각하게 하고 오던 길을 더듬어보게 한다. 그리 해야 지금 가고 있는 길에 대해 확신이 서는 것이다. 왔던 길과 가야 할 길의 통찰, 그것이 세상 살아가는 혜안이겠다.
 
   
▲ 멀리서 본 태정산 정상. 대지에서 피어오르는 봄 기운과 옅은 황사가 뒤엉켜 흐릿하게 보인다.
갑자기 능선길이 끊어지며 시야가 확 트인다. 본격적인 내리막을 앞두고 시원하게 장유벌이 펼쳐진다. 아직까지 황사는 가라앉지 않아 선명하지는 않지만, 장유벌 군데군데 반룡산, 칠산, 용두산이 올망졸망하게 앉아 있고, 그 사이로 나지막이 조만강이 흐른다. 해는 이미 팔판산 쪽으로 서서히 이울고 있다.
 
본격적인 하산길이다. 오솔길을 따라 길이 쏟아진다. 어깨까지 오는 진달래나무 가지가 성가시게 집적댄다. 내려갈수록 골이 깊어지더니 계곡 물길 시작점까지 온다. 아직 물이 마르기는 했지만 샘에는 샘물이 오도카니 고여 있다.
 
너덜 위에 낙엽이 쌓여 애를 먹는다. 골이 깊어 어둑어둑한데 마른 나뭇가지들은 긴 손길을 뻗어 나그네의 어깨를 잡는다. 인적은 하나 없고 사박사박 낙엽소리만 더욱 적막함을 더해준다. 신령스러운 기운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아! 온산이 낙엽물결 일렁이며 나그네를 쫓아온다. 그렇게 한참을 미끄러지며 계곡을 내려온다.
 
깊은 계곡이 드디어 임도와 만난다. 임도는 계곡을 이리저리 휘돌며 길을 내리고, 계곡은 임도 따라 길을 내어줬다 거둬들였다 하며 따라 내린다. 그때마다 산수유 노란 꽃망울이 터지고, 고사리 군락의 푸른 물결은 더욱 살랑인다.
 
이러구러 재미지게 길을 내리다 보니 어느덧 날머리 입구의 단감과수원에 닿는다. 감나무들은 아직까지 꿈결 속이다. 그래도 나뭇가지마다 물이 차오른 듯 몸피가 생생하다. 얼마지 않아 이들은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세상 이치가 다 그러하다.
 
장유벌을 바라본다. 곧 이 벌판에도 도시의 건물들이 들어찰 것이다. 빌딩 사이로 해가 뜨고 노을도 질 것이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가락국 태봉 아래에서 하염없이 장유벌을 바라보는, 한갓 나그네의 심사로써는 알 길이 없음이다. 그저 아는 듯 모르는 듯 저녁놀만 아름답다.


   
 




최원준 시인 /문화공간 '守怡齊수이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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