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가 없었던 고대에는 새끼줄의 묶은 모양과 수를 통해 의사소통을 했다. 비록 제대로 된 문자는 아니었지만, 의사소통의 수단이었기에 이를 두고 '결승문자'라 했다.
새끼줄을 묶으면서부터 인류는 매듭을 발전시켜 왔다. 매듭을 지음으로써 인류는 사냥이나 낚시, 주거의 건축, 물건 운반 등을 할 수 있었다.
매듭은 인류의 기억 보조장치였고, 문자 구실을 했으며, 무늬의 형성으로 장신구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우리 민족 역시 먼 옛날부터 장식수단으로 끈을 맺는 기법을 익혀 왔고, 이 기법은 전통매듭으로 발전해 민속공예의 한 분야를 이루게 됐다.
전통매듭은 현대에 와서도 실내장식·의복장식·노리개와 장신구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장식 매듭으로 애용되고 있다. 김해에서 전통매듭 작업을 하고 있는 홍서현(54· 대한명인 제12-362호 매듭공예) 씨. '다홍가야매듭'이란 고운 이름을 가진 동상동 871의 21 공방이 그의 작업 공간이다.

▲ 고운 색의 끈목으로 만든 매듭공예 작품들이 가득한 홍서현 명인의 공방은 고명딸 혼사 준비가 한창인 대갓집 안방처럼 화사하다. 박나래 skfoqkr@

다홍가야매듭에 들어서자 가지런히 걸려있는 고운 색의 끈목이 눈에 들어왔다. 단면을 둥글게 짠 것이라고 해서 '원다회(圓多繪)'라고도 하지만, 대개 '둥근 끈목' '끈목'이라 불린다. 편의상 그냥 '실'이라고도 한다. 그냥 걸어두기만 하면 끈목 혹은 실에 지나지 않지만, 매듭을 지으면 색상과 형태에 따라 아름다운 모양으로 되살아난다. 끈목은 굵기에 따라 세세사, 세사, 중세사, 중사, 중중사로 나뉜다. 세세사는 핸드폰 고리 같은 작은 작품을 만드는 데 쓰이고, 중중사는 큰 작품을 만들 때 사용된다. 공방 안에는 작은 핀에서부터 큰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매듭공예품이 빼곡했다. 일일이 손으로 만든 고운 매듭공예품들 사이에 앉아 있으니, 마치 고명딸의 혼사 준비를 하는 어느 대갓집 안방에라도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부모님 손재주를 닮아 소질이 많았어요
 매듭 배운 후로 하루도 손에서 놓질 않았네요"

홍서현은 1960년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 다무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손재주가 좋았다. 아버지는 눈으로 본 것은 뭐든지 만들어냈고, 어머니는 수를 잘 놓았다. 홍서현도 동생들도 부모에게서 손재주를 타고 났다. 그는 어린 시절의 추억 한 토막을 들려줬다. "저도 어릴 적부터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그러다가 큰일 날 뻔 했죠. 초등학교 6학년 때 코바늘 뜨개질에 푹 빠졌는데, 수업시간에도 계속 뜨개질을 하다 그만 선생님께 들켰지 뭐예요. 놀라서 숨기려다가 코바늘이 턱밑을 찔렀는데, 코바늘의 코가 안 빠지는 겁니다. 친구랑 함께 학교 앞에 있던 약국에 가서 코바늘을 뺐어요. 친구들도, 나도 잊을 수 없는 아찔한 기억이죠." 당시의 담임선생님은 "요즘은 코바늘이 안 찌르나?" 하고 놀린다.
 
그는 진주에서 반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 대청동으로 이주했다. 부산 남성여고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살아난 게 기적이라고 했을 정도로 많이 다쳤어요. 병원 침대에 몇 달을 누워 지냈는데, 매듭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지요."
 
▲ 한복 위에 매고 싶은 노리개
홍서현은 1979년, 정식으로 동양 전통매듭을 배웠다. "제 첫 번째 매듭 스승은 김영숙 선생님이세요. 부산 국제시장에 선생님의 작업실이 있었어요. 도래매듭, 매화매듭, 국화매듭…. 매듭의 기초와 기본을 그 분께 전수받았습니다."
 
그는 매듭 공부와 부업을 병행했다. 당시 탈공예나 박공예를 응용한 민예품 장식걸이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장식걸이에 매듭이 포함됐다. 그는 민예품을 돋보이게 해줄 매듭을 짓는 부업을 했던 것이다.
 
"매듭을 배우기 시작한 후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실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어요. 1982년에 경찰공무원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는데, 경남 산청 덕산 골짜기로 발령이 났지요. 호랑이가 나온다는 말이 있었을만큼 오지였어요. 남편이 출근한 뒤 혼자 집에서 뜨개질을 했어요. 뜨개질로 만든 옷을 보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주문을 해오더군요. 뜨개질로 옷 하나를 만들고, 또 만들고, 그렇게 계속 실하고 놀았죠."
 
그는 남편이 김해로 발령이 난 1992년에 김해로 왔다. 홈패션 가게를 차려 이불과 커텐을 만들어 파는 한편, 창원에서 통영전통누비도 배웠다. 이 시점에 산청에서 사는 동안 손을 놓았던 매듭을 다시 배우기 위해, 뒷날 창원공예협회 회장을 맡기도 한 임미숙 선생을 찾아갔고, 매듭공예 자격증도 땄다. 2003년에는 한민족 전통매듭 서울 본협회 김해지부로서, 백조아파트 상가에 공방도 열었다. 동상동의 현재 자리로 옮겨 자리 잡은 것은 2009년이다. 전통시장이 쇠퇴해 가는 것이 안타까워, 전통문화인 매듭공방이 상가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옮겨온 것이다.
 
가지런히 걸려 있는 형형색색 고운 '끈목'
도래매듭·매화매듭·국화매듭 …
명인의 손길 따라 제 갈길 찾는 실들
씨줄 날줄로 얽히며 하나의 작품이 된다


그에게 매듭이란 무엇일까? 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매듭은, 그 매듭을 짓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마음에 조금이라도 잡념이 있으면 매듭 모양이 안 나와요. 실 한 가닥에도 그 실을 만지는 사람의 마음이 나타나거든요. 실은 제가 가는 길이 있어요. 사람은 손으로 억지로 모양을 짜내는 것이 아니라 실이 가는 길을 잡아줄 뿐이죠. 그래서 잡념이 있으면 본 모양이 나오지 않고 엉뚱하게 흐트러져 버려요. 정신을 집중해야 하고, 매듭을 짓다 보면 또 정신 집중도 잘 됩니다."
 
▲ 상처를 감추려는 고객을 위해 홍서현 씨가 매듭으로 만들고 있는 목걸이.
홍서현은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매듭은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됩니다. 운동화 묶을 때도 끈을 매듭지어야 하죠. 물건을 포장할 때도, 옷을 여밀 때도…. 그래서 예술작품과는 별도로 일상생활과 관련된 매듭을 늘 연구하고 있어요." 듣고 보니 정말 그렇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매듭을 묶고, 다시 그 매듭을 풀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에게 매듭을 좋아하는 이유를 내처 물었더니, 그는 벽에 걸린 끈목들을 가리켰다. "우선 색깔이 곱잖아요. 저렇게 걸려 있기만 해도 아름답죠. 거기다 내 손길을 보태 실의 길을 만들어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내면, 가슴 가득 뿌듯함도 느낄 수 있어요."
 
그는 현재 매듭으로 목걸이 하나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갑상선 수술을 받은 한 분이 흉터를 감추고 싶다면서 주문을 해왔어요. 그냥 두면 실에 지나지 않지만, 예쁘게 매듭을 지으면 그 사람의 흉터도,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도 치유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작은 액세서리이지만, 상처를 가리게 될 목걸이라 더 정성을 쏟아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 홍서현
대한명인(제12-362호 매듭공예). 한국문화예술진흥회 경남 매듭분과 현 회장. 2009·2013년 한양 공예 대전 심사위원. 2010년 대한민국 공예 예술대전 심사위원. 2011년 정부조달청 우수업체 지정. 2012년 정부조달청 문화장터 상품 지정. 2012년 '인간문화재 명장·명인 초대전'외 전시회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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