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한 여학생이 북을 잡은 스승 앞에 섰다. 제자를 바라보는 국악인 홍승자(김해뉴스 지난 5일자 10면 보도) 씨의 눈빛이 매섭다. 이 여학생은 긴장을 했는지 침을 꼴깍 삼켰다. '어이!' 스승의 신호가 떨어졌다.
 
여학생의 목소리가 연습실 안에 가득 울려퍼졌다. "요량은 땡그량, 땡그량, 어~ 넘차 너화넘!" 판소리 '심청가' 중 곽 씨 부인 상여 나가는 대목이다. 목소리엔 애절한 마음이 묻어난다. 뱃속에서부터 끌어낸 단단한 기운 또한 느껴졌다.
 
한바탕 멋들어지게 소리를 한 이 여학생은 김해가야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이현지(18·3년)양이다. 이 양은 홍승자 씨의 애제자다.
 

 

 

▲ 지난 14일 삼계동 홍승자 판소리연구소에서 이현지 양이 부채를 든 채 심청가를 부르고 있다.
한참동안 소리를 하던 이 양이 어느 순간 배를 움켜쥔다. "고것 했다고 힘들어 하면 어쩌냐! 다시!" 스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 양은 마른 침을 한번 삼킨 뒤 다시 소리를 시작했다. 스승이 '얼씨구!' 추임새를 넣으면 이 양은 없던 힘도 냈다.
 
연습을 끝낸 이 양과 차 한 잔을 놓고 마주 앉았다. 체력소모가 심했던 모양이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녁을 안 먹었더니 배에 힘이 안들어가네요.(웃음) 주촌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스승님께 민요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어렸을 때, 다른 친구들은 동요나 대중가요를 흥얼거렸는데, 저는 민요를 불렀습니다. 그러다 스승님을 찾아 와 소리를 배우고 싶다고 졸랐지요."
 
'중간에 소리를 그만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뒤, 이 양은 홍 씨의 제자가 됐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이 양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다.
 
"방학 때마다 스승님과 깊숙한 산 속으로 들어가 판소리 연습을 했어요. 제가 목이 잘 쉬질 않는데, 하루에 6~7시간씩 소리를 했더니 목이 쉬더군요. 목이 쉬니까 스승님이 기뻐하셨어요. 스승님은 목이 수없이 쉬어야 소리를 잘 할 수 있다고 하셨지요." 듣고 있던 홍 씨는 "판소리 하기에 좋은 성대를 타고났다. 창공을 뚫을 목소리"라며 제자를 치켜세웠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 반대 무릅쓰고
홍승자 씨 찾아가 "제자로 삼아주세요"
방학때마다 스승과 산속에서 소리연습
김해 학생들 중 유일하게 판소리 배워
"대학 가서도 이 길 반드시 걸을 겁니다"



홍 씨에 따르면 현재 김해에서 판소리를 배우는 학생은 이 양이 유일하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따라 부르고 아이돌 가수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가질만한 나이지만, 이 양은 "꿋꿋하게 우리 소리를 지켜나가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중학교 2학년 때 소리를 잠깐 그만둔 적이 있어요. 친구랑 어울려 놀고 싶었는데 시간도 없고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문득 내가 다른 친구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게 뭔지를 생각해 보았어요. 소리밖에 없더군요. 스승님을 찾아가 다시 제자로 받아들여 달라며 무릎을 꿇고 울었지요. 만일 스승님이 다시 저를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는 다른 친구들처럼 학원을 다니면서 공부만 했겠죠."
 
이 양의 가방엔 손때 묻은 카세트 플레이어가 들어 있었다. 이 양은 학교에서도 쉬는 시간마다 판소리 테이프를 돌려 듣는다고 한다. "지난해 여름이었어요. 생림 무척산 깊은 곳에서 심청가 중 곽 씨 부인 상여 나가는 대목을 연습했는데, 스승님이 제 목소리가 너무 맑아서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시더군요. 쉰 목으로 밤새 연습을 하고 새벽이 되었는데, 제 목소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제 목에서 나오더군요. 스승님이 그제서야 '됐다. 드디어 소리를 터득했구나!' 하시며 저를 꼭 안아주셨어요. 기쁜 마음에 스승님 품에 안겨 막 울었죠."
 
스승의 인정을 받은 이 양은 몇년 전부터 실력이 크게 늘어 지난해 4월 진해시에서 열린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고등부 대상을 차지했다.
 
"사물놀이나 가야금 특기생과 달리 판소리는 대회에 입상해도 대학입시 때 가산점이 없어요. 판소리를 하는 학생이 김해에 저밖에 없어서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친구가 없다는 게 가장 힘들어요. 제 특기를 살려 대학에 가서도 꼭 판소리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이현지 양이 부르는 심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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