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말을 듣고서 꽤 난감했다. 대충 썼다가는, 주변 지인들 사이에 고품격 정론지로 알려진 <김해뉴스>에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 고민하던 내 눈에 천명관의 <고래>가 들어왔다.
 
2004년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은 작품인데, 당시 문학평론가 신수정이 "감히 이 소설을 두고 문학동네소설상 십 년이 낳은 한 장관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심사평을 했다. 나 역시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책이라 다시 펼쳐들었다. 현재까지는 '내 삶을 비춘 이 한 권'의 후보군에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내 삶을 비추어주는 유일한 책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오랜만에 '정독'에 들어갔다.
 
다시 펼쳐 본 <고래>는 책을 선물해준 친구의 말처럼 작가의 '글빨'이 장난이 아니다. 코끼리를 기르는 쌍둥이 자매, 벌떼를 몰고 다니는 애꾸 여인, 거대한 양물을 가진 반편이 등이 서로 정신없이 얽히고설켜 하나가 된다. 이거, 완전히 이야기 자체가 고래다. 판타지적인 내용이 적절한(?) 음담패설과 어울려 손에서 책이 떨어지질 않는다.
 
소설 줄거리는 산골 소녀에서 소도시의 기업가로 성공하는 금복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그녀를 둘러싼 갖가지 인물 사이에서 빚어지는 천태만상과 우여곡절, 금복의 딸이자 정신박약아인 춘희의 생존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담고 있다.
 
<고래>는 기존의 한국 소설과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달랐다. 마치 글로 쓴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참고로 작가는 영화 <북경반점> <총잡이> 시나리오 작가였다. 그 시나리오 말고는 자신의 시나리오가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아, 먹고 살기 힘들어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줄거리 속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할 정신이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끊임없이 새 인물이 나오지만, 이전 인물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새 인물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몇 년이 흘렀다' '혼자 벽돌을 굽고 있었다'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문장들이 한쪽씩 차지하는 거대한 결말에 이르렀다. 그제야 궁금했다.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소설 속의 주요 인물인 세 여자는 나름 열심히 살았지만, 운명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노파는 왜 그토록 몸을 버려가며 돈에 집착했을까. 고생 끝에 안정을 찾은 금복은 왜 남자로 변했을까. 춘희는 왜 벽돌 만드는 일에 죽도록 매달렸을까. 처절하게 삶을 찢어가면서 그들이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약 10초간 진지하게 고민하며 내린 결론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을 중심으로 정신없이 흘러가는 거대한 물결 같은 것이 '인생'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언영 씨를 사랑하게 된 날이 문득 생각난다. 무슨 이유로 친구들이 다들 모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날이었다. 내가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가자 잠시 후에 언영 씨가 따라 나왔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담배 냄새가 싫었다며 "담배는 누가 만들었을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여자였다. 그랬던 언영 씨가 그날은 내가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기다렸고,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그런 게 인생이다. 이 책의 도도한 흐름처럼, 우리들의 인생도 제 나름대로는 도도하게 흘러가는 법이다.


Who >> 박명호
1978년 김해에서 태어나 '진한테크'라는 사업체를 경영하고 있다. 남녀공학으로 전환한 신라대에 진학했으나, 그해 신설된 공대로 입학하는 바람에 '오아시스 속의 사막'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졸업을 앞두고 다행히 지금 아내의 언영 씨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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